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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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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걷는 게 그저 좋았다. 좋은데 이유가 있을까. 그냥 걷다 보면 수많은 생각이 든다. 무슨 생각이든 상관없다. 잡념이라도 떨쳐버릴 수만 있다면 말이다. 뭐든 과하면 탈이 나기 마련이다. 좋은 싫든 적당히 하는 게 좋지만 사람 마음이 그리 쉬운 게 아니니까.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더 먹어보고 싶고 생각나는 사람은 계속 보고 싶은 건 당연한 이치. 하지만 예외는 어딜 가나 있기 마련이다.  대체로 공부가 그랬다. 적당히 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다. 하면 할수록 괴로운데 한눈이라도 팔면 진도는 저만치 도망가기 일쑤였다. 머리 굵어지고 보니 공부는 과하게 해도 탈 나는 꼴은 한 번도 못 본 것 같다. 


  온다리쿠의 <밤의 피크닉>엔 고교 생활 3년간 매해 한번씩 치르는 '야간보행제'란 행사가 등장한다. 이 행사는 전교생이 하루 동안 80km를 걷는 것이 그 목적. 수많은 학생이 저마다 소망을 품고 교문을 나서는 모습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짧은 거리도 아닌 무려 80km. 다들 낙오 될 세라 열심이다. 힘들면 그만두면 될 텐데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걷게 만드는 걸까?


  입대 당시의 나는 행군이란 훈련이 생소했다. 육군 훈련소에서 걸었던 주간행군과 야간행군은 그야말로 최악 그 자체였다. 고작 20km 정도 걷는 것뿐인데 그 정신적 압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마치 강철로 제작된 게 아닐까 의심되는 전투화를 비롯한 30kg에 육박하는 군장의 무게는 아마도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거라 생각한다. 야전부대에 배치받고도 상황은 그다지 좋아지진 않았다. 거리는 40km가 기본이고 4박 5일의 훈련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대부분 이 행군이라는 녀석이었으니 내가 걷는 것에 질려버릴 만도 했다.


  물론 이 소설 속 주인공 다카코와 친구들의 여건은 이곳에 비할 수도 없겠지만 날 압박하던 군장의 육중한 무게나 다카코가 멘 빵빵한 배낭이나 걷다 보면 결국 잊혀버리기 마련이다. 계속해서 걷다 보면 현재 내가 신고 있는 것이 운동화인지 전투화인지, 어깨에 메고 있는 건 군장인지 배낭인지 상관없다. 오로지 정신력과 체력만이 내 몸뚱이를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처음엔 그게 너무 싫었다. 문득 '내가 왜 걷고있지' 란 생각에 미쳤을 땐 견디기 어려웠다. 목표 없이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반대로 작은 목표라도 생긴다면. 얘긴 달라지지 않을까? 다카코는 마음속에 작은 내기를 걸고 야간보행제에 참가한다. 오로지 자신만 알고 있는 내기. 그리고 깨닫는다. 모두 단순히 걷고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누군가는 마지막이 될 이 순간. 짝사랑하던 이와 함께 완주하길 원하고 누군가는 찾고 싶은 사람이 있기도, 누군가는 절친과 학창시절의 마지막을 기념하기 위해. 단순하지만 그 과정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떠난 누군가를 추억하며 아름다웠던 그때를 회상한다. 도착지점이 가까워졌을 때 오는 일말의 후련함. 걸으며 용서하고 화해하고 추억하며.. 성장한다.


  얼마 전 뛰었던 내 군 생활 마지막 훈련 혹한기.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을 읽지 않았더라면 최악의 훈련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겹도록 보이던 물집 하나 생기지 않던 발. 붉어진 뺨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마저 기분 좋게 느껴지던 그날 새벽. 난 행복했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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