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선화 [할인] 은행나무 노벨라 3
김이설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평점 :
판매중지


선화는 얼굴에 화염상모반을 지니고 태어났다. 화염상모반이란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형태의 질환으로 몸의 특정 부위에 혈관이 지나치게 몰려서 생겨나는 증상이다. 하나의 질병일 뿐 무슨 천륜을 어기거나 패륜을 저질러서 새겨진 ‘낙인’이 아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어떤 사람의 인격 전체를 뒤덮어서 그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자신을 타인들 앞에 제시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돌출적이고 부정적인 속성’(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p.121)을 스티그마 즉, 낙인이라 정의했다. 선화에게 화염상모반은 이 낙인이다. 가족에게 선화는 저주였고 선화에게는 세상이 곧 저주다.


평화학자 정희진이 지적했듯 훼손, 돌출, 함몰, 나약함 등 주류 사회가 권장하는 정상 기준이 아닌 ‘매끄럽지 못한 몸’은 곧 무질서와 비정상을 상징한다. 연민은 괜찮고 혐오는 안 된다 누가 그랬던가? 혐오든 연민이든 타인에게 비치는 자신이 그런 감정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자체가 폭력이다. 화염상모반은 선화가 동등한 성원으로서 타인에게 현상하지 못하는 일종의 장벽처럼 작용한다. 고작 오른쪽 얼굴을 덮은 그것이 자신의 인격과 앞으로의 삶 전체를 덮어버린 것이다. 소설 속 화염상모반은 단순히 하나의 질환이 아니라 사회가 아니, 우리가 수없이 보고도 고개를 돌렸던 그들의 고통을 은유한다.




학교의 선생들이나 동급생들에게 받았던 왜곡된 시선이나, 멸시, 조롱 따위는 차라리 나았다. 세상은 나 같은 존재 자체를 아예 인식하지 못했다.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 쳐다볼 이유조차 없는 존재, 신경쓸 겨를도 없는데다, 필요도 없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한낱 먼지와 같은 것이었다. 그걸 처음 깨달은 게 그 나이 무렵이었다. 아무리 내가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도, 아무리 내가 성적이 좋아도, 아무리 내가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 올바른 성격을 소유했다 해도, 그건 아무런 필요가 없는 항목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애초에, 처음부터, 이 따위의 얼굴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존재해서는 안 될 괴물이었다.


p.86



김이설은 이렇게 우리가 애써 덮어두고 무시했던 문제들과 서슴없이 대면하는 작가다. 장편 소설 『환영』이 그랬고 『선화』 역시 마찬가지. 끊임없이 쓰면서 그것들을 응시한다. 화염상모반을 꽃으로 환원한 부분이 특히 좋았다. 낙인이 아니라 꽃. ‘예쁜 꽃다발은 원래 꽃이 예뻐서이거나, 예쁘게 보이기 위해 규칙을 잘 지켜 묶었기 때문’(p.16)이지 거창하게 무언가를 상징하거나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다. 김이설에게, 그리고 선화에게 화염상모반과 꽃은 다르지 않다. 선화가 꽃을 그저 있는 그대로 대하는 듯 세상이 그녀의 상처를 모두가 하나쯤 지닌 생채기로서 대할 수 있는 날이 오길 잠시나마 꿈꿔 보았다.


