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로 보는 동남아시아사 - 방콕, 하노이부터 치앙라이, 덴파사르까지 13개 도시로 떠나는 역사기행 도시로 보는 시리즈
신윤환 외 지음 / 사우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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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는 현재 11개국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영역은 상당히 넓다. 도시국가인 상가포르와 브루나이를 제외하면 넓지 않은 나라가 없다. 그에 비하면 인구는 적은 편이다. 그래서 동남아시아는 도시가 중심이 되어 발달했다. 동남아시아 각국의 오랜 역사 동안 중요한 지역에서 거점이 되는 도시가 사실상 나라의 명운을 좌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는 오늘날까지 중요한 관광 명소가 되거나 교통의 요충지가 되어 다른 관광지로 연결해주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 동남아시아 도시들이 중요한 이유다. - P6


얼마 전 아시아사를 읽고 나자 동남아시아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터무니없이 부족함을 느꼈다. 동남아시아사로 굵직한 책을 갖고 있지만 그 책을 읽기 전 징검다리로 입문할 만한 책이 무엇이 있을까 고르다 선택한 것이 이 시리즈다. 마침 2권까지 나와 있었고 평도 나쁘지 않아 보여 도서관에 가서 빌려와 읽게 되었다. 


동남아시아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물과 친하지 않고 해산물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휴양지 느낌이 강해서 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히 먹고 노는 관광객으로서의 관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남아시아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근현대 시기를 거치며 많은 부침을 겪었기 때문에 도시가 그야말로 역사 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 동남아시아는 도시를 위주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관광객으로서 접근성도 좋으면서도 역사학도나 역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는 공부할 거리가 많은 곳인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그것을 느꼈기에 값진 시간이었다.


5명의 학자들이 7개의 나라에서 고른 13개의 도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학자마다 다른 국가와 전공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이야기의 스타일이 다른 것이 꽤나 재미있었다. 

태국 현대사를 전공자가 방콕, 치앙라이, 폰사완의 민주화와 민족 갈등, 전쟁 경험을 통해 태국과 라오스의 아픈 현대사를 들려준다. 특히 소수민족과 국경, 그 각각에 대해서, 또 둘 간의 관계에 대해서 포커싱을 맞추어 전달한다.

베트남의 정치, 경제를 전공한 정치학자는 하노이와 호찌민시의 거리와 건축물을 통해 역사를 설명하면서도 베트남의 유적지와 현재를 볼 수 있는 여행 장소를 빠짐없이 소개하는 것이 특징이다.

인도네시아 발리를 연구한 인류학자는 덴파샤르, 족자카르타, 수라바야를 소개하는데 지나치게 개발된 자카르타, 발리를 벗어나 현지인의 문화를 제대로 체험할 수 있는 곳들로서의 매력을 가져서다.

동남아시아 불교 미술을 전공한 미술 사학자는 믈라카, 페낭을 소개하며 일찍부터 외부의 눈에 띄어 식민지가 되었으나 아이러니하게 그 때문에 다양한 문화의 혼종성을 낳았다고 말한다.

동남아시아 화교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는 싱가포르, 양곤, 쿠칭을 소개하는데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말하는 것이 특징이다. 


나는 치앙라이, 폰 사완의 국경 전쟁에 따른 피해와 국경을 오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기억에 남았다. 또 베트남의 하노이와 호찌민을 비교하며 급속도로 개발되고 있는 현재를 주목하기도 했다. 고양이 천국인 쿠칭도 기억에 남는다.

사람이 붐비고 지나치게 개발되어 관광화되어버린 자카르타나 발리 대신 현지인들을 느길 수 있는 덴파샤르, 수라바야, 족자카르타는 언젠가 가보고 싶다는 소망도 생겼다.

믈라카, 페낭은 역사적 가치와 미관만으로 가고 싶은 욕망은 충분하다. 특히 페낭 신학교는 김대건 신부을 비롯한 조선의 신자들이 사제의 서품을 받은 곳이라 특별하게 느껴진다.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현재 페낭교구 박물관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입문하기에 적절한 책인 것 같다. 교양서이기도 하고 대중서이기도 하지만 책의 깊이가 얕지 않아서 좋았다.  


동남아시아 도시들의 탄생 시기는 다양하나 도시로 성장하고 발전한 것은 식민 지배와 국가 건설 과정에서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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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왕망 신이 들어서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평가

"고조가 일어나 三尺검을 가지고서 8년 만에 皇帝의 業을 이루었으니,
그 공을 거둠이 이와 같이 신속하였던 것은 어째서인가? 오직 사람을 알아 잘맡기고 부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국가를 진정시키고 백성을 어루만짐은 蕭何만 못하고, 계책을 운용하여 成敗를 결단함은 子房(張良)만 못하고,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함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人傑인데 내가 이들을 등용하였으니, 이 때문에 천하를 취한 것이다.‘ 하였으며, 韓信 또한 이르기를 가는 군사를 거느리는 것은 잘하지 못하나 장수를 거느리는 것은 잘한다.‘ 하였으니, 이 말이 다하였다.
呂氏의 亂에 漢氏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것이 실낱같았다. 그러나 끝내 - P176

