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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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즘 내 관심은 온통 자본주의가 이 나라에 가져온 폐해에 쏠려 있다. 책을 읽을 때도, 영화를 볼 때도,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경찰이 쏘아 대는 물대포와 최루액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전진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보이곤 한다. 반면 힐링이라는 유행에 휩쓸려 모순적인 사회 구조가 안긴 상처조차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도 있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상처를 치료하는 것도 힐링에 관련된 소비 행위로 해결한다. 뺨 때린 사람은 생각도 못 하고 내 지갑을 열어 치료하는 게 유행처럼 번져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 아침 출근길,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코레일 파업과 공권력에 짓밟힌 민주노총의 이야기는 남의 일이 된 지 오래다. 오늘은 회사에서 어떻게 버텨낼지 중요한 사람들에게 그건 마치 길에서 만난 다른 나라 사람의 알아들을 수 없는 질문처럼 변해버렸다. 현재 우리의 삶은 이렇게 돌아가고 반복되는 도돌이표에 갇혀 있는 셈이다.


 '프로' 야구가 처음 시작했던 1982년. 인천에 연고를 둔 야구팀 삼미 슈퍼스타즈가 창단한다. 그리고 그 삼미 슈퍼스타즈를 열렬히 사랑하고 응원했던 소년.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소년에게 삼미는 그야말로 슈퍼맨과도 같은 존재였다. 프로야구 역사에도 기록돼 있지만, 이후 시간이 흐르고 꼴찌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기록을 갈아 치우던 삼미를 보며 소년은 단순히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프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이내 자신은 절대 삼미 슈퍼스타즈와 같은 삶을 살지 않을 것이라 다짐한다. '프로' 세계는 열심히 하는 사람을 원하지 않고 '잘' 하는 사람만 반긴다는 것을 세상은 어린 소년에게 가르치고 있었고 자신의 야구를 하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소년의 기억에서 그렇게 지워졌다.



평범한 야구 팀 삼미의 가장 큰 실수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었다. 고교야구나 아마야구에 있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팀이 프로야구라는 실로 냉엄하고, 강자만이 살아남고,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하며, 물론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인 세계에 무턱대고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평범한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비록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인생이라 해도 프로의 세계에서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삶이 될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126p)


이것이 프로의 세계다. 평범하게 살면 치욕을 겪고, 꽤 노력을 해도 부끄럽기 마찬가지고, 무진장,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해봐야 할 만큼 한 거고, 지랄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 '좀 하는데'라는 소리를 듣고,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의 노력을 해야 '잘하는데'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127p)



 실로 그렇다. 우리 사회는 열심히 하는 사람보다는 잘하는 사람을 우선시한다. 전문가라면 물론 자기가 하는 분야에서 일을 잘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비전문가에게도 사회는 '프로 정신'을 운운하며 열정과 재능을 강요하고 그에 따른 교육을 만들며 노동을 착취한다. 1980년대 대한민국은 평범한 삶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슬프게도 2013년 현재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평범한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배우며 자란 사람들은 이제 기성세대의 자격으로 사회 새내기들을 반기고 있다.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으며 더 나아질 기미도 없다. 이게 2013년 대한민국 현실이다.


 사회 가르침에 따라 프로가 되기로 한 소년은 일류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한다. 부모가 바라고 사회가 강요하던 그 '프로'가 된 것이다. 기쁨도 잠시. 이상하게도 소년은 전혀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일은 하면 할수록 늘어나고 상사의 잔소리는 줄어들 기미가 없다. 프로의 영광은 행복이 아니라 마치 로봇과도 같은 일상이었다. 한 명의 인간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작은 톱니바퀴 같은 삶이 소년이 이루어 낸 '프로' 세계가 달아준 훈장이었다. 기계는 필요가 없어지면 버려지는 법. IMF는 그렇게 예고 없이 찾아왔고 치욕적인 평범한 삶을 피해 지랄에 가까운 노력을 하며 버텨 온 소년은 마치 수명이 다한 냉장고처럼 폐기처분 되고 만다. 남은 것은 없었다. 돌아보니 오히려 잃은 게 더 많은 세월을 지나쳐왔다.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나는 일찍 일어난 새가 아니라, 일찍 잠을 깬 벌레였다는 것을. (223p)