이렇게 주변부의 삶을 무시하지 않고 응시하는 것, 응시함으로써 개선을 도모하는 것. 그것만이 그녀가 작가로서 할 수 있는 문학적 도리인 듯 보인다. 다만,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완성도가 조금은 아쉽다. 중편이라는 형식이 주는 제한적 어려움 때문일까? 후반부로 갈수록 애초 소설이 가진 문제의식이 어떤 ‘적당한 선’을 갈구하는 느낌이 들었다. 예상 건대 선화는 이런 결말을 바라진 않았을 듯싶다. 깔끔한 마무리를 원한 건 아니지마는 작가가 조금 더 힘을 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교실
손창섭 지음 / 예옥 / 200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소설을 평하기란 나에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동시대 다른 소설들을 두루 접한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이 책은 그 가운데서도 유독 또렷한 당파성을 지닌 작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연재되던 당시 한국 사회가 6.25의 상흔을 여전히 씻어내지 못한 상황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그때를 오늘의 기준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자리 잡기 이전). 무너진 산업 재건의 필요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을 다시 찾는 것이 당시 사회의 긴요한 문제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내게 충격을 준 것은 그런 상황에서 손창섭은 저 혼자 외떨어져 ‘가족 해체’라는, 당시로써 상상도 할 수 없는 작업을 감행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의 눈에 비친 당시 한국 사회의 모습은 기존 통념과는 전혀 달랐다는 것인가? 이 소설은 분명 내가 아는 사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출판사의 홍보 문구에서도 볼 수 있듯 도촬과 훔쳐보기는 물론이고 동성애 그리고 일종의 계약 가족의 형태까지 등장하니 말이다. 내가 아는 갓 60년대에 접어든 한국의 모습은 이렇지 않다.


이 간극과 괴리감에서 오는 생경함이 책을 계속 붙들게 만든 듯하다. 여기서 손창섭은 몇 가지 형태의 가족을 구성하고 해체하길 반복하는데 이것이 단순히 실험적 요소에서 그치지 않고 소설이 갖춰야 할 서사적 재미를 잃지 않는 점이 신통하게 다가온다. 내 기준에서 보건대 분명 미문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교실』은 소설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그런 미문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전개에는 막힘이 없고 아슬아슬하게 갈마드는 수위의 강약 조절 또한 훌륭하다. 아닌 게 아니라 책을 덮고 나니 문장의 치장에만 중점을 두고 결국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별 게 없는 오늘 한국 문학의 분위기에 일종의 배신감마저 느꼈으니 말 다했다.




남자의 방탕을 긍정한다면 여자의 방탕도 긍정해야 된다 그거요. 여자의 방탕을 긍정할 수 없다면 남자의 방탕도 절대로 긍정해선 안 된단 말요. 물론 이상을 말하자면, 남자고 여자고 방탕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이상이겠지만, 역사가 있은 이래 남성 본위의 인간사회에서는 남자의 방탕만은 공공연히 활갯짓하며 성행해 오지 않았느냐 말요. 그러니 남녀동등권이요 인권이요를 걸핏하면 내세우는 요즘 세상에선 정숙이니 부도(婦道)니 하고 남자 쪽에만 편리한 보통명사를 만들어가지고 여잘 묶어놓는다는 건 당치않은 일이란 말요.


p.182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역시 주인갑 씨의 ‘방탕론’이다. 나는 여기서 주인갑이 곧 손창섭 그 자신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소설에서 손창섭은 주인갑 씨의 입을 빌려 자신의 자유로운 성관점과 페미니즘적 주장을 솔직하고 담대하게 펼쳐 보인다. 그리고 이것이 당시 한국 문단이 손창섭이라는 진보적 사상가를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홀대한 원인이 아니었나 싶다.


이 소설이 나오고 약 40년 뒤 소설가 김훈은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딸은 페미니즘 같은 못된 사조에는 물들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무려 40년이다. 40년이면 강산이 네 번 바뀌고도 남을 세월 아닌가. 한국 문단에서 김훈이 가지는 상징성을 본다면 손창섭이 일본으로 떠난 이후 이 바닥이 이뤄낸 평등적 발전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훗날 대중적으로 알려진 손창섭의 작품들도 대개 사상적 성격이 덜한 초기작이라는 점 또한 고려한다면 어쩌면 손창섭 그는 한국 문단이 품기에는 너무나도 과분한 작가였는지도 모르겠다.


서사적 재미와 사상적 통찰을 동시에 줄 수 있는 작가는 지금도 찾기 어렵다. 그리고 이 소설은 단순 통속소설 범주에 묶이기에는 이야기가 지닌 날카로움이 예사롭지 않다. 요즘 세간이 페미니즘 담론으로 시끌벅적하지 않은가.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손창섭의 후기작들에 대한 사회적 조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6-02-06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대를 앞선 천재입니다.

