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의 무거운 분위기와 농민의 뿌리 깊은 불만은 한반도 전체로인민위원회가 빠르게 퍼져나간 까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시·군·면에서 "(농민이)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잡았을 때 지방 관료·경찰·지주에게서권력을 빼앗은 고전적 혁명이 일어났다.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적의 힘을 정확히 계산해 인민위원회를조직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했고, 조직한다면 그 성격과 역량, 존속 기간을 적절히 판단했다는 의미였다. 곳곳에서 작은 혁명이 일어났지만 그 본질은 장소와 시간에 따라 바뀌었고, 변화의 속도와 참여한 집단 및 계급도서로 달랐다. 거의 모든 지방에서 완전히 새로운 경찰력이 나타났고 새 위원회가 행정을 인수했으며 대부분의 일본인·한국인 지주는 재산을 위협받았다. - P360
한국은 산업화되면서 근대성과 후진성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게 됐고, 국내 시설은 자국이 필요로 하는 것을 상당히 넘어서는 수준까지 발전했지만 자국보다는 일본의 이익에봉사했다. 정치적으로 불안한 시대에 나타나는 급진적 활동에서 그런 시설은 두 방향으로 사용된다. 반란 세력이 장악한다면 그것은 신속한 소통을 가능케 하지만, 질서를 유지하려는 세력이 장악하면 반란 세력을 저지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이처럼 해방된 남한에서 인민위원회는 가장 발달한 지역과 가장 낙후한 지역 모두에서 강력한 위상을 확보하는 역설이 나타났다. 그러나 경찰을 비롯한 치안 기관은 이런 시설을 장악해 유용하게 썼다. 이것은 그들이 한국을 안정화하는 데 성공한 결정적 요인이었으며, 1945~1950년 남한의 비교적 고립된 지역에서만 강력한 반란이 펼쳐진 핵심적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 P369
한국에서 미국인은 도 단위에서 잘 기능하고 있는 기존 정치조직을 체계적으로 무너뜨린 뒤 그것을 대체할 지방 정치조직이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 세력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미국인이 대신 해줄 수는없었다. 따라서 문제는 미국이 자립할 수 있는 조직을 발전시키거나 촉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런 임무를 감당할 수 없는 정치집단을 지원하기로한 편협한 결정이었다. - P389
전직 미국 관료는 인민위원회가 전라남도를 지배하면서 발생한 문제점과그에 대한 미국의 대응책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도의 관할권을 모두 인민공화국에 넘기든가, 아니면 그 지배를 무너뜨려야 한다. 최종 결론은 옛 총독부 기구와 현재 근무하고 있는 하위 관료를 기반으로 이용하고 적당한 지도자를 찾는 대로 빨리 그들을 요직에 임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라남도는 물론 미국이 지배한 모든 도에 적용된 정책을 간결하설명한 것이다. 혁명에 맞서기로 한 결정이 이보다 솔직하게 표현된 것은 드물다. - P394
인구의 다수를 차지한 소작농과 관련해 해방 이후와 1946년 가을 남원군과 순창군에서만 반란이 일어났을 뿐 전라남도와 달리 비교적 조용했던까닭은 두 가지였다. 첫째, 광범위한 지주 제도는 소작농을 다양한 방법으로 통제했다. 아울러 한국인 지주가 더 많아 전통적 관계가 덜 무너졌다. 식민 지배가 야기한 민족적 분열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전라북도의 많은 한국인 지주는 일본과 부적절하게 가깝다는 오명을 피할 수 있었다. 둘째, 전라남도에서 동척이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한 것과 반대로 전라북도에 일본인 지주가 많이 존재했다는 것은 해방 뒤 그들이 고국으로 도망치면서 소작농에게 싼값으로 토지를 팔거나 그저 버렸다는 의미였다. 이런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는 없지만 널리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것은 많은 소작농이 소작농의 지위라는 집단적 문제를 개인적 방법-일정 면적의 토지를 사거나 소유하는ㅡ으로 해결했다는 의미였다. 신분 상승 이동을 이용한 개인적 해결책의 가능성은 이처럼 전라북도 소작농의 연대를 약화시켰다. - P412
