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0장

1945년 8월의 무거운 분위기와 농민의 뿌리 깊은 불만은 한반도 전체로인민위원회가 빠르게 퍼져나간 까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시·군·면에서 "(농민이)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잡았을 때 지방 관료·경찰·지주에게서권력을 빼앗은 고전적 혁명이 일어났다.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적의 힘을 정확히 계산해 인민위원회를조직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했고, 조직한다면 그 성격과 역량, 존속 기간을 적절히 판단했다는 의미였다. 곳곳에서 작은 혁명이 일어났지만 그 본질은 장소와 시간에 따라 바뀌었고, 변화의 속도와 참여한 집단 및 계급도서로 달랐다. 거의 모든 지방에서 완전히 새로운 경찰력이 나타났고 새 위원회가 행정을 인수했으며 대부분의 일본인·한국인 지주는 재산을 위협받았다. - P360

한국은 산업화되면서 근대성과 후진성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게 됐고, 국내 시설은 자국이 필요로 하는 것을 상당히 넘어서는 수준까지 발전했지만 자국보다는 일본의 이익에봉사했다. 정치적으로 불안한 시대에 나타나는 급진적 활동에서 그런 시설은 두 방향으로 사용된다. 반란 세력이 장악한다면 그것은 신속한 소통을 가능케 하지만, 질서를 유지하려는 세력이 장악하면 반란 세력을 저지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이처럼 해방된 남한에서 인민위원회는 가장 발달한 지역과 가장 낙후한 지역 모두에서 강력한 위상을 확보하는 역설이 나타났다. 그러나 경찰을 비롯한 치안 기관은 이런 시설을 장악해 유용하게 썼다. 이것은 그들이 한국을 안정화하는 데 성공한 결정적 요인이었으며,
1945~1950년 남한의 비교적 고립된 지역에서만 강력한 반란이 펼쳐진 핵심적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 P369

한국에서 미국인은 도 단위에서 잘 기능하고 있는 기존 정치조직을 체계적으로 무너뜨린 뒤 그것을 대체할 지방 정치조직이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 세력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미국인이 대신 해줄 수는없었다. 따라서 문제는 미국이 자립할 수 있는 조직을 발전시키거나 촉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런 임무를 감당할 수 없는 정치집단을 지원하기로한 편협한 결정이었다. - P389

전직 미국 관료는 인민위원회가 전라남도를 지배하면서 발생한 문제점과그에 대한 미국의 대응책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도의 관할권을 모두 인민공화국에 넘기든가, 아니면 그 지배를 무너뜨려야 한다. 최종 결론은 옛 총독부 기구와 현재 근무하고 있는 하위 관료를 기반으로 이용하고 적당한 지도자를 찾는 대로 빨리 그들을 요직에 임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라남도는 물론 미국이 지배한 모든 도에 적용된 정책을 간결하설명한 것이다. 혁명에 맞서기로 한 결정이 이보다 솔직하게 표현된 것은 드물다. - P394

인구의 다수를 차지한 소작농과 관련해 해방 이후와 1946년 가을 남원군과 순창군에서만 반란이 일어났을 뿐 전라남도와 달리 비교적 조용했던까닭은 두 가지였다. 첫째, 광범위한 지주 제도는 소작농을 다양한 방법으로 통제했다. 아울러 한국인 지주가 더 많아 전통적 관계가 덜 무너졌다. 식민 지배가 야기한 민족적 분열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전라북도의 많은 한국인 지주는 일본과 부적절하게 가깝다는 오명을 피할 수 있었다. 둘째, 전라남도에서 동척이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한 것과 반대로 전라북도에 일본인 지주가 많이 존재했다는 것은 해방 뒤 그들이 고국으로 도망치면서 소작농에게 싼값으로 토지를 팔거나 그저 버렸다는 의미였다. 이런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는 없지만 널리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것은 많은 소작농이 소작농의 지위라는 집단적 문제를 개인적 방법-일정 면적의 토지를 사거나 소유하는ㅡ으로 해결했다는 의미였다. 신분 상승 이동을 이용한 개인적 해결책의 가능성은 이처럼 전라북도 소작농의 연대를 약화시켰다. - P412