禍가 되지 못했던 것은 밖으로 宗藩(宗室諸侯)의 강함이 있고 안으로 絳侯(周勃)와 灌嬰의 충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文帝와 景帝 때에는 天下가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해서 거의 형벌을 버리고 쓰지 않음에 이르렀으니, 후세가 모두 칭찬하고 사모할 줄 알아 이에 미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백성들의 마음이 어찌 일찍이 안락하고 부유하고 장수하기를 바라지 않았겠는가. 文帝와 景帝는 백성들의 이 바람을 소요시키지 않았을 뿐이다.
孝武帝는 지나친 사치를 좋아하고 神仙術을 사모하여 宮室을 꾸밈이 한도가 없고 순행과 유람을 그치지 않았으며, 사방의 오랑캐를 계속 정벌하고 형벌을 엄하게 하고 부역을 무겁게 하였으니, 행한 일을 살펴보면 秦始皇에 비하여 어찌 차이가 멀겠는가. 다만 儒學을 높이고 도를 소중히 여기며 현자를 구하고 간언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成敗가 이와 같이 달랐던 것이다.
孝昭帝는 어린 나이로의 충성을 분별해서 확고하여 동요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그리도 天자가 총명하였는가. 그러나 곽광이 오히려 정권을 독점하고 돌려주지 않았으니, 이는 잘못이다. 孝宣帝는 名과 實을 자세히 살피고 상과 벌을 분명히 내려서, 관리들은 직책을 잘 수행하고 백성들은 생업을 편안히 여겼으니, 효무제에 비하면 功烈이 더 낫다. 孝元帝는 우유부단하여 나라의 업이 처음으로 쇠하였고, 이성제는 酒色에 빠지고 정권을 외가에 맡겼으며, 효애제는 성질이 모질고 괴팍하고 총명하지 못해서 총애하는소인들이 조정에 가득하였는데, 침체하여 孝平帝에 이르러서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이 이 틈을 타고 마침내 漢나라의 國統을 차지하였다. 莽은 속임수와 간사함을 믿고 백성들을 번거롭게 동원하고 병난을 일으켜서 죄가 가득하고 원망이 쌓여 천하가 배반하였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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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아무런 경계 없이 태어나는 유아는 생후 초기부터 자신의 일부라고 여긴 것들을 몰아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과 타자의 경계를 만들어나간다. 이 과정에서 나의 밖으로 거부되고 배제되는 대상을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
ab-jet
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것이 똥, 상한 음식, 오물들이다. 다시 말하면, 라캉의 거울 단계 이전부터 유아는 자기 몸의 내부에 있어야 할 것들과 밖으로 추방해야 할 것들을 구별하기 시작한다. 어머니의 몸은 유아가 스스로 분리해야 할 최초의 대상이다.

라캉에 따르면, 생후 6~18개월 사이의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고 최초로 자신을 발견한다. 이때 아이는 자신의 몸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자신의 몸과 어머니의 몸이 붙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아이가 발견하는 것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이다.

생후 몇 개월간 유아가 겪는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죄책감과 관련해서 멜라니 클라인은 이론적 가설을 세웠다. 이때 유아는 자신의 일차적 대상인 어머니,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젖가슴을 겨냥한 파괴적 충동
impulse
과 이어서 파괴적 환상에 대한 죄책감을 경험한다.
15)
이것을 멜라니 클라인은 생후 3~4개월 경 시작되는 ‘편집-분열적 위치’
paranoid-schizoid position
와 생후 6개월 경 시작되는 ‘우울증적 위치’
depressive position
라고 이름 붙였다.
16)
이때 어머니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우울함이 이후 다시 오이디푸스적 욕망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아담이 에덴에서 추방되는 사건은 아브젝시옹의 경험과 연관성을 갖는다. 아담보다 먼저 하와는 그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는 뱀의 꾐에 넘어간다. 하와는 그 열매를 먹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뱀이라는 존재는 신이 정해놓은 인간과 신 사이의 질서(경계)를 넘어서게 했다. 결과적으로 이 경계는 결국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경계가 되고 만다. 태초에 에덴에서 인간과 하나님은 분리되어 있지 않았는데, 최초 인간들은 그 경계선 밖으로 추방되고 말았다.

프로이트는 불안에는 ‘대상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라캉은 ‘불안에는 대상이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라캉은 불안을 일으키는 대상이 있지만, 그 대상이 무엇인지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라고 한다. 즉, 모른다거나 보지 못했다고 해서, 없다고 말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불안은 대상과 분리되어 대상이 부재하게 됨으로써 생기는 것인데, 그 대체물이 되는 대상들은 근원적 대상과의 분리와 부재로부터 기인하는 불안을 일시적으로나마 잠재울 수 있다. 그러므로 불안은 욕망의 대상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욕망의 소급적 원인으로서 근원적 대상 a와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팔루스는 오이디푸스기에 아이가 어머니를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법을 상징한다. 라캉이 말하듯이 팔루스는 상실한 대상 a의 자리를 대체하는 욕망의 대체물이다.
29)
그런데 주체는 최초 대상의 상실을 만회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대상 a를 욕망하지만, 어디에서도 그 욕망의 간극을 채울 수 없다. 라캉이 말하는 불안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라캉의 설명에 의하면, 욕망은 만족을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완전한 만족 즉, 주이상스
jouissance
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주이상스는 대상과의 근원적 합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근원적 대상인 그 무엇은 영원히 알 수 없는 어떤 것이고 이것은 의식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섬광의 순간처럼 지나갈 뿐이다. 특히 예술적 형식 속에서 승화라는 형식으로 이러한 전(前)-대상과의 분리의 기억을 되살린다.

