칼의 노래 2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싸움은 늘 혼자. 김훈의 말처럼 “나의 적은 전투 대형의 날개를 펼치고 눈보라처럼 휘몰아 달려드는 적의 집단성이기에 앞서, 저마다의 울음을 우는 개별성(122)"을 지닌 인간의 놀이다. 집단적 광기는 군중심리를 불러일으키며, 냉철한 이성을 감성 앞에 잠재운다. 그리고서 개별성을 숨긴 체 싸움을 나서지만, '혼자임'은 분명하다. 이를 인식하는 것은 싸움에서 죽음을 쉬이 인식할 수 있으며, 절대 고독에 갇히게 됨을 나타낸다. 개별성을 집단성에 던져 넣으면 무지가 사라지고, 용기가 생기고 무엇이든 헤쳐 나갈 수 있을 듯 한 착각에 휩싸인다. 여기에는 철저하게 '개별성'을 인지하는 존재는 없다. 근데 이 개별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이가 있다. 그가 눈을 뜨을 때 "온천지의 적들에게 포위되어(134쪽)"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적들의 두터울수록 칼의 울음소리는 거칠어 간다. 그는 칼의 울음소리를 통해 두려운 적들을 잠재우려 하고 있다.

이순신, 그는 "세상이 견딜 수 없이 가엾고, 또 무서웠다"(32쪽) 말을 무시로 내뱉으며, 몸부림을 치지만 전장의 한 가운데에 늘 서 있다. 이 가엾고 무서움 앞에 홀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적은 내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내 안의 적은 희망을 빼앗아 가고,

"희망은 없거나, 있다면 오직 죽음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절망의 앞에 절대 고독에 갇히게 되며 목숨 건 싸움을 한다. 희망이 없는 세상에, 무서움 앞에 나서는 것이다. 이 싸움은 무지와의 싸움이며, 그 무지는 조정과 임금, 신하, 명군 장수 등이다.

조정은 전장의 안위에 있으면서 지휘권을 남용한다. 적과 칼을 하나 주고받으며 목숨 건 싸움을 하는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닌, '언어'만이 존재하는 구중궁궐에 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근본부터 다른 싸움이 된다.

"임금의 전쟁과 나의 전쟁은 크게 달랐다"(51쪽)

"임금은 멀리서 보채었고, 그 보챔으로써 전쟁에 참가하고 있었다"(92쪽)

임금이 가엾고, 조정이 가엾지만 그는 싸운다. 이순신은 싸움에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적이 죽어가는 것인지 내가 죽어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희망을 생각하지 않았다." (33쪽)

오직 비움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경지, 유(有)와 무(無)가 이무런 의미가 없어지며, 살아서도 죽어있고 죽어서도 살아있는 신선 같은 인물이 된다. 나를 버림으로써 싸움은 최전선에 설 수 있고, 힘찬 칼놀림을 마음껏 휘두를 수가 있다.? 무지의 벼랑 끝에서 홀로 싸우는 이순신의 몸부림은 처절하다. 어찌 이리도 가여울까? 한 인간이 절대 무지(無知)와 싸울 때 -"온 천지의 적들에 포위되어"(134쪽) 있으면서 나를 버릴 수 있는 용기, 이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 싸움이 있기에 싸움이 있는 건가?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순신은 '임금'과 싸우고 있다. 왜군과 싸우면서 '무지의 임금'과 싸운다. 왜군은 도구적 구실에 불과하다. 실제로 그와 전쟁터에 서 있는 사람은 '조정'이며, '임금'이며 '권력자'들이며, '세상의 중심에서 언어'로서만 싸우는 무리들이다. 조정은 가엾고, 처음부터 울음을 걷치지 않고 있으며, 무능할 뿐이다.

"조정이 가엾구나, 우리는 가엾지 않다."

'언어의 울음'(44쪽~58쪽)은 임금의 무능에 대한 장계(狀啓)이다. 왜 이 부분에, 이 글이 필요한가는……. 내 적이 왜군이 아닌, '임금'이기 때문이다. 임금은 어린아이 마냥 '멀리서 보채'기만 한다. 임금이 나를 믿지 못할 때, 즉 국가가 나를 믿지 못할 때 내가 느끼는 비애는,

"희망이 없거나, 있다면 오직 죽음 속에 있을 것만 같았다"(23쪽)

라고 술회한다. 세상에서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곽재우처럼 시선이 되지 못하고 전장의 한 가운데 서 있다. 다시 묻는다. 왜? 왜, 나는 신선이 되지 못하는 걸까?

"나는 세상이 견딜 수 없이 가엾고, 또 무서웠다. 나는 허망한 것과 무내용한 것들이 무서웠다"(32쪽)

이 무서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싸우는 이유는? 앞서도 말했지만 이 싸움은 이순신과 왜군의 싸움이 아닌, 이수신과 임금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자기애의 믿음이 강하며, 자기의 병법으로 전략으로 구사하여 전장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로써 이순신과 임금의 싸움은 종지부를 찢게 되며, 무지와의 싸움에서 또한 승리하게 된다. 그는 고독한 싸움을 벌였지만 절대 고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싸움에서 이겼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그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문득문득 스치는 의문,

"이 글은 오직 소설로서 읽혀지기를 바란다"

나는 분명 소설을 읽고 있다. 내가 『칼의 노래』를 듣었을 때 부터, 그리고 어제 읽기 시작했을 때 부터 지금까지, 아니 책을 덮고도 소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근데, '오직 소설로서' 읽으라고 못 박는 이유는 뭘까? 여느 소설책을 보았지만……. 나는 어제부터 품은 생각의 실마리를 이제서야 풀었다.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고", 세상이 견딜 수 없이 가엽"워서이다. 세상에 무지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무지의 힘이 살아남고, 오직 힘만이 힘을 억누를 수가 있다. 세상에는 '허망한 것'과 '무내용'으로 잠식 되었으며, '알맹이'와 '내용'이 없다. 어쩌면 이는 '신선'과 함께 깊은 산속에 살고 있을는지 모른다. 이 책 또한 소설이 아닌 전기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빌어먹을……. 세상이 무지로 덮여, 읽는 내 무지에 대한 강한 경계이다.

암만 생각해도 이 부분은 감정이 앞선다. '소설로서'읽어라. 그럼 내가 '전기'를 읽는다고 착각하는걸까? 아니면 소설 속의 주인공 이름이 역사 속 이름과 같다하여, 소설 속 사건을 역사적 기록, 주인공의 고뇌를 이순신이라는 이의 인간적 고뇌로 본다는 말인가? 즉 '무'와 '유'를 구분 못하는 내 무지에 대한 금심으로 간곡히 부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직 소설'로 읽기를!!

솔직히 모르겠다. 어떤 이의 감상평처럼, '허무, 의미 없음과의 싸움'인지 세상에 대한 오만함인지…….

김훈은 책머리에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그리고 정의로운 자를 역사 속에 불러내어,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에 다시 나왔다. 그가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무지와의 싸움에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내세우기 위함이 아닐까라는 착각이 살짝 스친다.

책을 읽어가는 내내, '미문(美文)의 과(過)함'과 '임금에 대한 병적인 파괴', '이순신의 인간적 고뇌에 대한 집착', '중립적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운 지은이의 모습' 등 여러 가지가 스친다. 이순신을 높이기 위해 그렇게 많은 미문이 필요하고 그렇게 많은 적들을 만들어 내어야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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