처음에 인민위원회는 멀리 떨어져 있고 빈곤한 군에서 세력을 넓혔지만 결국 손쉽게 해체됐다. 인구 변화가 크고 좌익과 우익이 긴장속에서 공존한 중심 지역의 군에서는 여러 인민위원회가 1946년 가을까지세력을 유지했다. 정치상황이 복잡한 군, 특히 인민위원회의 우세나 열세가 명확하지 않은 군에서는 인민위원회에 반대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미군은 물론 인민위원회와 관련되지 않은 한국인 군청 직원은 인민위원회 지도자들이 여러 면 행정을 맡도록 허락함으로써 인민위원회의 위상을 인정할수밖에 없었다. 해방 뒤 14개월 만에 경상북도 전체에서 거대한 봉기가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도에 견고히 자리 잡은 인민위원회는 봉기에 필요한 조직력을 공급했고, 급격한 인구 유입은 기꺼이 무기를 들려는 정처 없고 분노에 찬 사람들을 공급했다. - P429

미군이 제주도에서 시행한 행정과 인사에 대한 자료는 매우 적다. 미군이임명한 도지사 박종훈은 대일 협력자로 알려졌다. 기이한 일치지만, 미군여론조사반의 통역으로 제주도에 온 인물은 자신과 함께 온 신임 제주 경찰서장이 일제강점기의 특고경찰이었음을 알게 됐다. 통역이 신우경이라는 인물에게 새 직책을 묻자 그는 "일제강점기의 경찰인 자신이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임명된 것을 스스로도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한라단같은 일부 우익 단체도 제주도에 있었다. 좌익이 분명히 우세했지만, 이렇게 여기서도 경상북도처럼 오랫동안 좌익과 우익이 공존했다.
1946년 가을 과도입법의원 선거에서 제주도에서는 2명의 좌익이 당선됐지만, 그들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행방불명됐다.
제주도의 직업 구성이 비교적 다양하게 분화돼 있던 것도 인민위원회가발전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 P445

행정 단위의 서열에 따라 인민위원회에 대한 탄압이 이뤄지면서 중앙집권화가 강화되고 하달식 명령 체계가 확립됐지만, 인민위원회는 그와 반대로 자발적이고 상향식 의사전달을 구현함으로써 깊이 뿌리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자발성은 인민위원회의 커다란 약점 가운데 하나로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일본인은 수십 년 동안 시장이나 행정력을 침투시켜 한국의군과 면을 개방시켰지만, 일본이 패망하자 그 군과 면에서는 폐쇄가 나타났다. 인민위원회들은 물샐 틈 없는 밀폐 공간처럼 자신이 관할하는 군의 사무를 다스리는 데 만족하면서 다른 지역의 사건에는 대체로 관심을 갖지않았다. 분할되고 특정 지역에 치우친 인민위원회의 행정은 일종의 세포 구조를 가졌다. 하지만 미국이 찾으려 했어도 찾지 못한 세포에 기반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계급적 구조는 아니었다. 이런 구조적 약점에 힘입어 각 단위를 다른 단위와 분리해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민위원회를 탄압하는 것 - P449

은 쉬워졌다.
이런 복잡한 고려 사항보다 인민위원회가 패배한 가장 핵심적 요인은 미국의 권력이었다. 인민위원회가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은 미국의 보고에 거듭 나왔지만, 미국은 이런 운동이 자신들의 이익에 봉사하지 않았기때문에 의식적·체계적으로 뿌리 뽑았다. 이런 조치가 남한 농촌의 정치적통합과 참여에 미친 영향은 지금까지도 느낄 수 있다. - P450

경상북도, 특히 대구와 그 인접 군, 국방경비대 경상 - P457

북도 연대에서는 해방 첫해 동안 좌익과 우익이 공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대구에서 이런 현상은 대구지역평의회로 나타났다. 그것은 조선공산당 ·한국민주당·한국독립당 ·인민당에서 지역 지도자 20명을 동일하게 뽑아 구성한 단체였다. 평의회는 1946년 6월 28일부터 주마다 한 번씩 모였다. 미군정도 담당 장교는 평의회의 조언을 군정 정책 수립에 이용했다. 그들은 그 단체가 곡물 징수를 위해 농민의 협력을 얻는 데 특히 유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평의회는 전후 한국에서 드물게 성공한 합작 시도의 하나였지만,
극우와 극좌는 여러 이유를 대며 반대했다. 또한 평의회는 경상북도에서 좌익이 존속하고 일정한 합법성을 얻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전후남한에서 마찬가지로 희망차게 출발한 수많은 조직처럼, 이 역시 유혈의 폭력적 갈등 속에 끝났다. - P458