크리스테바의 입장은 주이상스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라캉의 입장과는 거리가 있다. 크리스테바는 근원적 대상을 전(前)-대상 혹은 불어 ‘그 어떤 것’을 뜻하는 쇼즈
Chose
라고 표기하는데 이것은 프로이트가 쓴 "다스 딩"
das Ding
즉, ‘그것’ ‘그 무엇’ ‘근원적 대상’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쇼즈’는 포착 불가능한 것이지만 크리스테바는 ‘쇼즈’의 장소
lieu
에 접근 가능한 방법으로 승화
sublimation
를 들고 있다.

정신분석학은 감정(feeling), 정서(emotions), 정동(affects) 사이에 있는 다양한 차이들을 구별한다. 감정은 중추신경에서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의식에서 차단될 수도 있다. 정서는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는 감정을 말하며, 정동은 이것과 관련된 모든 현상을 말하는데, 그중에 어떤 것은 무의식적이다. 그런가 하면, 기분(mood)은 비교적 안정적이고 오래 지속되는 정동 상태로서, 지속적인 무의식적 환상에 의해 일깨워지고 지속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정서와 정동, 기분은 어느 정도 겹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참고, 『정신분석 용어사전』,

당혹감과 혐오감을 자아내는 아브젝시옹 자체에는 이성적인 판단과 정동이 항상 뒤섞여 있다. 다시 말하면 아브젝시옹은 드러난 기호와 무의식적 충동이 혼합되어 있다.

희열이 찰라의 순간에 상실한 대상과의 합일의 경험을 상기시키는 것이라면, 정동은 그 뒤에 남아서 최초 대상 상실의 고통을 반복적인 기분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출생 때 탯줄을 자르는 것처럼 인간은 비천시된 것(ab-ject)을 잘라내고 몰아내지만, 이 아브젝시옹의 이질감은 면면히 흐르고 있다가 어떤 계기에 돌출한다. 그런데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상징계의 의미화 구조 속에서, 이러한 정동은 기호화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인간이 이 타자의 의미망 속에 갇혀 있다고 해도, 상징계의 의미 작용이 인간의 육체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기억을 모두 기호화하기 어렵다.

프로이트는 「억압에 관하여」
43)
라는 논문에서 억압의 두 단계를 말한다. 1차적 억압인 ‘원초적 억압’과 2차적 의미의 ‘본래적 억압’이 그것이다. 2차적 억압인 ‘본래적인 의미의 억압’은 억압된 표상의 정신적 파생물이거나 혹은 다른 곳에서 생겨나 그 억압된 표상과 연결된 관념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억압은 의식의 거부 행위와 억압된 표상이 다른 것들에 가하는 힘이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만약 이 두 힘이 작용하지 않거나, 의식에 의해 거부된 것(2차 억압)에 작용하고 있는 이미 억압된(1차 억압) 그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억압 과정은 억압이라는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원초적 억압은 감춰진 채, 무의식이 억압하는 것을 표상하는 것에서 파생된 것들을 의식은 억압하게 된다.

육체적인 증상 속에서 종양 같은 아브젝트는 나를 침입하고, 나는 아브젝트가 되어 배제된다. 다시 말하면, 암 덩어리는 나를 질겁하게 하게 대상이지만 내 속에서 자라면서 나 또한 암 환자라는 아브젝트가 되어 일상적 삶에서 배제된다. 그러나 승화 과정을 통해서 내가 아브젝트를 보유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암 덩어리와 친구가 되어 함께 살아간다. 이로써 종양은 더 이상 나를 기겁하게 하는 아브젝트가 아니라 오히려 더 나은 삶을 향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죽음과 삶, 비천함과 숭고함이 아브젝트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 곧, 비천함의 경계인 아브젝트는 또한 숭고함의 경계를 이룬다. 나환자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내고 마신 성인들의 이야기는 이에 대한 전형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의 주장에 따르지만 프로이트와 달리 고고학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즉, 1차적(원초적) 억압은 최초 주체와 대상으로 나누어지는 근원적 분리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문화적으로 경험하는 아브젝시옹은 고고학적인 원초적 억압을 원형으로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아브젝시옹은 나와 타자를 분리하는 경계선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브젝트를 분리하는 공간 즉, 아브젝시옹이 일어나는 공간은 이미 아브젝트인 ‘타자’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왜냐하면 나를 지키기 위해 아브젝시옹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브젝시옹이 일어나는 것은 이미 2차적 억압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2차적(본래적) 억압은 원초적 억압 즉, 최초 억압된 본능의 표상에서 파생된 후천적인 것이다.

아브젝트가 나를 혐오감과 거부감으로 휩싸고 몰아내듯이, 숭고함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은 나를 격정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는다. 숭고함은 내가 존재하기 위해 스스로 망각했던 근원적 대상에 대한 원초적 기억을 되살린다. 말하자면, 숭고함을 통해 바닥없는 기억 속에 묻혀버린 전(前)대상과의 합일의 순간을 경험한다. 그것은 밝은 의식 너머의 경험이다. 크리스테바는 이 숭고함을 일탈이자 구획 짓기 불가능한 완전한 결핍이자 즐거움 즉, 매혹이라고 표현한다.