5DOKU 2016-02-06 22:49   좋아요 0 | URL
삼부녀도 조만간 읽어볼 예정입니다.
 
[eBook] 서유기 3 대산세계문학총서 23
오승은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4월
평점 :
판매중지


아기다리고기다리던 마지막 동료 사오정이 드디어 합세했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무려 3권에서!) 모 애니메이션의 영향 때문인지 사오정을 그저 웃기기만 한 캐릭터로 알고 있던 나로서는 그야말로 선비와 다름없는 원작의 그를 보니 영 적응이 안 된다. 어떤 면에서보면 사오정은 매우 억울한 인물이기도 한 것이, 명색이 옥황상제를 호위하던 권렴대장이었는데 일개 술잔 하나 깨뜨렸다고 태형 800대를 맞고 지상으로 쫓겨났다는 사실이 참.... 21세기 관점에서는 이해가 되질 않는 것이다.


재밌었던 부분은 삼장 일행과 관세음보살의 관계다. 이건 흡사 게임 개발자와 게이머의 관계가 아닌지? 일테면 몇 차례를 싸워도 잡히지 않는 사오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결국은 관세음보살을 찾아간다거나 인삼과 나무를 쓰러뜨린 오공이 선계 신선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하다 또 결국에 찾는 인물이 바로 관세음보살. 마치 게임이 너무 어려워 개발자에게 하소연을 하는 유저들의 모습이 떠올라 절로 웃음이 나온다. 또 재밌는 게 관세음보살이 그런 오공을 꾸짖으면서도 정성을 다해 도와주는 장면(츤?)들이다. 일견 귀엽기도 하고 오늘날로 따지면 캐릭터를 잘 만드는 작가 오승은의 솜씨라 보면 되겠다.


아무래도 손오공과 여의금고봉이 신경쓰인다. 여의금고봉은 생김새나 쓰임새나 어딜 봐도 남근(권력)을 상징하는 것 같다. 예컨대 이런 대사. “이까짓 문짝 여는 것쯤 가지고 뭐 그리 대단하다는 거야? 하늘의 남천문도 철봉으로 가리켰다 하면 활짝 열릴 텐데…….”(p.225)를 보면 이건 영락없는 권력욕이 아닌가? 그리고 손오공. 태생부터가 ‘돌’ 과 얽혀 있기 때문인지 수명과 관련된 욕심이 크다(애초에 그가 화과산을 떠나게 된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까불이 시절 저승을 찾아가 살생부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지우는 모습이나 제천대성 신분으로 반도원 복숭아를 먹어치우는 모습, 이번 편의 인삼과까지. 손오공은 결국 죽음을 두려워하고 영생을 얻으려 하는 인간의 욕심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좀 더 넓게 보자면 삼장 일행 자체가 저마다 인간이 가진 어떤 욕망들을 상징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특히 저팔계의 상징(성욕, 식욕)은 너무 뚜렷해서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싶고 삼장은 과한 예측일지도 모르겠지만 안전 욕과 자아실현 욕, 사오정은 애정과 존경 욕(그렇다 매슬로우의 욕구 이론이다....)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아직 책을 다 읽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예상 자체가 섣부른 판단일 공산이 크지만 어쨌든 3권을 읽으면서 인물마다 하나씩 무언가를 상징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픈 카페의 노래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열림원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을 때 들었던 감정은 알 수 없는 기묘함, 혹은 이상함이었다. 미국 조지아 주의 황량한 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은 사료가게와 그곳을 운영하는 거구의 주인 어밀리어 에번스 그리고 그녀의 친척임을 주장하며 난데없이 나타난 꼽추 라이먼. 이들의 만남이 이루어낸 ‘카페’ 라는 안식처. 책을 덮는 그 순간까지 당최 종잡을 수 없는 어떤 기묘한 감정에 휩싸여 있던 나는 문득 소설가 김영하가 어딘가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아서 검색을 좀 해봤더니 그가 쓴 책 『말하다』에서 그 구절을 찾을 수 있었다.