봉기는 대구 지역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퍼진 뒤 서쪽으로 옮겨가 전라남도까지 이어졌다. 한국 전역에서 수만 명의 농민을 지휘할 수 있는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은 지방에 존재했고 그 지역에서 영향력을 끌어왔다. 그 구조는 계층적이 아니라 독립된 세포 형태였다. 마치 소문이 대중의 비공식적 통신 수단을 거쳐 퍼지듯 한 봉기는 이웃한 지역의 또 다른봉기를 불러왔다. 당구공이 연속해 서로 부딪치듯 이런 연쇄적 반응은 자기완결적 구조를 지녔다. 공산주의자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토지의 사용 조건과 관계, 불공평한 곡물 공출, 지방에서 지주·공무원·경찰의 유착에서 연유한 깊은 분노 때문에 전라남도 농민이 일어났음을 증거들은 보여준다. - P470

폭동이 대부분 가라앉은 뒤 비판신문은 가을 봉기가 동학농민운동 이후 한국에서 일어난 가장 거대한 봉기라고 언급했다. 그런 판단은 그리 정확하지 않다. 분명히 1946년 봉기는 몇 가지 측면에서 동학과 비슷했다. 가을 봉기의 참여자들은 동학과 모든 지역의 농민 봉기에서 기법을빌려왔다. 그들은 낫·갈고리 · 망치처럼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를 무기로 삼았다. 그들은 화기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경찰이 소총을 장전하느라 잠깐 멈추는 동안 집단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언덕에서 봉화를 올리거나 산에서 북을 치거나 사람을 보내거나 구두로 전달하는 등 원시적 통신 방법으로 하룻밤 새 군중을 모을 수 있었다. 아울러 농민은 경찰·군수·지주 그리고 그들의 하수인이 자신을 억압한다는 것을 정확히 파악해 목표를 택했다.
지방 관청이 점령되면 미국 공출 기록이 가장 먼저 파괴됐다. - P472

한국의 좌익 지도자들은 1946년 가을 분출된 인간의 놀라운 힘을 지휘하고 일정한 방향으로 인도하려 했다. 격렬한 농민 봉기를 유발한 그들의 역할에는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농민의 거친 힘을 조직화된 정치로 이끌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남한에는 그들이 후퇴할 수 있는 안전 지역이 거의없었다. 거기에는 베트남처럼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중부 고지대가 없었다. 거기에는 중국 옌안처럼 전국을 지배한 정권과 경쟁할 수 있는근거지도 없었다. 그리고 농민을 조직으로 편입시켜 그들에게 이익과 지위,
적을 방어하는 핵심 요소를 제공하는 과정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시간도부족했다. 한편으로 남한의 좌익과 공산주의자는 대중을 조직하는 데 경험이 부족한 지도자들의 실패를 계속 보여줬다. 그 결과 그들은 그저 자신들만 조직했을 뿐이다. 즉 그들은 한 파벌에서 다른 파벌로 분화했으며 서울에 지나치게 힘을 집중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우세한 통신・교통을 비롯한 그 밖의 물리적 수단을 갖고 농민을 철저하게 탄압하는 훈련을 받은 - P485

관료 기구와 마주쳤다. 이런 기구는 1946년 가을 동안 수많은 사건에서 미군의 지원을 받았는데, 공산주의자와 좌익 조직자의 실패만큼이나 진압을성공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봉기 이후 한국 농민의 가장 큰 손실은 그들의 이익을 보호해준 지방 조직이 사실상 소멸됐다는 사실이다. 남한 전역에서 대부분의 인민위원회와농민조합이 사라졌다. 전국과 지방의 중요한 좌익 조직의 지도자들은 죽거나 투옥되거나 체포되거나 은신했다. 그들의 지지자 수천 명은 정치적으로온건해지거나 매우 급진화됐다. 모든 좌익이 연합해야 한다는 민전의 정확한 주장은 산산이 부서졌으며, 대중적 기반의 큰 상실과 좀더 과격하고 수용의 폭이 좁은 조직인 남조선노동당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적어도 농민에게 합리적 선택은 평온한 농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 P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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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과는 전시에 구상한 미국 계획의 순서를 뒤바꾼타협이었다. 한국 정부는 신탁통치 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수립될 것이었다.
실제로는 그것은 자치를 위한 신탁통치 협정이거나 한국인들에게는 후견이 - P296