프로이트에게 나르시시즘은 대상으로부터 물러나서 자아에 (리비도) 투여가 발생한다는 관점에서 정의되었지만, 이드, 자아, 초자아라는 위상학적 관점
55)
이 도입된 이후로 이것은 "이차적 나르시시즘"이 되었다. 한편, "일차적(원초적) 나르시시즘"이란 용어는 타인과의 관계가 완전히 부재하며 자아와 이드 간의 어떤 분화도 없다는 특징을 갖는 대상 부재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자궁 내의 삶은 대상 없는 이 나르시시즘적 상태와 가장 가깝다.
56)
프로이트는 억압을 원초적(1차적) 억압과 본래적(2차적) 억압으로 나눈 것처럼, 나르시시즘도 1차적 나르시시즘과 2차적 나르시시즘으로 나눈다.

아브젝시옹은 대상이 아니라 자아에게 리비도가 쏠리는 (2차적) 나르시시즘을 선행하는 전(前)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아브젝시옹과 원초적 나르시시즘은 공존하면서도 아브젝시옹은 나르시시즘을 균열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하면 ‘나’를 발견하는 것은 원초적 나르시시즘에 균열을 일으키는 아브젝시옹을 통해서이다.
57)
이때 원초적 나르시시즘과 아브젝시옹이 일어나는 공간을 크리스테바는 ‘코라’
Chora
58)
라고 명명한다.

코라로부터 시작된 충동의 운동이 타자와 결합하면서 의미가 만들어진다면, ‘나’를 의미화하고 기호화하기 시작하면서 코라에 대한 억압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코라’에서 자아는 나르키소스적이고 대상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가, 삶 충동과 죽음 충동의 반복 운동을 통해 원심력을 가지고 타자를 향해 나아가려고 할 때 분리를 위한 아브젝시옹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즉, 아브젝시옹은 충동으로 가득 찬 코라에서 기호 체계로 나가는 통로이다. 이 과정에서 2차적 억압은 기호 체계와 연관되고, 1차적 억압은 나르시시즘의 위기와 연관된다.

클라인은 개인의 충동이 초자아의 기원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서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클라인은 오이디푸스 갈등의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전(前)오이디푸스기를 초자아 형성의 첫 단계로 본다. 그러니까 후기 구강기의 가학적 국면에서 초자아가 자아로부터 분화된다.

반면에, 프로이트는 구강기에서 대상을 향한 에너지 집중
cathexis
과 대상과의 동일시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구강기에는 대상을 향한 공격 본능이 분화되지 않고 따라서 초자아도 나타나지 않는다. 구강기 이후 남근기에 초자아가 등장해서 오이디푸스 갈등을 해결한다고 보았다.

아브젝시옹은 경계의 문제인데, 경계 자체가 허물어지면 그것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아브젝트에 대한 강력한 금지를 명령하는 초자아는 자신과 주변을 지키고자 하는 자아의 방어 본능을 숨기고 있다. 방어적인 자아와 파괴적인 초자아의 투쟁에서 초자아는 자아에 의해 아브젝트의 가면을 쓰고 추방되는 것이다. 정신분석이 밝히는 바에 의하면, 이 파괴적인 초자아는 그 공격성을 바깥 대상에 투사하고 안으로는 자아까지 위태롭게 만든다. 불안에 싸인 자아는 투사된 대상을 자기 바깥으로 내쫓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분화시킨 초자아까지 축출한다. 자아는 안심할 겨를 없이 불안에 싸여 초자아를 또다시 분화시키고 축출하는 운동을 반복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초자아는 자아의 다른 얼굴이다. 이것을 문화적으로 확장해서 말하면, 공포와 혐오를 자아내는 아브젝트는 우리 자신의 또 다른 얼굴이 될 수 있다.

아브젝트가 된 대상의 거부와 함께 자아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만들어지고 의미화의 기반이 마련된다. 초기 자아가 겪는 이 투쟁은 분명히 최초 대상 즉, 모체와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언급되었듯이 이 원초적 대상은 이후 계속적으로 다른 대상으로 대체되어 아브젝트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아브젝시옹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면서 의미화의 시초이고, 이것이 문화 속에서 계속 발견되는 많은 아브젝트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다.

대상 관계(object relations)와 대상과의 관계(object relationship)라는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는 대상에 대한 개인의 태도와 행동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정신적 이미지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실제 사람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을 구분하기 위하여, 대상과의 관계는 주체와 실제 다른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 즉, 대인관계를 일컫는 말로, 대상 관계는 마음속의 대상 표상과 관련된 심리적 현상을 일컫는 말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대상 관계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보고되는 경험이나 관찰된 행동에 의거하여 추론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둘 모두는 개인 발달사의 산물인 무의식적 환상의 영향을 받는다(『정신분석 용어사전』,

초자아에 의해 아브젝트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자아는 초자아의 의도와 계획과는 다른 자아의 모습으로 서게 된다. 즉, 초기 자아에서 분화된 잔인한 초자아는 자아를 죽음 충동으로 몰고 가지만 아브젝시옹은 거기서 새로운 의미로 향한 길을 낸다. 비록 그것이 욕지기가 솟는 것으로 의식에 다가올지라도, 그 이면에는 삶과 죽음 충동의 격렬한 투쟁에서 살아남은 새로운 의미가 배태되는 것이다.

