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스탠 바이 미 : 스티븐 킹의 사계 가을.겨울 - 스티븐 킹의 사계 가을.겨울 밀리언셀러 클럽 2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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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내게는 《샤이닝》, 《캐리》, 《쇼생크 탈출》, 《미저리》 등의 영상 콘텐츠로 익숙한 작가. 내가 읽은 그의 저작이라곤 김영사 출판사에서 출간된 『유혹하는 글쓰기』 정도가 다였다. 그가 호러 소설의 거장이라는 것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실사화 하기 좋은 작품을 많이 써내는, 쉽게 얘기해서 소설보다는 시나리오에 능한 작가라는 게 내가 아는 스티븐 킹의 전반적인 이미지였다. 때문에 딱히 찾아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가 쓴 작품 중 괜찮은 건 대개 드라마 혹은 영화로 나올 테니까. 지금 생각하니 스스로의 무지에 쓴웃음이 피식 나오지만.


어찌어찌해서 펼쳐 든 책이 『스탠 바이 미』(월 휘튼, 리버 피닉스가 주연한 영화가 있었다는 건 뒤늦게 알게 되었다.)였다. 이 책은 그의 중편집 <사계>의 가을, 겨울에 해당한다.(봄, 여름은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이라는 제목으로 따로 출간 되었다.) 두 개의 중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안에 액자식으로 두 개의 단편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굳이 중편을 선택한 이유는 역시 ‘장편은 부담스럽잖아?’ 였는데 결과적으로는 참말 좋은 선택이 아니었나싶다. 후회했냐고? 아니, 그 반대다. 나는 앞으로 스티븐 킹을 사랑 아니, 존경하기로 마음 먹었다. 『스탠 바이 미』는 내 독서 인생 가운데 최고의 경험이었으니까.


그런데 참 이상하다. 왜 이 작가가 단순히 ‘호러’의 거장으로만 알려진 걸까? 혹시 나처럼 그를 그저 재미있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쯤으로 알고 있던 독자라면 지금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그의 소설 한 권을 펼쳐 읽기를 권한다. 왜냐고? 이런 문장을 한 번 읽어보자.




모든 감각의 입력(入力)이 증폭되었다. 마치 내 두뇌 속을 흐르는 전류에 과전압이 발생하여 모든 감각 기관을 110볼트에서 220볼트로 승압시킨 것 같았다.

p.199


내 경우에 글쓰기는 언제나 섹스를 대신하고 싶어 하지만 언제나 섹스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언제나 화장실에서 문을 잠가놓고 해야 하는 사춘기의 손장난 같은 일이다.

p.214



이런 ‘주옥같은’ 비유들이 책에 그득그득 실려 있다. 이런 건 단순히 흥미로운 플롯에 맞춰 줄거리를 구성한 소설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보물 같은 문장이다. 감히 판단하건대 스티븐 킹 그는 장르 소설의 대가라는 칭호만으로는 너무나 아까운 스토리텔러이자 빼어난 문인이다. 그가 여태껏 ‘장르 문학’이라는 감옥에 갇혀 지냈다는 건 앞으로 태어날 예비 독자들에 대한 우리 선배 독자들의 모욕임이 틀림없다. 이것은 필립 K. 딕을 그와 같은 감옥에 가둬놓고 굶겨 죽인 선배 독자들에 대한 나의 감정과 일치한다.


내용과 관련된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겠다. 이 책에 실린 두 개의 중편 중 하나는 이미 아주 오래전 영화화되었으며 또 하나는 영화화가 예정되어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재미’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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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1-20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늘 하는 말이 킹은 공포소설의 제왕이 아니라 그냥 소설의 제왕이십니다..

5DOKU 2016-01-20 15:02   좋아요 0 | URL
구구절절 공감합니다.
 
세상의 마지막 밤 민음사 모던 클래식 33
로랑 고데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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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추잡한 세상에 한 줌 빛을 뿌렸던 유명(有名) 인사들이 2016년 병신년(丙申年)이 밝기가 무섭게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데이빗 보위, 미셸 트루니에, 그리고 신영복.  다시 한 번 그들의 명복을 빈다.