필수적임을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협정은 오직 미국과 소련의 협력만이 한국의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인정했다. 모든 것은 협정이 어떻게 시행되고 그것이 한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달려 있었다.
미국과 소련이 신중하게 협력하고 협정을 엄격하게 실천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 P297

1945년이 저물 때까지 한민당은 자신들의 협소한 이해관계를 보편적 이해관계로 제시하는 것과 소수부유층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겉모습과 본질을 초월하는 데에서 실패했다.
그러나 신탁통치를 둘러싼 난국은 폭넓은 국가적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 기회를 제공했다. 이것은 몰락할 위기를 맞은 집단이 정치적 투쟁의 범위를 넓히는 데 성공해 좀더 유리한 권력 기반을 얻는 방법을 보여주는 주여한 사례였다. - P301

소련은 식민 지배를 겪은 나라의 즉각적 독립을 가장 옹호하는 국가라는 인상에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며 자신들이한국에서 추진해온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연합이 손상될 것이라고예상하면서도 북한 사람들을 설득해 협정을 지지하게 했다. 미군 사령부가 남한에서 우익의 반탁 세력을 지지했을 때 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 것인가? 군정 초기부터 미국이 한국 우익을 지지하리라는 사실은 소련이 예상할 수 있는 문제였을 것이다. 아울러 소련은 토착 좌익 세력이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며, 자신들의 이익은모스크바협정의 이행과 상관없이 관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처럼 협정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진 사태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사태를 미국과의 협력은 미국의 조건을 따를 때만 가능하다는 신호이자 배신 행위로 해석했을 것이다. - P306

대표민주의원은 1946년 한 해 동안 군정이 조선공산당과 인공의 온건한 좌익을 "급진파"와 분리하고 후자를 고립시켜 남한에서 연합을 이루려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첫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대표민주의원 지도 - P317

자들은 좌익과의 연합을 전혀 원하지 않았다.
2월 14일 개회식부터 그들은자신들을 한국 정부로 묘사하려고 충동적으로 행동했다. 하지는 그들이 신중하기를 바라면서 우대하고 지켜봤다. 그 결과 그들은 좌익이 아니라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 P318

소련의 오랜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독립되고 민주적이며 안정된 한국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미국이 보기에 소련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완전한 독립보다 중요하다. (…) 무력으로 강요되지 않는다면 한국은 예측할 수있는 미래에 소련보다는 미국으로 향할 것이다.
문서는 미국의 "1차 목표가 소련의 지배를 막는 것이고 "2차 목표는 한국의 독립이라고 한 뒤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한국의 독립은 2차 목표이므로 조기에 한국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미국의 - P320

이익에 부합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유엔이 침략을 막을 충분한 능력이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런 증거를 제시할 때까지 미국은소련과 함께, 필요하다면 한국에 일정한 영토를 확보하고 한국의 국제관계에일정한 핵심적 특권을 행사해야 한다. ・・・) 그러므로 한국에 과도정부를 구성하는 방안은 미국이 적어도 정부 최고 수뇌부에 위장된 통제를 몇 년 동안행사한다는 조건에 기초해야만 한다. - P321

공위의 핵심 쟁점은 미국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한국 정부가 소련이 점령한 북한 지역까지 확대되기를 바랐으며 소련은 그들대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한국 정부가 미국이 점령한 남한지역까지 넓혀지기를 기대했다는 데 있었다. 미국의 골칫거리는 소련이 지지하는 형태의 정부가 남한 전역에도 존재했다는 사실이었다. 자주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해방 직후 인민위원회가 핵심 쟁점이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 P327

군정의 공식 자료에 따르면 1946년 5월 "미국인이 남한 전역을 다니면서관찰한 결과 모든 좌익 지도자를 체포하라는 지시가 한국 경찰에 내려진것이 분명했다." 군정청 여론부의 내부 보고는 군정법령 72호가 "경찰이여러 지역에서 좌익을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데 전권을 부여했다"고 지적했다. 공식 기록은 이런 행동에 대한 책임을 얼버무렸지만, 4월 30일 랭던은 "미국이 점령한 남한 지역에서 좌익을 대대적으로 검거한 것은 기존 질서와 권력에 대한 도전을 진압하려는 쌀 배급 허가권 발급과 같은 권한을불법적으로 장악하려는 등의 목적에서 시행됐다"고 보고했다. - P332