아브젝트가 도착적이라고 보는 이유는 그것이 금지나 규칙·법을 무시하거나 파기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왜곡시키고 곡해하고 부패시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브젝트는 금지나 규칙을 더 잘 어기기 위해서 그것을 이용한다고 할 수 있다.

타락과 구원,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는 아브젝시옹의 카타르시스 효과는 예술과 종교의 영역을 아우른다. 아브젝시옹이 가진 정화 작용의 다양한 카타르시스는 종교의 역사를 이루고, 탁월한 예술로서의 카타르시스로 연결된다. 곧, 카타르시스적 관점에서 예술적 경험은 분명 아브젝트를 말하고, 그것을 통해 정화되며, 종교의 중요한 부분도 아브젝트 속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85)
하지만 종교의 힘이 약화되기 시작한 근대 이후, 아브젝시옹은 주로 문화의 영역에서 특히, 예술 분야에서 이루어져 왔다. 문학 작품들은 주체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 기원에 있는 원초적 억압을 노출시킨다. 문학을 통해 아브젝시옹은 사회의 동일성의 가장자리에서 성스러움의 기능을 대신한다. 그것은 문학을 통한 승화 즉, 카타르시스이다.

실상 우리가 배척하고 가까이 하기를 혐오시하는 것들은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의 다른 얼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브젝트는 함축한다. 내심을 가린 겉치레 인사, 비아냥거리는 욕설과 뒷담화, 뇌물 받는 공무원 등은 우리 주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아브젝시옹의 사례들이다. 관습과 제도는 이질성의 벌어진 틈 같은 것을 감추고 봉합하는 데 익숙하지만, 정신분석은 이 틈을 우리 앞에 상시 열어놓는다. 이 벌려진 상처 같은 틈은 현대 사회가 만든 경계들에 익숙한 우리 정신이 감내해야 하는 이질감이다.

도덕적 인간을 동물(자연)적 인간과 구별해 본체계(예지계)에 집어넣은 칸트와 달리, 헤겔은 부정이 의식 밖에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헤겔은 그 부정 자체가 역사적·사회적인 행위 속에서 제거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칸트나 헤겔 모두 더러움은 제거되어야 할 무엇으로 규정했다.

플라톤에게 카타르시스는 지혜로부터 파생되고 정신에 직관적인 것이다.
이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정화 작용은 언어를 통해 운율과 노래로 나타난다. 운율과 노래는 지성에는 이질적인 정열적이고 육체적이며 성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부정함
l’impur
을 드러낸다.

아브젝시옹을 말하는 언어는 운율과 리듬에 가까운 소리를 형상화할 수 있는 시적 언어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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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또 눈이 내렸다는 것을 국가에서 보내는 알림 메시지를 받고 알았다. 조금 있으니 아파트에서 눈 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요즘 아파트에서는 주차장과 차가 지나다녀야 하는 도로는 눈이 쌓이자마자 치우는 것 같다. 


어제 오후에는 집 밖을 나가 동네 한 바퀴를 산책하고 왔다. 미세먼지 지수는 좀 나았던 것 같은데... 하늘이 어쨌든 파랐으니까. 



하늘이 어떤지 잘 모르고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보니 이렇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빌려놓은 <도시로 보는 동남아시아사>를 반납해야 해서 읽었다. 알려진 도시도 있지만 숨은 도시들을 소개해주어 유용했다. 역사 교양서이지만 여행기로도 읽을 수 있다. 언젠가 동남아 쪽으로 여행을 가게 된다면 도움이 되겠지.



이번 달 정희진의 오디오 매거진에서 <애국의 계보학>이 다뤄진다. 장바구니에 진작 들어가있었는데 당장 읽지 못할 것 같아 구입하지 않았는데 결국 샀다. 그리고 <페미니즘의 도전>과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도 함께. 진작 읽어야 하는 책인데 계속 미루고 또 미루고... 빚처럼 있었는데 이제 샀으니 읽어야겠다.

 

그리고 프레이야님의 신간을 샀다. 표지부터 너무 감각적이야ㅠㅠ


마지막 책은 근력 운동 좀 해보려고 샀다. 내 몸에 근육이라는 것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되는데 진짜 이제 만들어야할 때가 온 것 같다. 작심삼일이 되지 않도록 꾸준히 조금씩 해보는 것으로!






정희진의 공부 매거진 에피소드를 몇 개 들었다. 한 문장의 세계에서 나혜석을 다루어 반가웠다. 염상섭의 <해바라기>라는 작품을 언급하던데 읽어보지 않은 작품이라 한번 읽어봐야겠다.  

