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아무런 경계 없이 태어나는 유아는 생후 초기부터 자신의 일부라고 여긴 것들을 몰아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과 타자의 경계를 만들어나간다. 이 과정에서 나의 밖으로 거부되고 배제되는 대상을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
ab-jet
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것이 똥, 상한 음식, 오물들이다. 다시 말하면, 라캉의 거울 단계 이전부터 유아는 자기 몸의 내부에 있어야 할 것들과 밖으로 추방해야 할 것들을 구별하기 시작한다. 어머니의 몸은 유아가 스스로 분리해야 할 최초의 대상이다.

라캉에 따르면, 생후 6~18개월 사이의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고 최초로 자신을 발견한다. 이때 아이는 자신의 몸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자신의 몸과 어머니의 몸이 붙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아이가 발견하는 것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이다.

생후 몇 개월간 유아가 겪는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죄책감과 관련해서 멜라니 클라인은 이론적 가설을 세웠다. 이때 유아는 자신의 일차적 대상인 어머니,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젖가슴을 겨냥한 파괴적 충동
impulse
과 이어서 파괴적 환상에 대한 죄책감을 경험한다.
15)
이것을 멜라니 클라인은 생후 3~4개월 경 시작되는 ‘편집-분열적 위치’
paranoid-schizoid position
와 생후 6개월 경 시작되는 ‘우울증적 위치’
depressive position
라고 이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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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어머니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우울함이 이후 다시 오이디푸스적 욕망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아담이 에덴에서 추방되는 사건은 아브젝시옹의 경험과 연관성을 갖는다. 아담보다 먼저 하와는 그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는 뱀의 꾐에 넘어간다. 하와는 그 열매를 먹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뱀이라는 존재는 신이 정해놓은 인간과 신 사이의 질서(경계)를 넘어서게 했다. 결과적으로 이 경계는 결국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경계가 되고 만다. 태초에 에덴에서 인간과 하나님은 분리되어 있지 않았는데, 최초 인간들은 그 경계선 밖으로 추방되고 말았다.

프로이트는 불안에는 ‘대상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라캉은 ‘불안에는 대상이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라캉은 불안을 일으키는 대상이 있지만, 그 대상이 무엇인지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라고 한다. 즉, 모른다거나 보지 못했다고 해서, 없다고 말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불안은 대상과 분리되어 대상이 부재하게 됨으로써 생기는 것인데, 그 대체물이 되는 대상들은 근원적 대상과의 분리와 부재로부터 기인하는 불안을 일시적으로나마 잠재울 수 있다. 그러므로 불안은 욕망의 대상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욕망의 소급적 원인으로서 근원적 대상 a와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팔루스는 오이디푸스기에 아이가 어머니를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법을 상징한다. 라캉이 말하듯이 팔루스는 상실한 대상 a의 자리를 대체하는 욕망의 대체물이다.
29)
그런데 주체는 최초 대상의 상실을 만회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대상 a를 욕망하지만, 어디에서도 그 욕망의 간극을 채울 수 없다. 라캉이 말하는 불안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라캉의 설명에 의하면, 욕망은 만족을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완전한 만족 즉, 주이상스
jouissance
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주이상스는 대상과의 근원적 합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근원적 대상인 그 무엇은 영원히 알 수 없는 어떤 것이고 이것은 의식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섬광의 순간처럼 지나갈 뿐이다. 특히 예술적 형식 속에서 승화라는 형식으로 이러한 전(前)-대상과의 분리의 기억을 되살린다.

크리스테바의 입장은 주이상스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라캉의 입장과는 거리가 있다. 크리스테바는 근원적 대상을 전(前)-대상 혹은 불어 ‘그 어떤 것’을 뜻하는 쇼즈
Chose
라고 표기하는데 이것은 프로이트가 쓴 "다스 딩"
das Ding
즉, ‘그것’ ‘그 무엇’ ‘근원적 대상’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쇼즈’는 포착 불가능한 것이지만 크리스테바는 ‘쇼즈’의 장소
lieu
에 접근 가능한 방법으로 승화
sublimation
를 들고 있다.