하지를 비롯한 미국인들은 마침내 같은 시각을 갖게 됐다.
1947년 하지는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합작 정부는 곧 "공산주의 정부로 갈 - P342

것"이라는 견해를 말했다. 하지는 "소련과 국지적 협상을 끝내고 공산주의자를 여기(남한)서 몰아낼 것"을 제안했다. 11월 미소위 미국 대표단은 합작위원회의 온건 좌파는 "사령관이 정치 문제를 협상할 수 있는 믿을 만한좌익 정치 세력"을 대표한다면서 하지와 약간 다른 견해를 보였다. 하지의 견해가 우세한 이상 온건 좌파를 포섭하려는 정치적 노력은 모두 덧없었다. 버치는 지혜롭고 열정적으로 합작을 추구했지만 상관의 도움이 부족했다. 게다가 중도파에 힘을 실어주면 좌익과 우익을 이끌 수 있을 거라고 한국 정치 지형을 판단했던 그의 견해는 틀렸다. 중도파는 기반이 없었지만 좌익은 강력한 조직과 대중적 지지를 받았고 우익은 부유층과 관료 기구에 의지했다.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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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6-10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루스 커밍스의 그 유명한
저작이로군요.

해방 후, 8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여전히 분단 상태고 고착된 상태
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참...

거리의화가 2023-06-10 18:47   좋아요 1 | URL
식민지 시기, 해방 후 3년의 시간의 과정이 지금의 결과죠. 식민 청산이 안 되었고 계급, 이념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점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여성 평등에 관한 초기 논의는 여성 참정권 운동이 중심이었다. 초기 전략은 노예제 폐지 운동 및 흑인 참정권 운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2월에 읽었던 <여성, 인종, 계급>이 초기 여성 운동의 역사를 잘 설명해준다.

노예제 반대 협회의 2인 여성 대표였던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과 루크레티아 모토는 1840년 세계 노예제 반대 총회에 대표단 참석이 거부되자 최초의 여성 권리 회의를 조직했다.

8년 후, 세니커폴스대회를 계획하면서 스탠턴은 모트에게 다소 급진적인 제안을 했는데 그것이 참정권이었다. 모트는 너무 급진적이라며 결의안에 여성참정권을 집어넣는데 반대했다. 여기에 동의한 인물은 프레더릭 더글러스 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들어갔지만 결국 참정권 결의안은 만장일치의 승인을 받지 못한다.

세니커폴스대회는 1세대 여성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1851년 제2회 전국 여성 참정권 대회에서는 소저너 트루스가 “나는 여성이 아니란 말입니까?”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흑인 노예제와 여성의 종속 상태 사이의 유사성을 이야기했다.
그는 여성의 권익이라는 대의를 강력한 연설로 호소하여, 분열을 조장하는 남자들 뿐만 아니라 백인 여성들의 관심 또한 끌어모은다. 소저너 트루스의 질문은 남성우월주의자들 뿐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질문을 날린다. 같은 여성이어도 모든 여성이 백인이 아니며(인종) 모든 여성이 중간 계급 이상의 물질적 부(계급)를 누리지 못함에 일침을 날린 것이다.


이어서 미국의 수정헌법 14조와 19조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여성 이 주 변호사에 임용됐음에도 거부된 ‘브래드웰 대 일리노이 사건’(1872년), 남성과 여성의 동등권을 이야기한 수정헌법이 최종 버전이 받아들여지기까지 50년간 매회 의회에 제안되고 1972년 상원, 하원 의회를 통과했음에도 비준을 얻기 위한 싸움이 지속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페미니즘은 권리의 싸움이기도 하다. 권리가 현실에 적용되는 것은 결국 법이다. 법 이론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벨 훅스는 페미니즘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페미니즘은 단순히 남성 우월주의를 종식시키기 위한 투쟁이나 여성이 남성과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운동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예를들어 성, 인종, 계층 등과 같이) 서구 문화에 스며들어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를근절하고 제국주의와 경제적 팽창, 물질적 욕망에 앞서 국민의 자기 계발이 우 - P14