 이후 소년은 자신이 어릴 적 그렇게 좋아했던 야구팀 삼미 슈퍼스타즈와 재회하게 된다. 이미 세월이 많이 흘렀고 프로야구 구단 목록에는 팀의 이름이 지워졌지만, 당시 소년과 함께 삼미 슈퍼스타즈를 응원했던 팬클럽 동료이자 대학 시절 갑자기 일본으로 떠났던 친구 조성훈이 돌아온 것이다. 소년은 삼미 슈퍼스타즈를 잊었어도 조성훈은 단 한 번도 삼미 슈퍼스타즈가 보여준 자신만의 야구를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조성훈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왜 삼미 슈퍼스타즈와 같은 자신만의 야구를 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별안간 없어진 팀의 팬클럽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소년에게 조성훈의 제안은 곧 나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손에 쥔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자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행복'이었다.



"이젠 1루로 나가서 쉬란 말이야…… 쉬고, 자고, 뒹굴고, 놀란 말이지.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봐. 공을 끝까지 보란 말이야. 물론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겠지. 어차피 세상은 한통속이니까 말이야. 제발 더 이상은 속지 마. 거기 놀아나지 말란 말이야. 내가 보기에 분명 그 공은―이제 부디 삶을 즐기라고 던져준 '볼'이었어." (235p)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279p)



 나는,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야구를 하고 있을까? 안타깝지만 내가 느낀 현재 우리는 자신만의 야구를 이미 오래전에 잊은 채 달려가고 있다. 손에 쥔 것을 나눠주기 싫어하는 기성세대와 공부하는 기계처럼 자라나는 학생들. 열정을 강요하며 노동자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는 기업과 자신의 상처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 채 유행에 이끌려 지갑을 열기 바쁜 사람들. 삼미 슈퍼스타즈와 같은 삶을 치욕이라 배우고 느끼며 보이지 않는 내일을 준비한다. 하지만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251p)라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야구는 사실 치욕스러운 것이 아니다. 부끄러운 것은 더더욱 아니다. 아마추어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이 잊지 말아야 할 당연한 진리다. 빼앗기지 말아야 할 마음가짐이다. 조금은 모자라고 조금은 평범해도 우리가 잘하는 야구를 해야 한다. 행복은 삼미 슈퍼스타즈와 같은 야구로부터 생겨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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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승
스티븐 갤러웨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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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사기 전 종종 인터넷 서점을 들르곤 한다. 미리 보기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차례부터 머리말, 도입부까지 읽다 보면 저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책을 썼는지 알 수 있어 좋다. 그중 내 지갑을 열게 하는 책은 대부분 도입부만 훑어도 느낌이 온다. 바로 이 책이 그랬다. 주인공 셜보 우르셔리의 마지막 외줄 타기를 다룬 도입부는 표현력이 생생해 작가가 마치 머릿속에 들어와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 한마디로 활자로 그려진 그림 한 폭이라고 할까. 어쨌든 그렇게 잘 쓰인 도입부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나를 자연스레 안내했다.


 집시의 인생은 태생 자체가 비극인 걸까. 셜보는 집시의 자식이었다.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몸 한번 편안히 누일 곳 없는 집시들의 삶.  "나를 선 채로 묻어라. 평생을 무릎 꿇고 살아왔으니." (25p), "우린 도망치는 게 아니란다. 때가 되어 더 나은 곳으로 떠나는 거지." (56p) 등 집시 언어에는 그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살아왔는지 고스란히 묻어 있다. 남을 도와주고도 집시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부모의 삶을 되풀이하는 것보단 줄 위에서 사는 인생이 그에게는 편안했던 걸까.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이 외줄 타기라는 것이 우리가 사는, 정확히 말해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88만 원 세대와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셜보가 타는 외줄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건 현재 우리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선택한 진로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는 날 우리는 사회라는 외줄에서 떨어지고 만다. 서커스 단장과 가족들이 안전망 설치를 제안해도 안전 그물 때문에 줄을 타는 순간의 집중력이 오히려 흐트러질 수 있다며 제안을 거부했던 셜보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어리석었다. 자신의 선택으로 함께 외줄을 타던 가족을 잃게 된 것이다. 사실 그들은 살기 위해 외줄을 선택했지만 누군가가 저지른 단 한 번의 실수가 모두를 비극 속으로 몰아넣었다. 물론 셜보의 잘못은 아니었다. 문제는 실수를 저질러도 다시 튕겨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전망이 없었을 뿐이다. 안전망이 없는 건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독자로서 셜보에게 부러웠던 한 가지는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자가 그랬던가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셜보는 진심으로 외줄 타기를 즐겼던 것 같다. 비극적인 일조차 줄타기를 잠시 그에게서 떨어뜨려 놓을 수는 있었을망정 포기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심지어 그것이 죽음이라도 겸허히 받아들이는 셜보의 모습은 오히려 행운아처럼 느껴졌다. 