사자(死者)는 말이 없고 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상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먼저 간 이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일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모든 이가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특히 고종석. 그에게 사자란 그저 명복을 빌어주면 그만인 망자(亡者)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일까?




“명복을 빕니다. 또 한번 경쟁적 추모의 물결이 일겠구나. 나는 (신영복)선생을 20년 동안 가둬놓은 장군들에게 깊은 분노를 느끼고, 그 긴 옥살이를 견뎌낸 선생에게 경외감을 느끼지만, 선생의 책에서 배운 바는 거의 없다.”

_고종석, 트위터


“며칠간 꽃가게가 대목이었겠다.”

_고종석, 트위터(파리 테러 희생자들의 꽃다발 사진을 올리며)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함에 무슨 기준이 있겠으며 모두가 사자의 명복을 빌 이유도 없을 터. 하지만 사자에게 던지는 고종석의 저 유난한 표현 방식에는 어떤 졸렬함이 묻어 있다. 


해서 나는 고종석에게 로랑 고데의 책 『세상의 마지막 밤』을 추천한다. 이 책은 죽은 아들을 다시 한 번만이라도 보기 위해 지옥문을 넘어간 어느 아버지의 이야기다. 사후 세계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책이 묘사하는 지옥과 그곳 넋의 모습에서 고종석이 보고 느낄 만한 무엇이 있다고는 생각한다.




저 망령은 두 뺨을 눈물로 흠뻑 적신 채 웃고 있다. 조금 전 산 자 중 한 사람이 자기 생각을 떠올렸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녀가 단 한 번도 그만 한 애정으로 자신을 떠올릴 거라고 생각조차 해 본적 없는 사람이었다. 저길 봐라. 다른 망령들은 울다가 제 머리칼을 잡아 뜯는다. 자신들에 대한 기억이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 지속될 거라고 생각했으나, 실상은 반대로 그 누구도 더 이상 자신들을 떠올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하는 것이지. 가까운 이들도, 심지어 부모들도. 저들은 피를 토하며 퇴색한다. 완전히 투명한 존재가 될 때까지 점점 더 흐릿해지다가 무를 향해 사라진다.

p.227



로랑 고데는 우리가 알고 있던 지옥의 모습을 다르게 묘사한다. 그에게 지옥이란 그저 고통 받는 공간이 아니라 이승의 모든 것에 감응(感應)하며 버텨내는 곳이다. 이것은 일종의 형벌이 될 수도, 축복이 될 수도 있다. 


만약 문학에 어떤 기능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기 위해 기꺼이 그 세계를 창조하고 사유하는 일 말이다. 그곳을 믿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어쨌든 우리 인간은 죽을 때까지 인두겁을 쓰고 살 수밖에 없으니 최소한 그 몫은 하자는 것, 바로 '나'를 위해서다.


나를 위해서, 이제는 세상에 없는 존재들에 대해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것이 아니라, 없는 세상까지 만들어가며 그곳을 느끼고 사유하는 일. 로랑 고데는 그것만이 살아 있는 사람이 해야 할 최소한의 노력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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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0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20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eBook] 서머셋 몸 단편선 - 사르비아총서 608 범우 사르비아 총서 608
서머셋 모옴 지음, 이호성 옮김 / 범우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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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온 지 15년도 넘은 책이라 구성이나 번역이 허술하지 않을까 했는데 기우였다. 특히 번역이 기대 이상으로 깔끔했다. 수록작이 대체로 통속적이긴 한데 문장에 온갖 분칠을 하느라 작가 스스로 결국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 길을 잃은 채 출간되는 쓰레기들보다는 백배 천배 낫다. 무엇보다 재밌다!




서머셋 모옴은 우리가 선망해 마지않는, 이른바 절제되고 금욕적인 인간군상이란 전부 쓰잘데기 없음을 선언하며 그러한 가치관에 ‘카 아악 퉤!’ 하고 침을 뱉을 줄 아는 작가였다. 일테면 그는 삶의 가치를 유예한 채 오로지 '노오력'이 최고라 믿는 개미보다는 허구한 날 방구석에 처박혀 기타줄이나 퉁기며 ‘노오래’를 부르다 죽더라도 ‘지금 여기’에 살 줄 아는 ‘베짱이가 짱이야!’라고 외칠 수 있는 넘나 훌륭한 작가였던 것.