선할 수 있도록 미국 사회를 재편하고자 하는 가치 지향이자 다짐이다. - P15

페미니즘은 법의 영역에서도 강한 영향력을 떨치고 있다. 페미니즘은 근본적으로 권리의 평등에 관한 것이다. "평등"과 "권리"라 하면 철학적으로 말할 거리가 있지만, 그러한 개념들이 실현되고, 일상생활에 자리매김하게 하려면 페미니즘의 목표가 법과 통합하여 정부에 의해 집행될 수 있어야 한다.
참정권, 가족계획사업, 양육 지원 등을 위한 투쟁은 모두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법적 투쟁이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학생이 된다는 것은 법을 공부하는 학생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 - P15

2011년 평등권 수정안 비준을 위해 양원에 수정안이 제시되었고, 입법 시한이 폐지되었다. 2012년 8월 기준, 수정헌법안은 계속해서 미국 상원 사법위원회에 계류중이다.
실패 이유에 대한 여러 추측들이 있었다. 남성과 여성 모두 현상유지를원하고 강하게 원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도 시급한 사회문제가 없다고 여기는많은 이들에게 개헌은 불필요해 보였고, 오히려 그들은 평등이 실현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미국은 1964년 민권법 타이틀 VII의 통과와 함께 여성 교육과 고용에 관한 권리가 확장되는 것을 이제 막 목도했다. 보수주의자들은워렌 대법원장 재임 시(1953~1969) 연방 대법원 판결들 [특히, 1973년의 Roe v.
Wade(로 대 웨이드) 사건이 너무 진보적이라고 보았고, 이러한 관점은 평등권 수정헌법안에 대한 반대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빠르게 여성들의 지위가 개선되었기 때문에 평등권 수정헌법안 통과가 큰 의미를 갖지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증폭시켰다. 어떤 여성들은 남편이 자신을 부양해야할 의무가 사라질 것을 걱정하기도 했고, 남녀 공용 화장실 사용이나 군 복무가능성을 피하려 하기도 했다. (여성들은 체구가 작아서 장갑차에 적합할 것이라는 평등권 수정헌법안 지지자들의 주장은 그들에게 호소력 있는 문구가 되지 못했다.)확고하게 평등에 반대하는 자들의 역할을 절대로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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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은 나의 궤적을 알려준다. 

4월부터 시작해서 5월까지 북펀딩만 4개를 신청했다. 작년에 토지 시리즈를 장만하지 않았다면 '토지 세트'까지 북펀딩할뻔...!!! 


요즘 알라딘 북펀딩이 미쳤는지 사고 싶은 책이 계속 올라오는데 '걸러야 하느니라' 주문을 외우고 있다.


6월 중순쯤 받을 줄 알았던 빨간머리앤 세트가 어제 도착했길래 인증샷 몇 개를 찍었다.


박스며 책 표지며 참 예쁘게도 뽑혔다. 무엇보다 내가 초록색에 환장을 하는데 초록(청록)과 빨강의 보색 조합이라 찰떡 궁합이다! 내부도 깔맞춤이지만 살짝 다른 연풀빛색으로 앞/뒤가 꾸며져 있다.



이렇게 중간 중간에 그림이 장면으로 들어가 있는데 어릴 적 보았던 애니메이션 그림체보다 더 따뜻한 느낌의 색다르면서도 매력이 있다(매튜 아저씨가 좀 마르신 듯?ㅋㅋ)


살 때만 해도 내가 이걸 꼭 사야 하는가 고민을 했지만 막상 받아보니 왜 이리 좋은지 아... 공간은 좁아져만 가는데 실실 쪼개며 웃고 있는 나를 보니 답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얼마 전 펀딩한 책이었던 <한국전쟁의 기원>을 읽기 시작했다.


독자마다 주분야가 있고 또 그 안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세부 분야가 있기 마련이다(일명 '본진'이라고 해야 할까?)

오랜만에 한국사, 그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기의 책을 읽으니 읽는 것 자체로 신이 난다. 역시 주기적으로 좋아하는 분야의 책을 읽어줘야 하는걸까 싶기도?ㅎㅎ 


이 책을 읽다보니 몇 권의 책들이 떠올랐는데 종합해서 글을 정리해봐야겠다. 물론 책을 읽는 것보다 정리하고 글을 쓰는데 훨씬 많은 노력이 드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면서 공부가 더욱 된다는 것도 이제는 알고 있다. 



