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漢)은 당(唐)이 혼란한 틈을 이어받아서 여기에서 50년 거주하였는데, 다행스럽게도 중원에 있는 나라에 많은 연고가 있어서 간과(干戈, 전쟁)가 미치지 아니하였으니 우리 역시 아무 일 없는 가운데 교만하였습니다. 지금의 병사들은 기고(旗鼓, 전쟁)를 알지 못하고 인주는 살아남을는지 망할는지를 모르니, 청컨대 군사적 대비태세를 정비하고 또한 송(宋)과 왕래하며 우호관계를 맺으십시오."

유창(劉?, 942~980)은 채용할 수 없었다. 이에 이르러 처음으로 두려워하여서 소정현을 초토사로 삼았다.

병문(幷門, ?州, 山西省 太原市, 北漢)과 우호적으로 왕래하는 것만 못하니 군사를 발동하여 남쪽으로 내려오게 하면 우리는 황화(黃花)·자오곡(子午谷)에서 군사를 내어 이에 호응할 것인데, 중원은 앞뒤로 적을 만나게 되는 것이니 관우(關右, 함곡관 서쪽)의 땅은 위무만하여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왕소원이 그 말을 그렇다고 생각하여 촉의 주군에게 권고하여 손우(孫遇)·조언도(趙彦韜)·양견(楊?) 등을 파견하여 납환(蠟丸)14의 백서(帛書)로 샛길로 가서 북한(北漢)의 주군15에게 주고 이미 포(褒, 陝西省 勉縣 西老城)·한(漢, 四川省 廣漢市)이 군사를 늘렸다고 말하면서 북한(北漢)과 약속하여 황하를 건너 같이 거사하기로 하였다. 손우 등이 도하(都下)에 이르렀는데, 조언도가 그 편지를 숨어들어 가져다가 바쳤다. 조언도는 흥주(興州, 陝西省 略陽縣) 사람이다.

황제가 행영(行營)에 유시하였다.

"이르는 곳에서는 여사(廬舍)를 불태우거나 이민(吏民)을 내몰아 노략하거나 분묘를 파헤치거나 상자(桑?, 뽕나무)를 잘라 채벌해서는 안 되는데, 어기는 자는 군법을 좇아서 일을 처리할 것이다."

제장들이 지나는 곳에서는 모두가 도륙하려고 하였지만 오직 조빈(曹彬, 931~999)만은 이를 금지하여 마침내 그치었으니, 그러므로 협로(陜路)의 군사들은
34
시종 조금도 범하는 것이 없었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였다.
"내가 그 적당한 사람을 얻어서 맡겼구나!"
조빈에게 조서를 내려서 그를 포상하였다.

왕전빈과 최언진(崔彦進, 922~988)·왕인섬(王仁贍, 917~982) 등이 밤낮으로 연회를 열고 술을 마시고는 군무(軍務)를 돌보지 않으면서 부하들을 풀어 놓아 자녀와 재화(財貨)를 약탈하니 촉 사람들이 이를 고생스러워 했다. 조빈(曹彬, 931~999)이 누차 군사를 돌릴 것을 청하였으나 왕전빈 등은 듣지 않았다.

오대(五代)의 방진은 더욱 강하여 부곡을 인솔하여 장원(場院, 곡식을 털거나 말리는 평탄한 장소)을 주관하게 하면서 두텁게 거두어 스스로를 이롭게 하였다.
그 가운데 삼사(三司)에 속한 것에는 높은 관리를 보임하여 그곳에 가게 하여 정해진 액수 외의 것들을 보내어 번번이 자기에게 들여보내고 혹은 사사롭게 뇌물을 받아서 이름하여 공봉(貢奉)이라고 하면서 은상(恩賞)을 내려주기를 바랐다.
황제가 처음에 즉위하여서는 오히려 앞의 제도를 따랐기에, 주목(州牧)이나 태수(太守)가 내조(來朝)하게 되면 모두가 공봉이 있었다. 조보가 재상이 되기에 이르자 그 폐단을 개혁하여 없애기를 권하고 여러 주에 명령을 내려서 탁지경비 외에 무릇 금백(金帛)으로 군사들의 실비를 돕게 하고 모두 도하(都下)로 보내어 점유하여 보류할 수가 없었다.

가을 7월에 황제는 서천(西川)의 행영에 어떤 대교(大校, 장교)가 백성의 처의 유방을 잘라내어 그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궁궐로 오게 하여 큰 저자에서 그 목을 베었다. 가까운 신하들이 구하려고 하는 것이 자못 절박하였으나 황제는 이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군사를 일으켜서 조문하면서 치는 것인데 부인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잔인하기가 여기에 이르렀는가? 마땅히 속히 법대로 조치하여 그 억울함을 보상하여야 한다."