그는 묻는다. 금욕과 절제된 삶이란 것이 대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냐고. 방탕과 사치를 일삼고(「약속」) 심지어 충동에 못 이겨 살인을 저지르더라도(「편지」) 지금 이 순간 내 감정, 내 선택에 충실한 자와 비교해 종교와 제도, 타인의 평판과 명예에 묶여 사는 이(「비」, 「최후의 심판」)가 진정 살고 있기나 한 것인지를 말이다.


작품들이 주는 메시지의 공통점은 '지금'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삶의 의미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지 과거나 미래, 종교와 명예 따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평생을 금욕으로 일관하며 지루한 삶을 연명하느니 방탕한 삶을 살았더라도 짧은 생 자신에게 정직했다면 그로써 족하다는 것이다. 과연. 무릎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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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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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소세키 월드에 입문했다. 원래 계획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었는데 풀베개라는 제목이 왠지 모르게 운치 있다. 무작정 펼쳤는데 결론적으로 나쁘지 않다. 아니, 괜찮다고 해야겠다. 다 읽은 후 인터넷에 몇 가지 서평을 찾아봤다. 이 책을 쓴 무렵 소세키의 나이가 불혹이란다. 전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도련님>과 비교해 적잖이 점잔을 뺀 작품이라고도 한다. 어쩐지 괜찮더라. 입문은 방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점잔을 좀 빼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까.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 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옮겨 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 (15p)



 소설은 서양화를 배운 화가(그때는 화공이라 불렀던 것 같다)이자 화자가 그림을 그리고자 작은 시골 마을을 들어서며 시작한다. 화가는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낀 듯하다. 나중에는 "발길을 멈추면 싫증이 날 때까지 그 자리에 있게 된다. 그렇게 있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도쿄에서 그렇게 하면 금방 전차에 치여 죽는다. 전차가 죽이지 않으면 순사가 내쫓는다. 도회는 태평한 백성을 거지로 오인하고, 소매치기의 두목인 탐정에게 많은 월급을 주는 곳이다."(134p) 라며 도시를 평하는 걸 보니 작품 속 시종일관 비인정(非人情, 의리나 인정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일)한 시선으로 모든 풍경과 상황을 사유하는 그의 태도를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반면 일백여 년 전 삭막한 도회 생활을 견디지 못했던 그를 2014년 속 도쿄로 떨어뜨린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도 궁금해진다. 아마도 증발하지 않았을까?


 작품 속 화가는 소세키 자신일 것이라 짐작한다. 평생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그가 도회 생활을 어찌 생각했을지는 보지 않은 블루레이가 따로 없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소세키와 같은 신경쇠약을 앓고 있는 사람이 지금도 많다. 모두 힐링 힐링 거리며 팍팍한 세상살이를 한탄한다. 여기서는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도 힐링 관련 서적에는 눈길도 주지 않으며 시치미를 떼 왔으나 이미 백여 년 전에도 같은 고민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소세키는 불혹의 나이에 화가가 돼, 비인정의 풍류를 마음껏 즐기고 싶었나 보다.