정신이 없어서 정희진의 오디오매거진 6월(https://www.podbbang.com/magazines/1785996/issues/3423)을 오늘에서야 들었다. 그런데 첫번째 에피소드가 하필 용산통신이야. 매일이 쇼킹한 뉴스라 더 이상 쇼킹하지 않게 느낄 지경이니... 얼마 전 임기 1년이 지났는데 정희진 선생님이 마치 5년, 10년 지난 줄 알았다는 말에 '그러게 말입니다.' 하고 읊조렸다. 어디까지 가보자 컨셉인것인지.


꼴보기 싫고 짜증은 나지만 아닌 건 아닌 것이니 주권을 가진 우리는 행세를 하고 살아야겠다. 우선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부터!



지난 주말 노을이 지는 풍경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노을을 보는데 문득 기분이 좋아져서 산책을 하고 싶었고 자연스레 밖으로 나와서 공원을 걸었다. 역시 좋았다.

동이 트는 새벽을 좋아했던 내가 이제는 노을도 제법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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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6-08 1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앤시리즈 정말 예쁘게 나왔네요~~ 잘 사셨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6-09 09:16   좋아요 1 | URL
실물 보니 잘 샀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차피 기존에 앤 세트를 갖고 있던 게 아니었으니 언젠가는 샀을테니까하고 자족합니다^^

책읽는나무 2023-06-08 20: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난 주였던가?
앤과 토지 책 펀딩소식을 듣고 아....심각하게 고민을 했지 뭡니까?
이미 다락방 미친 여자 후속 책이랑 다른 나무 그림책? 암튼 두 권의 펀딩을 했어서서...흑! 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앤이랑 토지 펀딩해서 갖고 싶어요.ㅜㅜ
근데 토지는 목돈이 넘 들어서 할부를 몇 개월을 해야할까? 투비 30만 원 적립금을 받았더라면 토지 당장 펀딩했을텐데...생각하다가 눈 뜨니까 아침이더군요.ㅋㅋㅋ
아침이 되니까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 참자! 그런 정신력으로 무장했더랬는데..화가 님이 찍으신 노을 색깔이 마치 빨강머리 앤의 책을 연상시키며 유혹하는군요.ㅋㅋㅋ
근데 대도시의 노을 풍경은 좀 장엄하고 꿋꿋하단 생각이 듭니다. 멋지네요^^

거리의화가 2023-06-09 09:18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저도 후속작 사고 한국전쟁의 기원 세트 사고 앤 세트 사고 또 하나 사고 나니 4개가 되었더군요ㅋㅋㅋ
토지 세트는 30만원대라 부담이 되긴 하겠더라구요. 저는 마로니에 세트 20만원대 중반이었나에 산 것 같은데. 둘 다 부담되시면 한 세트라도 지르세요. 인생 뭐 있습니까!

stella.K 2023-06-08 20: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실물 영접하셨군요.
책이 예쁘긴 예쁘네요.
알라딘에 당분한 들어오지 말까봐요. 괴롭네요.ㅋㅋ

거리의화가 2023-06-09 09:19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러니까요. 진짜 요즘 펀딩이 미쳤는지 계속 나오네요; 왠만하면 건너뛰는데 자꾸 유혹해서 힘들더라구요. 이제 더는 안되겠어서 북펀드 클릭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잠자냥 2023-06-08 22: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토지는 약간….이 기회에 사서 읽을까 싶었습니다만….. 참기로 (대단하다 나!)

거리의화가 2023-06-09 09:20   좋아요 1 | URL
오!!! 잠자냥님 역시 대단하십니다. 유혹에 굴복하지 않으시다니~ㅎㅎㅎ

stella.K 2023-06-09 09:55   좋아요 0 | URL
아, 왜 이러십니까? 잠자냥님 답지않게.
잠자냥님 토지 살꺼다에 5백원 걸겠슴다. ㅋㅋㅋ

잠자냥 2023-06-09 12:55   좋아요 1 | URL
으으음... 제가 이길 거예욧! ㅋㅋㅋㅋㅋ

자목련 2023-06-09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앤, 너무 예쁘게 나왔네요.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아니 버립니다. ㅎ
도시의 노을은 뭔가 화려하면서 아련하네요.