 셜보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하는 그 일이 진정 당신을 즐겁게 하는가. 혹시 안전망 없이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힘든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안전망 따위는 필요가 없다. 떨어지더라도 그 순간이 행복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셜보는 아버지가 고난의 시기에 웅얼거리곤 했던 집시 속담을 떠올린다. "나를 선 채로 묻어라. 평생을 무릎 꿇고 살아왔으니." 하지만 셜보의 생각은 다르다. 그가 거의 평생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해온 그 생각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생각이 될 것이다.


나를 아무렇게나 묻어도 좋다. 나는 서서 죽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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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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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보태든 무엇을 외치든 세연이 말하는 이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는 모든 것이 휘발된다. 표백세대는 이 완성된 세상에서 개인의 색깔과 목소리를 잃은 채 살아가야만 한다. 모든 규칙은 기성세대가 정해 놨으니 유지하고 보수하는 삶은 우리 표백세대의 몫이라는 것이다. 세연은 위대한 업적을 이룰 자격을 박탈 당한 우리 세대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저항을 '자살'로 규정하고 '와이두유리브닷컴'이라는 사이트를 개설한다. 더불어 자신의 자살선언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잡기 모음이라는 소설을 집필한다.


  표백을 읽으며 세연이 주장하는 자살 저항은 나에겐 그저 무책임한 방법으로 느껴졌다. 얼마나 더 읽었을까. 잡기 모음 내용을 반절 이상 읽었나? 그 논리가 완벽해 어떠한 반박거리도 머릿 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최근 모 대학교 학생들의 자살 문제와 전교 1등을 하고 부모에게 이제 됐느냐는 유서만 남긴 채 자살해버린 어느 고등학생의 사연은 허구가 아닌 내가 숨 쉬는 이 나라 어디선가 일어난 현실이기에 그리고 내가 이 '표백세대'의 일원이기에 세연의 이야기는 극단적이지만 한편으로 가슴을 먹먹하게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다른 서구 국가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현 세대와 이전 세대가 처한 환경의 격차가 매우 뚜렷하다. 자신들의 힘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그것도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드라마틱하게 그 시대적 사명을 이뤄낸 세대가 우리 세대를 우습게 보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 거나 '분노할 줄 모른다' 고 비아냥거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190p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으며 나 이외 모든 사람은 경쟁자라 교육 받고 자란 우리 세대. 누군가의 삶을 짓 밟으며 올라간 그곳에 우리가 바라던 행복이라는 게 있을까? 그렇게 세연은 자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표백세대에게 저항하라 유혹한다.


  하지만 난 여전히 자살이라는 저항이 극단적이라 생각한다. 아무런 색깔을 가지지 못하는 세대라 할지라도 죽음이라는 방법으로 의미를 부여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파이트 클럽」을 쓴 척 팔라닉은 '최고의 복수는 행복해지는 것이다. 누군가가 행복한 인생을 보내는 것을 보는 것 만큼,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세상은 아직 세연의 말처럼 완성된 곳이 아니며 우리 세대는 어떤 방법으로든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성공'만이 아니다. 우리는 세연에 대한 휘영의 반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살 선언에 대한 내 반론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세연은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무가치한 것처럼 얘기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잖아. ...(중략)...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만들거나 만드는 기술을 갈고 닦는 데에는 왜 우리가 그걸 해야 하는지,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애써 설명해야 할 필요가 없어. 그러니 그런 일을 하면서 보내는 삶에도 가치는 있는 거야. 297p