 그림을 그리려던 화가는 어찌 된 일인지 그림 한 점 그려내지 못한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쪽에 가까울 정도로 그는 그림과는 영 무관한 일에 관심을 쏟는다. 그러면서도 비인정의 시선은 그대로 유지하는데 작은 돌부터 시작해 유채꽃과 종달새의 울음소리며 서양과 동양의 미학론을 따져보기도 하고 이혼하고 집으로 돌아온 여인과 곧 만주의 전장으로 떠날 청년에 이르기까지 한치도 쉴 틈이 없다. 애초에 그는 그림을 그릴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처음 산길을 오를 때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착상을 종이에 옮겨놓지 않아도 옥이나 금속이 스치는 소리는 가슴속에서 일어난다. 이젤을 향해 색을 칠하지 않아도 오색의 찬란함은 스스로 심안(心眼)에 비친다. 그저 자신이 사는 세상을 이렇게 깨달을 수 있고 혼탁한 속세를 마음의 카메라에 맑고 밝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된다. (16p)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불쑥 떠오르는 하이쿠 한 소절을 가슴속에 써보고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목련의 따뜻한 담황색을, 연못에 떨어지는 동백꽃의 붉은색을 심안에 비출 수 있었다. 애써 무엇인가 그리고자 했다면 모처럼 맞이한 우아한 경지에 이치를 내세우고 쓸데없이 탐색하여 그림을 망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애써 이해하고자 했다면 여인의 뜻밖의 행동 또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터이다. 보이는 것과 느끼는 것.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소세키식 힐링법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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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1-24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기보다
풀노래와 숲빛을
모두 가슴으로 받아들였구나 싶어요.

5DOKU 2014-01-24 15:36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이십니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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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메뉴는 닭볶음탕인가보다. 냄비 뚜껑을 열자마자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더니 금세 코로 스며든다. 반지르르한 닭고기를 보니 군침이 돌기 시작한다. 뜻뜻한 밥 한 공기에 당근, 감자, 닭고기 한 점 올려 한 숟갈 뜨는 상상을 하니 어느새 기분이 좋아진다. 국자 한가득 접시에 떠 담아본다. 흐음, 이 정도면 내 위장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구나 하고 양을 가늠해보곤 식탁에 올린다.



모두들 똑같은 검은 옷 위에 번호표를 달고 있어서 똑같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이만저만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다. 서열이 이만저만 다른 것이 아니다. (22p)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좋게 보면 자유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나에겐 그저 사소하기만 한 저녁을 먹기 전 잠깐의 과정도 책 속 슈호프에겐 상상도 못할 일이다. 장소가 수용소라는 것과 신분이 죄수라는 이유로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누려야 할 자유조차 수많은 부조리 속에서 흔적을 감춘다.억압된 생활 속에서 그들은 '인권'이나 '자유'에 대한 갈망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 그들에게 부조리는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일상이 돼버렸고 환경은 그들에게 부당한 대우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대신 스스로 작아지는 법을 가르쳤다. 통제는 사람을 작아지게 한다. 그 결과 어쩌다 주어지는 작은 자유에도 만족감을 느끼는 나약해진,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나는 보았다.

 이 이야기는 허구지만 허구가 아니라고도 볼 수 있다. 저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수용소 생활을 하며 느끼고 보았던 현실을 가감 없이 서술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자전적 소설인 것이다. 당시 소련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어이없는 이유로 많은 사람을 잡아갔다고 한다. 저자의 죄명은 반소였다. 노동형 8년을 선고받은 그는 탄광 지대에 있는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복역하게 되는데 아마 이 책을 쓸 때 필요했던 모든 제재를 당시에 습득하지 않았나 싶다. 수용소 안에도 서열은 있으며 가진 것(받는 소포의 양)에 따라 보이지 않는 계급까지 정해지는 현실. 어떻게 보면 부조리한 사회 모습을 축약한 듯한 수용소 생활을 견디며 저자는 많은 생각을 한 듯하다. 이는 결과적으로 사회를 고발한 격이 됐다. 저자는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라는 인물이 겪은 수용소의 하루를 담담하게 보여주며 그 속에 사회가 가진 수많은 부조리와 다양한 종류의 인간상을 고발하고자 한 게 아닐까. 수용소라는 축소된 사회는 어쩌면 현재 우리 사회를 거울처럼 비추는 셈이다. 사회를 비판하고 고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야말로 그 중 가장 현명하고 확실한 표현법을 아는 사람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을 하고 있노라면, 시간이 어이없이 빨리 지나가고는 한다. 수용소에서의 하루하루가 빨리 지나간다는 생각이 든 것이 한두 번이 아닌 슈호프지만, 형기는 왜 그리 더디게 지나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전혀 줄어들 기미가 없다. (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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