12월 초하루 정유일에 처음으로 며느리는 시부모를 위하여 3년 자최(齊衰)·참최(斬衰)하도록 하여 하나같이 그 지아비를 좇게 하였다.

개봉윤인 조광의가 금중에서 모시고 연회를 열었는데, 조용히 폐하의 복장이 지나치게 초솔(草率)하다고 말하니, 황제가 정색을 하며 말하였다.
"너는 협마영(夾馬營)
66
에 살던 때를 기억하지 않느냐?"

애초에 황제는 지금 사용하는 기원(紀元)으로 고치면서 재상에게 명령하여 전 시대에 없었던 연호를 서로 가리어 올리도록 하였다. 이미 촉을 평정하고 났는데, 촉의 궁인들로 액정에 들어 온 자가 있어서 황제는 그 염구(?具, 화장도구)를 보다가 옛날 거울을 얻었는데 그 뒷면에 ‘건덕(乾德) 4년에 주조함’이라는 글자가 있어서 황제는 크게 놀라서
67
거울을 내어 재상들에게 보이니 모두가 대답할 수 없었다.
마침내 학사인 도곡(陶穀, 903~970)·두의(竇儀, 914~966) 등을 불러 이것을 물으니 두의가 말하였다.
"이 물건은 반드시 촉(蜀)의 물건일 것입니다. 옛날에 위(僞) 촉왕인 왕연(王衍, 前蜀 後主, 901~926)이 이 연호를 사용하였으니 마땅히 이는 그 시절에 주조한 것일 것입니다."

"밑에 있는 어리석은 백성들은 비록 숙맥(菽麥, 콩과 보리)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만약에 번후(藩侯)들이 어루만져 길러주지 아니하고 힘껏 가혹하고 심각하게 시행하였다면 짐은 끊어서 그것을 용납하지 아니하였다."
조보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폐하께서 백성을 아끼심이 이와 같으니 바로 요(堯)·순(舜)의 마음 씀입니다."

윤달(윤8월)에 잃어버린 책을 구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무릇 관리와 백성들 가운데 서적을 가지고 와서 헌납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관(史館)으로 하여금 그 편목(篇目)을 살펴서 사관 안에 없는 것이면 이를 거두어들이고 책을 헌상한 사람은 학사원으로 보내어 관리의 이치를 시험 쳐서 묻게 하고 직관(職官)으로 벼슬하는 일을 감당(堪當)할 사람을 보고하라."
이 해에 《삼례(三禮)》의 섭필(涉弼)·《삼전(三傳)》의 팽간(彭幹)·학구(學究)
70
의 주재(朱載)는 모두 조서에 호응하여 책을 헌상하니 서부(書府)에 나누어 두라고 명령하고 섭필 등에게 과명(科名)
71
을 하사하였다.

"백성들 가운데 뽕나무와 대추나무를 심어서 가꿀 수 있고, 황무지인 밭을 개간할 수 있는 사람은 조세를 징수하지 않고 보좌하여 오도록 권고할 수 있는 사람은 상을 받는다."

조보는 평소에 두의가 강직한 것을 꺼려서 설거정(薛居正, 912~981)·여여경(呂餘慶, 927~976)을 끌어들여 참지정사로 하였고 도곡(陶穀, 903~970)·조봉(趙逢, ? ~975)·고석(高錫, 936~985) 등은 또 서로 무리를 지어 붙어서 함께 두의를 배척하여 황제의 뜻을 중간에서 끊었다. 이에 이르러 죽자 황제는 가엽게 생각하여 말하였다.
"하늘이 어찌하여 나의 두의를 빨리 데려간다는 말인가!"
우복야를 증직하였다.

요주는 비록 야율이뢰합의 말을 다 좇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를 아끼는 것이 특별히 심하였다. 일찍이 가을 사냥을 따라나섰는데, 사슴소리를 잘 내는 사람이 한 마리의 수사슴을 불러 왔다. 요(遼)의 법에는 수사슴으로 뿔이 양쪽에 난 것은 오직 천자만이 쏠 수 있었는데, 요주가 야율이뢰합에게 그것을 쏘라고 명령하니 활시위 소리와 함께 쓰러지자 요주는 크게 기뻐하며 하사하여 준 것이 두터웠다. 이에 이르러 연회를 열었는데 아주 기뻐하며 다시 금으로 된 사발과 가는 실로 짠 비단, 그리고 새끼 밴 말 100필을 하사하였으며 좌우에 있던 사람으로 관직을 받은 사람이 아주 많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