정신분석학은 감정(feeling), 정서(emotions), 정동(affects) 사이에 있는 다양한 차이들을 구별한다. 감정은 중추신경에서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의식에서 차단될 수도 있다. 정서는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는 감정을 말하며, 정동은 이것과 관련된 모든 현상을 말하는데, 그중에 어떤 것은 무의식적이다. 그런가 하면, 기분(mood)은 비교적 안정적이고 오래 지속되는 정동 상태로서, 지속적인 무의식적 환상에 의해 일깨워지고 지속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정서와 정동, 기분은 어느 정도 겹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참고, 『정신분석 용어사전』,

당혹감과 혐오감을 자아내는 아브젝시옹 자체에는 이성적인 판단과 정동이 항상 뒤섞여 있다. 다시 말하면 아브젝시옹은 드러난 기호와 무의식적 충동이 혼합되어 있다.

희열이 찰라의 순간에 상실한 대상과의 합일의 경험을 상기시키는 것이라면, 정동은 그 뒤에 남아서 최초 대상 상실의 고통을 반복적인 기분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출생 때 탯줄을 자르는 것처럼 인간은 비천시된 것(ab-ject)을 잘라내고 몰아내지만, 이 아브젝시옹의 이질감은 면면히 흐르고 있다가 어떤 계기에 돌출한다. 그런데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상징계의 의미화 구조 속에서, 이러한 정동은 기호화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인간이 이 타자의 의미망 속에 갇혀 있다고 해도, 상징계의 의미 작용이 인간의 육체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기억을 모두 기호화하기 어렵다.

프로이트는 「억압에 관하여」
43)
라는 논문에서 억압의 두 단계를 말한다. 1차적 억압인 ‘원초적 억압’과 2차적 의미의 ‘본래적 억압’이 그것이다. 2차적 억압인 ‘본래적인 의미의 억압’은 억압된 표상의 정신적 파생물이거나 혹은 다른 곳에서 생겨나 그 억압된 표상과 연결된 관념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억압은 의식의 거부 행위와 억압된 표상이 다른 것들에 가하는 힘이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만약 이 두 힘이 작용하지 않거나, 의식에 의해 거부된 것(2차 억압)에 작용하고 있는 이미 억압된(1차 억압) 그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억압 과정은 억압이라는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원초적 억압은 감춰진 채, 무의식이 억압하는 것을 표상하는 것에서 파생된 것들을 의식은 억압하게 된다.

육체적인 증상 속에서 종양 같은 아브젝트는 나를 침입하고, 나는 아브젝트가 되어 배제된다. 다시 말하면, 암 덩어리는 나를 질겁하게 하게 대상이지만 내 속에서 자라면서 나 또한 암 환자라는 아브젝트가 되어 일상적 삶에서 배제된다. 그러나 승화 과정을 통해서 내가 아브젝트를 보유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암 덩어리와 친구가 되어 함께 살아간다. 이로써 종양은 더 이상 나를 기겁하게 하는 아브젝트가 아니라 오히려 더 나은 삶을 향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죽음과 삶, 비천함과 숭고함이 아브젝트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 곧, 비천함의 경계인 아브젝트는 또한 숭고함의 경계를 이룬다. 나환자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내고 마신 성인들의 이야기는 이에 대한 전형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의 주장에 따르지만 프로이트와 달리 고고학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즉, 1차적(원초적) 억압은 최초 주체와 대상으로 나누어지는 근원적 분리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문화적으로 경험하는 아브젝시옹은 고고학적인 원초적 억압을 원형으로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아브젝시옹은 나와 타자를 분리하는 경계선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브젝트를 분리하는 공간 즉, 아브젝시옹이 일어나는 공간은 이미 아브젝트인 ‘타자’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왜냐하면 나를 지키기 위해 아브젝시옹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브젝시옹이 일어나는 것은 이미 2차적 억압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2차적(본래적) 억압은 원초적 억압 즉, 최초 억압된 본능의 표상에서 파생된 후천적인 것이다.