거리의화가 2023-06-09 11:33   좋아요 0 | URL
노을은 산허리에 걸친 것이 더 근사하긴 한데 저희 동네에 뒷산은 노을 반대 쪽 편 방향이라 볼 수가 없어 아쉽네요^^; 앤 예쁘죠? 자목련님과도 잘 어울릴 듯 합니다. 책 디자인 자체가 소녀소녀해서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바람돌이 2023-06-09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앤 시리즈도 멋지고 노을 사진도 멋지고요. 요즘 알라딘 서재를 좀 못들어왓더니 그 동안에 한국전쟁의 기원 북펀딩도 있었군요. 오래전 추억돋는.... 다시 읽지는 않지 싶어요. 공부가 싫어요. ㅎㅎ 그보다 빨간머리 앤이 더 읽고 싶어요.

거리의화가 2023-06-09 17:15   좋아요 0 | URL
네. 요새 북펀딩이 좀 많더라구요. 얼마 전 일리아스까지 펀딩을 하는 바람에 북펀딩으로만 20만원 넘게 썼어요-_-;
ㅋㅋ 그동안 관련 서적을 많이 읽어오셨으니 안 읽으셔도 됩니다. 재미난 책 많이 읽으셔요.
빨간머리앤 이쁘죠! 힐링이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읽으려구요^^

희선 2023-06-11 0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앤 책을 벌써 받으셨군요 기쁘시겠습니다 책이 예쁘게 잘 나와서 더 좋겠네요 노을 멋집니다 거리의화가 님 남은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6-11 11:30   좋아요 2 | URL
책이 넘 예뻐요. 볼 때마다 흐뭇합니다^^* 희선님 남은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3-06-23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탐심을 자극하는 외모! 잘 빠진 차를 보는 듯! 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06-23 10:39   좋아요 1 | URL
잘 빠진 차!ㅎㅎㅎ 그렇네요^^ 커버며 속지며 디자인을 참 잘 뽑은 듯합니다!
 

정치적 견해와 상관없이 한국인은 오랜 기간 망명한 애국자로서의 이승만을 환영했다 그들은 자기 삶을 한국 독립에 바친 유일한 망명자일 뿐 아니라 일본 병탄에 처음부터 반대한 소수의 한국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를 평가했다. 인공의 허헌은 "내가 12~13세였을 때 이 박사는 이상재와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평생 우리나라를 위해 싸웠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인공 주석으로 뽑았다"고 말했다. 조선공산당의 해방일보』도 평생을 한국에 바친 이 "혁명가‘의 귀국을 보도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모든정치단체의 관심은 이승만이 어떤 세력을 지지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박사는 대중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며 그래서도 안 된다." - P264

일본인 소유주를 쫓아내고 여러 업무를 장악한 노동자위원회는 전면적으로 탄압하기보다는 정규화된 조합을 통해서 통제하는 쪽이 좀더 낫다고 판단된다. 군정은 노동자를 진정으로 대표하는 조합을 육성하고, 이전 소유주를 추방하려는 막연한 계획만 있을 뿐 공장을 다시 열 수 있는 적극적 계획이 없는 무책임한 선동가를 축출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 군정은 공산주의자가 노동자위원회를 모두 장악하고 있다고 성급히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이른바 공산주의 단체는 대부분 상당히 온건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미국이 보기에 개혁적인 것은 한국적 맥락에서는 혁명적이었다. 공식 기록이 서술한 대로 "몇 가지 사례에서 경찰은 농민·노동 조직이 모두공산주의 단체라는 일본 경찰의 생각을 그대로 답습했다. 아울러 군정이우익 세력과 일제에 고용됐던 한국인 경찰을 지지하면서 노동조합 정책의쟁점은 군정의 통제를 벗어났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결과 전평은광범하게 전개된 탄압의 대상이 됐다. - P274

자유 시장 정책의 실패를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옛 미곡 공출제도를다시 시행해 "사실상 일제의 제도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군정은 먼저 총독부 산하의 조직과 여러 반관적기구를 부활시켰다" 거기에는 조선식량영단朝鮮營團 • 동양척식회사(동척) ·조선수입품통제회사와 그 밖의 운송·유류類·석탄 관련 독점기업이 포함돼 있었다. 이 회사의 이름은 조선생활필수품영단·신한공사韓公社 조선물자회사 등으로 바뀌었지만일본인에게 고용됐던 한국인은 모두 그대로 근무했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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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6-08 1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이 두꺼운 책 시작하셨군요!

거리의화가 2023-06-08 13:24   좋아요 1 | URL
네^^ 이달 내내 읽을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읽는데도 역시 재밌네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