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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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소세키 월드에 입문했다. 원래 계획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었는데 풀베개라는 제목이 왠지 모르게 운치 있다. 무작정 펼쳤는데 결론적으로 나쁘지 않다. 아니, 괜찮다고 해야겠다. 다 읽은 후 인터넷에 몇 가지 서평을 찾아봤다. 이 책을 쓴 무렵 소세키의 나이가 불혹이란다. 전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도련님>과 비교해 적잖이 점잔을 뺀 작품이라고도 한다. 어쩐지 괜찮더라. 입문은 방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점잔을 좀 빼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까.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 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옮겨 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 (15p)



 소설은 서양화를 배운 화가(그때는 화공이라 불렀던 것 같다)이자 화자가 그림을 그리고자 작은 시골 마을을 들어서며 시작한다. 화가는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낀 듯하다. 나중에는 "발길을 멈추면 싫증이 날 때까지 그 자리에 있게 된다. 그렇게 있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도쿄에서 그렇게 하면 금방 전차에 치여 죽는다. 전차가 죽이지 않으면 순사가 내쫓는다. 도회는 태평한 백성을 거지로 오인하고, 소매치기의 두목인 탐정에게 많은 월급을 주는 곳이다."(134p) 라며 도시를 평하는 걸 보니 작품 속 시종일관 비인정(非人情, 의리나 인정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일)한 시선으로 모든 풍경과 상황을 사유하는 그의 태도를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반면 일백여 년 전 삭막한 도회 생활을 견디지 못했던 그를 2014년 속 도쿄로 떨어뜨린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도 궁금해진다. 아마도 증발하지 않았을까?


 작품 속 화가는 소세키 자신일 것이라 짐작한다. 평생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그가 도회 생활을 어찌 생각했을지는 보지 않은 블루레이가 따로 없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소세키와 같은 신경쇠약을 앓고 있는 사람이 지금도 많다. 모두 힐링 힐링 거리며 팍팍한 세상살이를 한탄한다. 여기서는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도 힐링 관련 서적에는 눈길도 주지 않으며 시치미를 떼 왔으나 이미 백여 년 전에도 같은 고민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소세키는 불혹의 나이에 화가가 돼, 비인정의 풍류를 마음껏 즐기고 싶었나 보다.


 그림을 그리려던 화가는 어찌 된 일인지 그림 한 점 그려내지 못한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쪽에 가까울 정도로 그는 그림과는 영 무관한 일에 관심을 쏟는다. 그러면서도 비인정의 시선은 그대로 유지하는데 작은 돌부터 시작해 유채꽃과 종달새의 울음소리며 서양과 동양의 미학론을 따져보기도 하고 이혼하고 집으로 돌아온 여인과 곧 만주의 전장으로 떠날 청년에 이르기까지 한치도 쉴 틈이 없다. 애초에 그는 그림을 그릴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처음 산길을 오를 때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착상을 종이에 옮겨놓지 않아도 옥이나 금속이 스치는 소리는 가슴속에서 일어난다. 이젤을 향해 색을 칠하지 않아도 오색의 찬란함은 스스로 심안(心眼)에 비친다. 그저 자신이 사는 세상을 이렇게 깨달을 수 있고 혼탁한 속세를 마음의 카메라에 맑고 밝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된다. (16p)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불쑥 떠오르는 하이쿠 한 소절을 가슴속에 써보고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목련의 따뜻한 담황색을, 연못에 떨어지는 동백꽃의 붉은색을 심안에 비출 수 있었다. 애써 무엇인가 그리고자 했다면 모처럼 맞이한 우아한 경지에 이치를 내세우고 쓸데없이 탐색하여 그림을 망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애써 이해하고자 했다면 여인의 뜻밖의 행동 또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터이다. 보이는 것과 느끼는 것.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소세키식 힐링법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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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1-24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기보다
풀노래와 숲빛을
모두 가슴으로 받아들였구나 싶어요.

5DOKU 2014-01-24 15:36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