소설이라는 이 이상한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와 완전히 다른 것 같지만 실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지구와 달의 관계와도 비슷합니다. 달은 무슨 인테리어 소품처럼 어두운 밤하늘에 떠서 광합성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희미한 태양광만 지구로 반사시키지만, 그럼에도 지구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조수간만의 차를 만들어내고 여성들의 생리주기도 조절합니다. 많은 생물들이 달의 주기에 따라 이동하고 짝을 짓고 산란합니다. 소설도 그와 비슷하게 인간들의 삶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소설이 그저 재미있어서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소설은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작용합니다. 그 작용을 우리가 평소에는 의식하지도 못하고 의식할 필요도 없다는 것, 그것이 소설의 가장 멋진 점 아닐까요?

_김영하, 『말하다』, p.159



그렇다고 해서 김영하의 이러한 소설론이 내가 이 책에서 느낀 어떤 불가해함을 명쾌하게 설명해주었느냐? 그건 또 아니었다. 나는 카슨 매컬러스가 창조한 이 이상한 세계에서 느낀 감정의 궁금증, 이 이상하리만치 답답한 감정을 해소하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재밌는 일도 있지, 공교롭게도 이 책에는 그와 비슷한 구절이 등장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아주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사랑을 불 지를 수 있다. 선한 사람이 폭력적이면서도 천한 사랑을 자극할 수 있고, 의미 없는 말만 지껄이는 미치광이도 누군가의 영혼 속에 부드럽고 순수한 목가를 깨울지도 모른다.

p.5



어? 하는 순간 탁 소리가 났다. 내 무릎에서 난 소리였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리고 사랑을 한다는 것의 관계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 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가슴을 억누르고 있던 답답함이 그제야 조금씩 가시길 시작했다. 사랑을 모르고 살던 어밀리어가 왜 하필 라이먼 같은 간사한 꼽추 녀석에게 빠졌는지, 라이먼은 왜 그토록 마빈 메이시 같은 불한당에게 매달리는 것인지 그리고 왜 나는 이들이 부르는 ‘슬픈 노래’ 를 공연히 듣고만 있는 것인지……. 어쩌면 카슨 매컬러스가 만든 이 이상한 이야기가 내 마음에 불을 놓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밀리어가 라이먼에 빠진 것처럼, 라이먼이 마빈에게 홀린 것처럼 나 또한 이 책, 『슬픈 사랑의 노래』에 빠져든 게 아닐까?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남들은 이상하기 그지없다고 할 이 이야기가 그토록 내 마음에서 떠나가지 않던 이유는 결국 카슨 매컬러스 특유의 사랑스러운 문체와 훌륭한 역자 장영희의 번역이 한데 어우러져 내 영혼 속에 숨겨진 순수한 목가를 깨웠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녀가 말한 ‘누군가’ 에 해당하는 사람인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김영하가 얘기했던 ‘의식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내 삶에 작용하는 소설의 힘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굳이 이것을 ‘의식할 필요도 없다는 것’ 이 소설의 가장 멋진 점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이상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즐기기로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태풍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4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날 사람들은 그야말로 다양한 종류의 경험을 ‘산다’. 하기야 돈만 많다면 못할 것이 없는 세상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는 예외다. 그것은 바로 고통. 엄밀히 말하자면 죽음의 고통이다. 사무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높은 곳에서 몸을 던지는 누군가와 곤궁한 삶에 배를 주리다 죽는 순간마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종이에 써놓고 가는 사람, 편안한 삶을 포기한 채 사회 부조리에 온몸으로 맞서다 공권력의 희생양으로 허망하게 유명을 달리하는 투사까지. 돈으로는 절대 경험하지 못하는, 그 자리에 서보지 않은 이는 감히 경험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죄가 되는 죽음의 고통. 소세키는 말한다. 이런 고통을 '맛본' 사람만이 문학자가 될 수 있다고. 