아브젝트가 나를 혐오감과 거부감으로 휩싸고 몰아내듯이, 숭고함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은 나를 격정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는다. 숭고함은 내가 존재하기 위해 스스로 망각했던 근원적 대상에 대한 원초적 기억을 되살린다. 말하자면, 숭고함을 통해 바닥없는 기억 속에 묻혀버린 전(前)대상과의 합일의 순간을 경험한다. 그것은 밝은 의식 너머의 경험이다. 크리스테바는 이 숭고함을 일탈이자 구획 짓기 불가능한 완전한 결핍이자 즐거움 즉, 매혹이라고 표현한다.

프로이트에게 나르시시즘은 대상으로부터 물러나서 자아에 (리비도) 투여가 발생한다는 관점에서 정의되었지만, 이드, 자아, 초자아라는 위상학적 관점
55)
이 도입된 이후로 이것은 "이차적 나르시시즘"이 되었다. 한편, "일차적(원초적) 나르시시즘"이란 용어는 타인과의 관계가 완전히 부재하며 자아와 이드 간의 어떤 분화도 없다는 특징을 갖는 대상 부재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자궁 내의 삶은 대상 없는 이 나르시시즘적 상태와 가장 가깝다.
56)
프로이트는 억압을 원초적(1차적) 억압과 본래적(2차적) 억압으로 나눈 것처럼, 나르시시즘도 1차적 나르시시즘과 2차적 나르시시즘으로 나눈다.

아브젝시옹은 대상이 아니라 자아에게 리비도가 쏠리는 (2차적) 나르시시즘을 선행하는 전(前)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아브젝시옹과 원초적 나르시시즘은 공존하면서도 아브젝시옹은 나르시시즘을 균열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하면 ‘나’를 발견하는 것은 원초적 나르시시즘에 균열을 일으키는 아브젝시옹을 통해서이다.
57)
이때 원초적 나르시시즘과 아브젝시옹이 일어나는 공간을 크리스테바는 ‘코라’
Chora
58)
라고 명명한다.

코라로부터 시작된 충동의 운동이 타자와 결합하면서 의미가 만들어진다면, ‘나’를 의미화하고 기호화하기 시작하면서 코라에 대한 억압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코라’에서 자아는 나르키소스적이고 대상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가, 삶 충동과 죽음 충동의 반복 운동을 통해 원심력을 가지고 타자를 향해 나아가려고 할 때 분리를 위한 아브젝시옹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즉, 아브젝시옹은 충동으로 가득 찬 코라에서 기호 체계로 나가는 통로이다. 이 과정에서 2차적 억압은 기호 체계와 연관되고, 1차적 억압은 나르시시즘의 위기와 연관된다.

클라인은 개인의 충동이 초자아의 기원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서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클라인은 오이디푸스 갈등의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전(前)오이디푸스기를 초자아 형성의 첫 단계로 본다. 그러니까 후기 구강기의 가학적 국면에서 초자아가 자아로부터 분화된다.

반면에, 프로이트는 구강기에서 대상을 향한 에너지 집중
cathexis
과 대상과의 동일시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구강기에는 대상을 향한 공격 본능이 분화되지 않고 따라서 초자아도 나타나지 않는다. 구강기 이후 남근기에 초자아가 등장해서 오이디푸스 갈등을 해결한다고 보았다.

아브젝시옹은 경계의 문제인데, 경계 자체가 허물어지면 그것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아브젝트에 대한 강력한 금지를 명령하는 초자아는 자신과 주변을 지키고자 하는 자아의 방어 본능을 숨기고 있다. 방어적인 자아와 파괴적인 초자아의 투쟁에서 초자아는 자아에 의해 아브젝트의 가면을 쓰고 추방되는 것이다. 정신분석이 밝히는 바에 의하면, 이 파괴적인 초자아는 그 공격성을 바깥 대상에 투사하고 안으로는 자아까지 위태롭게 만든다. 불안에 싸인 자아는 투사된 대상을 자기 바깥으로 내쫓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분화시킨 초자아까지 축출한다. 자아는 안심할 겨를 없이 불안에 싸여 초자아를 또다시 분화시키고 축출하는 운동을 반복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초자아는 자아의 다른 얼굴이다. 이것을 문화적으로 확장해서 말하면, 공포와 혐오를 자아내는 아브젝트는 우리 자신의 또 다른 얼굴이 될 수 있다.

