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견해와 상관없이 한국인은 오랜 기간 망명한 애국자로서의 이승만을 환영했다 그들은 자기 삶을 한국 독립에 바친 유일한 망명자일 뿐 아니라 일본 병탄에 처음부터 반대한 소수의 한국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를 평가했다. 인공의 허헌은 "내가 12~13세였을 때 이 박사는 이상재와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평생 우리나라를 위해 싸웠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인공 주석으로 뽑았다"고 말했다. 조선공산당의 해방일보』도 평생을 한국에 바친 이 "혁명가‘의 귀국을 보도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모든정치단체의 관심은 이승만이 어떤 세력을 지지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박사는 대중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며 그래서도 안 된다." - P264
일본인 소유주를 쫓아내고 여러 업무를 장악한 노동자위원회는 전면적으로 탄압하기보다는 정규화된 조합을 통해서 통제하는 쪽이 좀더 낫다고 판단된다. 군정은 노동자를 진정으로 대표하는 조합을 육성하고, 이전 소유주를 추방하려는 막연한 계획만 있을 뿐 공장을 다시 열 수 있는 적극적 계획이 없는 무책임한 선동가를 축출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 군정은 공산주의자가 노동자위원회를 모두 장악하고 있다고 성급히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이른바 공산주의 단체는 대부분 상당히 온건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미국이 보기에 개혁적인 것은 한국적 맥락에서는 혁명적이었다. 공식 기록이 서술한 대로 "몇 가지 사례에서 경찰은 농민·노동 조직이 모두공산주의 단체라는 일본 경찰의 생각을 그대로 답습했다. 아울러 군정이우익 세력과 일제에 고용됐던 한국인 경찰을 지지하면서 노동조합 정책의쟁점은 군정의 통제를 벗어났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결과 전평은광범하게 전개된 탄압의 대상이 됐다. - P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