(…) 문학은 말이지요, 학문이나 학문 연구를 방해하는 것이 적이 됩니다. 예를 들면 가난하다거나 바쁘다거나, 압박이나 불행이나 비참한 사정이나 불화나 싸움 등이 그것이지요. 이런 것들을 피해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얻으려고 합니다. 문학자 역시 지금까지는 그래왔습니다. 그래왔을 정도가 아니지요. 여러 학문 중에서 문학자가 가장 여유로운 시간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여겨져왔습니다. 웃긴 것은 당사자들조차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문학은 인생 그 자체입니다. 고통이 있고, 궁핍이 있고, 고독이 있고, 무릇 인생길에서 만나는 것들이 곧 문학이고, 이런 것들을 맛본 사람이 문학자입니다.

p.100



소세키의 말에 따르면 문학자는 세상의 좋은 것만 느끼고 그것을 책에 담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함민복의 곤궁함과 김신용의 비행을 느껴본 독자들은 자전거 좋아하는 모 작가가 라면 어쩌고 운운하는 가난에서 어떤 얄팍함을 간파하기 마련이다부실한 경험에 문장이라는 양념을 쳐놔서 분간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지만, 그의 일상 언어(인터뷰 등)를 자주 접하다 보면 단번에 구분할 수 있다. 그게 조미료에 불과하다는 걸. 


영국의 작가 잭 런던은 20세기 초 산업 자본주의가 가져온 호황기 런던 밑바닥 삶을 탐구하고자 거리의 노동자가 되었다. 그곳 곤궁한 사람들과 똑같이 생활하며 런던 이면에 어떠한 인간적 고통이 존재하는지 그는 몸소 체험했고 그 경험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 바로 『밑바닥 사람들』 이다. 이 책은 훗날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에밀 졸라는 어떤가? 그는 오늘날 프랑스 인권의 토대를 마련한 '드레퓌스 사건' 당시 선두에 서서 누명을 쓴 대위를 위해 자신의 작가적 지위와 명성을 포기하고 자국 프랑스와 맞선위대한 작가였다. 소세키가 말한 '고통을 맛본' 문학자란 바로 이들인 것일까? 힙합에서는 이것을 흔히 ‘스트리트 크레디빌리티’ 라고 한다. 경험에서만 나오는 일종의 에토스인 것이다. 오늘도 따땃한 방구석에서 키보드나 두들기는 나 같은 사람은 소세키의 말처럼 진정한 작가 정신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 그들의 궤적을 훑으며 그저 사색하는 길 외에는 어쩔 도리가 없을 성싶다. 


하지만 정말 나 같은, 그러니까 경험이 없는, 고통을 모르는 사람들은 소세키의 말처럼 진정한 문학인이 될 수 없는 걸까? 하지만 나는 위대한 문학이 반드시 어떤 고통을 동반해야만 탄생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물론 그런 경험이 위대한 문학을 만드는 밑거름임을 부정하진 않겠다. 실제로 지금 우리 삶을 바꾼 몇몇 문학 작품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다만, 그것이 마치 불변의 테제처럼 여겨지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쓴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이며 좋은 문학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진정 ‘안다는 것’ 은 무엇인가? 그것이 꼭 고통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산물일까? 어떤 작가들은 평생을 고통과 함께 살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좋은 글을 써내는 것은 아니다. 또 누군가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유자적하며 살다가 몇 세기를 굳건하게 버텨낼 고전 작품을 여러 개나 써내기도 한다.


해서 나는 감히 주장한다. ‘안다는 것’ 이란 반드시 고통의 여부나 경험의 넓이와는 비례하지 않는다고. 안다는 것, 그러니까 지혜란 어느 작은 경험이라도 그것을 사유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질적 향상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자기가 가진 경험의 넓이를 자랑하는 사람은 많다(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런데 그런 경험은 창고에 쌓아만 둔 채 정리하지 않는다면 한낱 쓰레기에 불과할 뿐이다. 앞서 열거한 좋은 문학가들은 결국 단순히 고통에서 그것을 건져낸 사람이 아니라 그 고통을 부단히 사유했기에, 위대한 작품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