아브젝트가 된 대상의 거부와 함께 자아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만들어지고 의미화의 기반이 마련된다. 초기 자아가 겪는 이 투쟁은 분명히 최초 대상 즉, 모체와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언급되었듯이 이 원초적 대상은 이후 계속적으로 다른 대상으로 대체되어 아브젝트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아브젝시옹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면서 의미화의 시초이고, 이것이 문화 속에서 계속 발견되는 많은 아브젝트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다.

대상 관계(object relations)와 대상과의 관계(object relationship)라는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는 대상에 대한 개인의 태도와 행동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정신적 이미지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실제 사람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을 구분하기 위하여, 대상과의 관계는 주체와 실제 다른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 즉, 대인관계를 일컫는 말로, 대상 관계는 마음속의 대상 표상과 관련된 심리적 현상을 일컫는 말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대상 관계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보고되는 경험이나 관찰된 행동에 의거하여 추론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둘 모두는 개인 발달사의 산물인 무의식적 환상의 영향을 받는다(『정신분석 용어사전』,

초자아에 의해 아브젝트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자아는 초자아의 의도와 계획과는 다른 자아의 모습으로 서게 된다. 즉, 초기 자아에서 분화된 잔인한 초자아는 자아를 죽음 충동으로 몰고 가지만 아브젝시옹은 거기서 새로운 의미로 향한 길을 낸다. 비록 그것이 욕지기가 솟는 것으로 의식에 다가올지라도, 그 이면에는 삶과 죽음 충동의 격렬한 투쟁에서 살아남은 새로운 의미가 배태되는 것이다.

아브젝트가 도착적이라고 보는 이유는 그것이 금지나 규칙·법을 무시하거나 파기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왜곡시키고 곡해하고 부패시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브젝트는 금지나 규칙을 더 잘 어기기 위해서 그것을 이용한다고 할 수 있다.

타락과 구원,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는 아브젝시옹의 카타르시스 효과는 예술과 종교의 영역을 아우른다. 아브젝시옹이 가진 정화 작용의 다양한 카타르시스는 종교의 역사를 이루고, 탁월한 예술로서의 카타르시스로 연결된다. 곧, 카타르시스적 관점에서 예술적 경험은 분명 아브젝트를 말하고, 그것을 통해 정화되며, 종교의 중요한 부분도 아브젝트 속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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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종교의 힘이 약화되기 시작한 근대 이후, 아브젝시옹은 주로 문화의 영역에서 특히, 예술 분야에서 이루어져 왔다. 문학 작품들은 주체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 기원에 있는 원초적 억압을 노출시킨다. 문학을 통해 아브젝시옹은 사회의 동일성의 가장자리에서 성스러움의 기능을 대신한다. 그것은 문학을 통한 승화 즉, 카타르시스이다.

실상 우리가 배척하고 가까이 하기를 혐오시하는 것들은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의 다른 얼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브젝트는 함축한다. 내심을 가린 겉치레 인사, 비아냥거리는 욕설과 뒷담화, 뇌물 받는 공무원 등은 우리 주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아브젝시옹의 사례들이다. 관습과 제도는 이질성의 벌어진 틈 같은 것을 감추고 봉합하는 데 익숙하지만, 정신분석은 이 틈을 우리 앞에 상시 열어놓는다. 이 벌려진 상처 같은 틈은 현대 사회가 만든 경계들에 익숙한 우리 정신이 감내해야 하는 이질감이다.

도덕적 인간을 동물(자연)적 인간과 구별해 본체계(예지계)에 집어넣은 칸트와 달리, 헤겔은 부정이 의식 밖에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헤겔은 그 부정 자체가 역사적·사회적인 행위 속에서 제거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칸트나 헤겔 모두 더러움은 제거되어야 할 무엇으로 규정했다.

플라톤에게 카타르시스는 지혜로부터 파생되고 정신에 직관적인 것이다.
이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정화 작용은 언어를 통해 운율과 노래로 나타난다. 운율과 노래는 지성에는 이질적인 정열적이고 육체적이며 성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부정함
l’impur
을 드러낸다.

아브젝시옹을 말하는 언어는 운율과 리듬에 가까운 소리를 형상화할 수 있는 시적 언어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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