당시 여성은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에서 비켜나 있었다. 나혜석의 전문성은 언급되지 않고 사생활에만 집중하는 세태에 대해서도 곱씹어봐야 한다. 신여성은 있는데 신남성은 왜 없는가에 대해서도...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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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1-07 08: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근력운동 하려고 책을.. 그것도 <근력운동의 과학>이라는 책을 사다니 왠지 화가님 다워서 빵 터집니다ㅋㅋㅋㅋㅋ

거리의화가 2024-01-07 20:4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제가 생각해도 웃음이 나긴 하네요^^; 근데 저는 동영상으로 운동 여러 번 시도해봤는데 잘 안되더라구요. 차라리 책으로 도전하는 것이! 근데 읽든 보든 결국 실천이 문제일텐데 과연 될지는...ㅎㅎㅎ

은오 2024-01-09 04:07   좋아요 1 | URL
아 진짜욬ㅋㅋㅋ 같은 포인트에서 저도 아 역시 화가님 하면서 ㅋㅋㅋㅋㅋㅋㅋㅋ 😆
그리고 화가님은..... 진짜 근력운동까지 마스터하실 것 같아서 소름.

거리의화가 2024-01-09 09:27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근력 운동 해야 한다 생각한 것은 몇 년째인 것 같은데 여전히 실천을 못했어요. 올해는 서재에도 말을 내뱉었으니 꼭 실천해보려고요.

청아 2024-01-07 10: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책을 반납해야 해서 읽으셨다는 대목이 멋지네요!! ^^
저는 요즘 대출 갱신하러 도서관 출퇴근하고 있습니다. 누가 보면 직원 인줄?ㅋㅋㅋㅋ
덕택에 운동은 매일 하네요ㅋㅋㅋ


거리의화가 2024-01-07 20:47   좋아요 1 | URL
저도 도서관 1~2주에 한 번은 가는 것 같은데 가능하면 반납일은 잘 지키는 편인 것 같아요. 도저히 안 된다 싶어서 몇 번 연장한 적은 있지만!ㅎㅎ 걷는 것이 가장 기본이죠. 저도 오늘 미친듯한 바람을 뚫고 걷고 왔어요^^

얄라알라 2024-01-07 21:21   좋아요 1 | URL
우와! 누가보면 ˝*** 직원일줄˝...여기서 ***에 ˝도서관˝을 과감히 널 수 있는 성인 인구가 대한민국에 얼마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정말!!! 멋지세요.

춥다는 핑계로 요새 도서관 출입에 게으른 저는 아예 대출갱신 꺼리를 차단중인데 ㅎ

페크pek0501 2024-01-07 12: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의 도전, 은 엄청 배울 게 많은 책이에요. 감탄하며 읽었던 기억이...
새해에 책 부자로 행복하시겠어요. 이 페이퍼를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4-01-07 20:48   좋아요 0 | URL
이제야 그 책을 읽다니 많이 늦었죠. 욕심내지 않고 천천히 읽어보려고 합니다. 보는 재미도 있었다니 감사하네요^^

yamoo 2024-01-07 19: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근력운동의과학 보고 웃음이.ㅋㅋㅋ 정휘진 책들과 왠지 안 어울라눈..^^;;

거리의화가 2024-01-07 20:51   좋아요 1 | URL
ㅋㅋㅋ 책탑을 놓고 보니 유독 그 책이 튀는 것 같긴 합니다. 지금 생각하니 저 책을 읽고 실천을 할까가 문제네요.

얄라알라 2024-01-07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 알람 국가 문자가 왔었어요?
작년 말 지진 문자에 놀랐던 기억이 새삼

프레이야님의 신간 표지, 화가님께서 담아내신 하늘의 푸름과 닮았네요.

근력 운동 격하게 응원드립니다.(근육 진짜 안 생기는 일인으로서!! 함께 응원이요!)

거리의화가 2024-01-08 09:22   좋아요 1 | URL
아. 재난 문자요^^ 이번에 눈 내릴 때 연속으로 2~3번 오더라고요ㅋㅋ

네. 워낙 저런 쨍한 파란 하늘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하늘 사진을 가장 많이 찍어요ㅎㅎ

근력 운동 시작하는 것은 할 수 있는데 항상 유지 및 습관화시키는 게 문제입니다ㅠㅠ 알라님도 응원할게요^^

희선 2024-01-08 0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저께 날씨 좋았군요 제가 사는 곳은 흐렸던 것 같기도 한데... 요새는 늘 흐린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어제 잠깐 맑았을지도 모르는데... 겨울이 가야 좀 맑은 느낌이 들지... 쨍한 하늘이네요 파란 하늘 봐서 기분 좋으셨겠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1-08 09:24   좋아요 1 | URL
네. 요사이는 계속 날이 흐렸었어요. 주말 낮에는 하늘이 쨍해서 좋았습니다^^ 이번 겨울은 유독 비나 눈이 많이 오는 것 같네요. 희선님 기분 좋은 한주 되시길 바랍니다.

다락방 2024-01-08 09: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의 근력운동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화이팅!!

거리의화가 2024-01-08 16:31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요가 이야기 올리실 때마다 아... 나도 진짜 운동해야해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근력이 없으니 여기저기 몸이 아프다는 소리가 들려서 진짜 시작해보려고요. 말만 하지 말고 올해는 제발!ㅎㅎ 응원 감사합니다^^

라로 2024-01-08 1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프야님의 책을 전자책으로 샀기 때문에 손에 느끼는 감각이 없어서 아쉬워요. 그리고 근력운동! 저도 지극히 필요한데…. 쿨럭
암튼 늘 열심히 어려운 책이 읽으시는 거리의화가님을 응원하고 근력운동 잘 되시길, 잘 되시면 요령도 좀 알려주시길요.^^;

거리의화가 2024-01-08 16:31   좋아요 0 | URL
그쵸^^ 라로 님. 전자책이 바로 읽을 수 있고 이동중에라도 읽을 수 있어 편리는 하지만 두고 두고 읽을 책은 종이책의 물성이 있어야 확실히 좋은 것 같습니다.
근력운동 꼭 이어나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라로 님의 열정적인 생활도 늘 응원합니다!