  위대한 일을 해야만 하는 세대와 자격라는 게 애초에 있긴 한 걸까. 그런 업적을 남기라고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현실이 힘들고 어렵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기성세대끼리 정해 놓은 규칙 속에 교육 받으며 살아온 우리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우리만의 방식으로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죽음도 저항의 방법일 수는 있지만 최고의 저항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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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코스모스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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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나 영화는 수없이 봤지만, 같은 '연기'를 하는 연극은 태어나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분명히 작정하고 갔으면 어느 작품 하나쯤은 봤겠지만, 왠지 이제까지 연극이란 장르에 관심은 없었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연극은 드라마나 영화보다 접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크겠고, 작품이 가진 다양성이 적다는 점과 상영료 등을 들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 큰 이유는 '부담감'이다. 연극을 떠올리면 막연히 묵직한 작품성과 주제의식이 가진 심각성이 떠오른다. 자연스레 눈이 안 간다. 감상하며 즐긴다기보단 무언가 학습하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부담감 없이 보긴 어렵다.


 하지만 모든 건 연극을 체험해보지 못한 내 생각에 불과하다. 사실 지금 난 연극을 정말 보고 싶다. 온다리쿠의 <초콜릿 코스모스>는 이런 날 간절하게 한 작품이고.


 연극이, 무대의, 배우가 발산하는 열정과 에너지는 영화나 드라마에선 맛볼 수 없는 아름다움과 쾌감이 있다.무대에 선 배우와 객석에서 바라보는 관객이 서로 공유하는 설레임. 그것이 바로 연극이라는 것을 이젠 조금 알 것 같다.



눈 앞에 하나의 세계가 있다.  바로 저 앞에 있고, 같은 공기를 마시는데도 전혀 다른 세계가..



 이제까지 그저 단순하게만 생각하던 무대에 이젠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 객석과 무대의 거리는 불과 몇 미터 되지 않지만, 그곳엔 내가 가보지 못한, 체험할 수 없었던 미지의 공간이 있고 배우는 단순히 연기하는 게 아니라 실재하는 인물이 되어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되거나 때론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독이 든 사과를 건네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 마녀가 된다. 관객은 이 조그마한 공간에서 하나의 역사가 바뀌고 전설이 되는 영웅을 지켜보며 애절한 슬픔과 벅찬 감동 그리고 쓸쓸한 웃음을 맛본다.


 두 번의 오디션에 걸쳐 이뤄지는 두 천재 소녀의 성장 과정은 이 모든 감동을 담고 있다. 연예인 집안에서 성장한 교코는 비록 깨닫지 못했던 연기의 본질을 알아가고 선천적으로 타고난 연기 실력을 지닌 아스카는 이를 계기로 자아 확립을 하게 된다. 어느 시점에선가 난 관객의 입장이 되어 가미야가 느낀 충격과 다쓰마가 느낀 두근거림을 오롯이 맛볼 수 있었다. 정말 열정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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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도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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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왠종일을 기숙사에서만 뒹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펜을 들고 하루종일 책과 마주했던가? 그것도 아니다. 아.. 참으로 한심했던 시절이었다.  도대체 뭘 했던걸까? 무엇을 내 마음대로 이뤘을까? 꼬박 강의실에 앉아 결석을 단 한번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오직 그것이 결석을 밥먹듯이 하며 어른 흉내나 내는 어중이 떠중이들과 나의 차이점이라 여겼다. 나름대로 조금은 자부심도 있었나보다. 하지만 어설펐다. 그것도 많이.


  공부를 하려면 제대로 했어야 했고, 농땡이를 쳐도 눈치를 보지 말았어야 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어디쯤에서 서성댔다.


  다무라의 20대는 나에게 이상적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내가 바라던 일상. 평범한 20대의 일상 그대로다.  그의 거침없는 20대는 어설픔이란 찾아볼 수 없다. 적성에 맞지않자 때려치운 대학생활과 빠르게 시작한 사회생활. 나름의 커리어를 쌓아가며 서서히 자신을 알아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내가 그리던 20대의 모습 그 자체다.


  다무라를 보고 있자면 난 참 남자답지 못했구나란 생각이 든다. 패기도 없거니와 결단력은 물론이요, 용기 또한 결여되었으니 한심하기 그지않다. 될대로 돼라식 삶은 앞으로도 나를 계속해서 과거속에 묶어 두겠지...  '내 꿈은 뭘까?' 또 한번 질문을 던져본다. 학창 시절 줄곳 내게는 풀리지 않던 숙제...


  몸이 근질거린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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