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왕망 신이 들어서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평가

"고조가 일어나 三尺검을 가지고서 8년 만에 皇帝의 業을 이루었으니, 그 공을 거둠이 이와 같이 신속하였던 것은 어째서인가? 오직 사람을 알아 잘맡기고 부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국가를 진정시키고 백성을 어루만짐은 蕭何만 못하고, 계책을 운용하여 成敗를 결단함은 子房(張良)만 못하고,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함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人傑인데 내가 이들을 등용하였으니, 이 때문에 천하를 취한 것이다.‘ 하였으며, 韓信 또한 이르기를 가는 군사를 거느리는 것은 잘하지 못하나 장수를 거느리는 것은 잘한다.‘ 하였으니, 이 말이 다하였다. 呂氏의 亂에 漢氏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것이 실낱같았다. 그러나 끝내 - P176
禍가 되지 못했던 것은 밖으로 宗藩(宗室諸侯)의 강함이 있고 안으로 絳侯(周勃)와 灌嬰의 충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文帝와 景帝 때에는 天下가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해서 거의 형벌을 버리고 쓰지 않음에 이르렀으니, 후세가 모두 칭찬하고 사모할 줄 알아 이에 미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백성들의 마음이 어찌 일찍이 안락하고 부유하고 장수하기를 바라지 않았겠는가. 文帝와 景帝는 백성들의 이 바람을 소요시키지 않았을 뿐이다. 孝武帝는 지나친 사치를 좋아하고 神仙術을 사모하여 宮室을 꾸밈이 한도가 없고 순행과 유람을 그치지 않았으며, 사방의 오랑캐를 계속 정벌하고 형벌을 엄하게 하고 부역을 무겁게 하였으니, 행한 일을 살펴보면 秦始皇에 비하여 어찌 차이가 멀겠는가. 다만 儒學을 높이고 도를 소중히 여기며 현자를 구하고 간언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成敗가 이와 같이 달랐던 것이다. 孝昭帝는 어린 나이로의 충성을 분별해서 확고하여 동요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그리도 天자가 총명하였는가. 그러나 곽광이 오히려 정권을 독점하고 돌려주지 않았으니, 이는 잘못이다. 孝宣帝는 名과 實을 자세히 살피고 상과 벌을 분명히 내려서, 관리들은 직책을 잘 수행하고 백성들은 생업을 편안히 여겼으니, 효무제에 비하면 功烈이 더 낫다. 孝元帝는 우유부단하여 나라의 업이 처음으로 쇠하였고, 이성제는 酒色에 빠지고 정권을 외가에 맡겼으며, 효애제는 성질이 모질고 괴팍하고 총명하지 못해서 총애하는소인들이 조정에 가득하였는데, 침체하여 孝平帝에 이르러서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이 이 틈을 타고 마침내 漢나라의 國統을 차지하였다. 莽은 속임수와 간사함을 믿고 백성들을 번거롭게 동원하고 병난을 일으켜서 죄가 가득하고 원망이 쌓여 천하가 배반하였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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