자목련 2024-01-08 14: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포스팅 시각을 보고 놀랐어요, 그것도 주말에!
담아주신 하늘, 넘 예뻐요!
<애국의 계보>가 궁금하네요^^

거리의화가 2024-01-08 16:34   좋아요 0 | URL
몇 주동안 주말에 알람을 꺼놨었어요. 그러다 새해도 되었고 다시 알람을 주중과 같이 맞춰놓은 효과입니다!ㅎㅎ 주말에 더 잔다고 해서 딱히 더 몸에 좋은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기존대로 가려고 합니다ㅋㅋ
파란 하늘을 애정해요. 사진으로 보면 기분도 좋습니다^^ <애국의 계보>는 얇기는 한데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조만간 읽어보려고요^^
 

"우리 한(漢)은 당(唐)이 혼란한 틈을 이어받아서 여기에서 50년 거주하였는데, 다행스럽게도 중원에 있는 나라에 많은 연고가 있어서 간과(干戈, 전쟁)가 미치지 아니하였으니 우리 역시 아무 일 없는 가운데 교만하였습니다. 지금의 병사들은 기고(旗鼓, 전쟁)를 알지 못하고 인주는 살아남을는지 망할는지를 모르니, 청컨대 군사적 대비태세를 정비하고 또한 송(宋)과 왕래하며 우호관계를 맺으십시오."

유창(劉?, 942~980)은 채용할 수 없었다. 이에 이르러 처음으로 두려워하여서 소정현을 초토사로 삼았다.

병문(幷門, ?州, 山西省 太原市, 北漢)과 우호적으로 왕래하는 것만 못하니 군사를 발동하여 남쪽으로 내려오게 하면 우리는 황화(黃花)·자오곡(子午谷)에서 군사를 내어 이에 호응할 것인데, 중원은 앞뒤로 적을 만나게 되는 것이니 관우(關右, 함곡관 서쪽)의 땅은 위무만하여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왕소원이 그 말을 그렇다고 생각하여 촉의 주군에게 권고하여 손우(孫遇)·조언도(趙彦韜)·양견(楊?) 등을 파견하여 납환(蠟丸)14의 백서(帛書)로 샛길로 가서 북한(北漢)의 주군15에게 주고 이미 포(褒, 陝西省 勉縣 西老城)·한(漢, 四川省 廣漢市)이 군사를 늘렸다고 말하면서 북한(北漢)과 약속하여 황하를 건너 같이 거사하기로 하였다. 손우 등이 도하(都下)에 이르렀는데, 조언도가 그 편지를 숨어들어 가져다가 바쳤다. 조언도는 흥주(興州, 陝西省 略陽縣) 사람이다.

황제가 행영(行營)에 유시하였다.

"이르는 곳에서는 여사(廬舍)를 불태우거나 이민(吏民)을 내몰아 노략하거나 분묘를 파헤치거나 상자(桑?, 뽕나무)를 잘라 채벌해서는 안 되는데, 어기는 자는 군법을 좇아서 일을 처리할 것이다."

제장들이 지나는 곳에서는 모두가 도륙하려고 하였지만 오직 조빈(曹彬, 931~999)만은 이를 금지하여 마침내 그치었으니, 그러므로 협로(陜路)의 군사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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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 조금도 범하는 것이 없었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였다.
"내가 그 적당한 사람을 얻어서 맡겼구나!"
조빈에게 조서를 내려서 그를 포상하였다.

왕전빈과 최언진(崔彦進, 922~988)·왕인섬(王仁贍, 917~982) 등이 밤낮으로 연회를 열고 술을 마시고는 군무(軍務)를 돌보지 않으면서 부하들을 풀어 놓아 자녀와 재화(財貨)를 약탈하니 촉 사람들이 이를 고생스러워 했다. 조빈(曹彬, 931~999)이 누차 군사를 돌릴 것을 청하였으나 왕전빈 등은 듣지 않았다.

오대(五代)의 방진은 더욱 강하여 부곡을 인솔하여 장원(場院, 곡식을 털거나 말리는 평탄한 장소)을 주관하게 하면서 두텁게 거두어 스스로를 이롭게 하였다.
그 가운데 삼사(三司)에 속한 것에는 높은 관리를 보임하여 그곳에 가게 하여 정해진 액수 외의 것들을 보내어 번번이 자기에게 들여보내고 혹은 사사롭게 뇌물을 받아서 이름하여 공봉(貢奉)이라고 하면서 은상(恩賞)을 내려주기를 바랐다.
황제가 처음에 즉위하여서는 오히려 앞의 제도를 따랐기에, 주목(州牧)이나 태수(太守)가 내조(來朝)하게 되면 모두가 공봉이 있었다. 조보가 재상이 되기에 이르자 그 폐단을 개혁하여 없애기를 권하고 여러 주에 명령을 내려서 탁지경비 외에 무릇 금백(金帛)으로 군사들의 실비를 돕게 하고 모두 도하(都下)로 보내어 점유하여 보류할 수가 없었다.

가을 7월에 황제는 서천(西川)의 행영에 어떤 대교(大校, 장교)가 백성의 처의 유방을 잘라내어 그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궁궐로 오게 하여 큰 저자에서 그 목을 베었다. 가까운 신하들이 구하려고 하는 것이 자못 절박하였으나 황제는 이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군사를 일으켜서 조문하면서 치는 것인데 부인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잔인하기가 여기에 이르렀는가? 마땅히 속히 법대로 조치하여 그 억울함을 보상하여야 한다."

12월 초하루 정유일에 처음으로 며느리는 시부모를 위하여 3년 자최(齊衰)·참최(斬衰)하도록 하여 하나같이 그 지아비를 좇게 하였다.

개봉윤인 조광의가 금중에서 모시고 연회를 열었는데, 조용히 폐하의 복장이 지나치게 초솔(草率)하다고 말하니, 황제가 정색을 하며 말하였다.
"너는 협마영(夾馬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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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살던 때를 기억하지 않느냐?"

애초에 황제는 지금 사용하는 기원(紀元)으로 고치면서 재상에게 명령하여 전 시대에 없었던 연호를 서로 가리어 올리도록 하였다. 이미 촉을 평정하고 났는데, 촉의 궁인들로 액정에 들어 온 자가 있어서 황제는 그 염구(?具, 화장도구)를 보다가 옛날 거울을 얻었는데 그 뒷면에 ‘건덕(乾德) 4년에 주조함’이라는 글자가 있어서 황제는 크게 놀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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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내어 재상들에게 보이니 모두가 대답할 수 없었다.
마침내 학사인 도곡(陶穀, 903~970)·두의(竇儀, 914~966) 등을 불러 이것을 물으니 두의가 말하였다.
"이 물건은 반드시 촉(蜀)의 물건일 것입니다. 옛날에 위(僞) 촉왕인 왕연(王衍, 前蜀 後主, 901~926)이 이 연호를 사용하였으니 마땅히 이는 그 시절에 주조한 것일 것입니다."

"밑에 있는 어리석은 백성들은 비록 숙맥(菽麥, 콩과 보리)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만약에 번후(藩侯)들이 어루만져 길러주지 아니하고 힘껏 가혹하고 심각하게 시행하였다면 짐은 끊어서 그것을 용납하지 아니하였다."
조보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폐하께서 백성을 아끼심이 이와 같으니 바로 요(堯)·순(舜)의 마음 씀입니다."

윤달(윤8월)에 잃어버린 책을 구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무릇 관리와 백성들 가운데 서적을 가지고 와서 헌납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관(史館)으로 하여금 그 편목(篇目)을 살펴서 사관 안에 없는 것이면 이를 거두어들이고 책을 헌상한 사람은 학사원으로 보내어 관리의 이치를 시험 쳐서 묻게 하고 직관(職官)으로 벼슬하는 일을 감당(堪當)할 사람을 보고하라."
이 해에 《삼례(三禮)》의 섭필(涉弼)·《삼전(三傳)》의 팽간(彭幹)·학구(學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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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주재(朱載)는 모두 조서에 호응하여 책을 헌상하니 서부(書府)에 나누어 두라고 명령하고 섭필 등에게 과명(科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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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사하였다.

"백성들 가운데 뽕나무와 대추나무를 심어서 가꿀 수 있고, 황무지인 밭을 개간할 수 있는 사람은 조세를 징수하지 않고 보좌하여 오도록 권고할 수 있는 사람은 상을 받는다."

조보는 평소에 두의가 강직한 것을 꺼려서 설거정(薛居正, 912~981)·여여경(呂餘慶, 927~976)을 끌어들여 참지정사로 하였고 도곡(陶穀, 903~970)·조봉(趙逢, ? ~975)·고석(高錫, 936~985) 등은 또 서로 무리를 지어 붙어서 함께 두의를 배척하여 황제의 뜻을 중간에서 끊었다. 이에 이르러 죽자 황제는 가엽게 생각하여 말하였다.
"하늘이 어찌하여 나의 두의를 빨리 데려간다는 말인가!"
우복야를 증직하였다.

요주는 비록 야율이뢰합의 말을 다 좇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를 아끼는 것이 특별히 심하였다. 일찍이 가을 사냥을 따라나섰는데, 사슴소리를 잘 내는 사람이 한 마리의 수사슴을 불러 왔다. 요(遼)의 법에는 수사슴으로 뿔이 양쪽에 난 것은 오직 천자만이 쏠 수 있었는데, 요주가 야율이뢰합에게 그것을 쏘라고 명령하니 활시위 소리와 함께 쓰러지자 요주는 크게 기뻐하며 하사하여 준 것이 두터웠다. 이에 이르러 연회를 열었는데 아주 기뻐하며 다시 금으로 된 사발과 가는 실로 짠 비단, 그리고 새끼 밴 말 100필을 하사하였으며 좌우에 있던 사람으로 관직을 받은 사람이 아주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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