처음에 인민위원회는 멀리 떨어져 있고 빈곤한 군에서 세력을 넓혔지만 결국 손쉽게 해체됐다. 인구 변화가 크고 좌익과 우익이 긴장속에서 공존한 중심 지역의 군에서는 여러 인민위원회가 1946년 가을까지세력을 유지했다. 정치상황이 복잡한 군, 특히 인민위원회의 우세나 열세가 명확하지 않은 군에서는 인민위원회에 반대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미군은 물론 인민위원회와 관련되지 않은 한국인 군청 직원은 인민위원회 지도자들이 여러 면 행정을 맡도록 허락함으로써 인민위원회의 위상을 인정할수밖에 없었다. 해방 뒤 14개월 만에 경상북도 전체에서 거대한 봉기가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도에 견고히 자리 잡은 인민위원회는 봉기에 필요한 조직력을 공급했고, 급격한 인구 유입은 기꺼이 무기를 들려는 정처 없고 분노에 찬 사람들을 공급했다. - P429
미군이 제주도에서 시행한 행정과 인사에 대한 자료는 매우 적다. 미군이임명한 도지사 박종훈은 대일 협력자로 알려졌다. 기이한 일치지만, 미군여론조사반의 통역으로 제주도에 온 인물은 자신과 함께 온 신임 제주 경찰서장이 일제강점기의 특고경찰이었음을 알게 됐다. 통역이 신우경이라는 인물에게 새 직책을 묻자 그는 "일제강점기의 경찰인 자신이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임명된 것을 스스로도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한라단같은 일부 우익 단체도 제주도에 있었다. 좌익이 분명히 우세했지만, 이렇게 여기서도 경상북도처럼 오랫동안 좌익과 우익이 공존했다. 1946년 가을 과도입법의원 선거에서 제주도에서는 2명의 좌익이 당선됐지만, 그들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행방불명됐다. 제주도의 직업 구성이 비교적 다양하게 분화돼 있던 것도 인민위원회가발전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 P445
행정 단위의 서열에 따라 인민위원회에 대한 탄압이 이뤄지면서 중앙집권화가 강화되고 하달식 명령 체계가 확립됐지만, 인민위원회는 그와 반대로 자발적이고 상향식 의사전달을 구현함으로써 깊이 뿌리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자발성은 인민위원회의 커다란 약점 가운데 하나로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일본인은 수십 년 동안 시장이나 행정력을 침투시켜 한국의군과 면을 개방시켰지만, 일본이 패망하자 그 군과 면에서는 폐쇄가 나타났다. 인민위원회들은 물샐 틈 없는 밀폐 공간처럼 자신이 관할하는 군의 사무를 다스리는 데 만족하면서 다른 지역의 사건에는 대체로 관심을 갖지않았다. 분할되고 특정 지역에 치우친 인민위원회의 행정은 일종의 세포 구조를 가졌다. 하지만 미국이 찾으려 했어도 찾지 못한 세포에 기반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계급적 구조는 아니었다. 이런 구조적 약점에 힘입어 각 단위를 다른 단위와 분리해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민위원회를 탄압하는 것 - P449
은 쉬워졌다. 이런 복잡한 고려 사항보다 인민위원회가 패배한 가장 핵심적 요인은 미국의 권력이었다. 인민위원회가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은 미국의 보고에 거듭 나왔지만, 미국은 이런 운동이 자신들의 이익에 봉사하지 않았기때문에 의식적·체계적으로 뿌리 뽑았다. 이런 조치가 남한 농촌의 정치적통합과 참여에 미친 영향은 지금까지도 느낄 수 있다. - P450
경상북도, 특히 대구와 그 인접 군, 국방경비대 경상 - P457
북도 연대에서는 해방 첫해 동안 좌익과 우익이 공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대구에서 이런 현상은 대구지역평의회로 나타났다. 그것은 조선공산당 ·한국민주당·한국독립당 ·인민당에서 지역 지도자 20명을 동일하게 뽑아 구성한 단체였다. 평의회는 1946년 6월 28일부터 주마다 한 번씩 모였다. 미군정도 담당 장교는 평의회의 조언을 군정 정책 수립에 이용했다. 그들은 그 단체가 곡물 징수를 위해 농민의 협력을 얻는 데 특히 유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평의회는 전후 한국에서 드물게 성공한 합작 시도의 하나였지만, 극우와 극좌는 여러 이유를 대며 반대했다. 또한 평의회는 경상북도에서 좌익이 존속하고 일정한 합법성을 얻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전후남한에서 마찬가지로 희망차게 출발한 수많은 조직처럼, 이 역시 유혈의 폭력적 갈등 속에 끝났다. - P458
봉기는 대구 지역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퍼진 뒤 서쪽으로 옮겨가 전라남도까지 이어졌다. 한국 전역에서 수만 명의 농민을 지휘할 수 있는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은 지방에 존재했고 그 지역에서 영향력을 끌어왔다. 그 구조는 계층적이 아니라 독립된 세포 형태였다. 마치 소문이 대중의 비공식적 통신 수단을 거쳐 퍼지듯 한 봉기는 이웃한 지역의 또 다른봉기를 불러왔다. 당구공이 연속해 서로 부딪치듯 이런 연쇄적 반응은 자기완결적 구조를 지녔다. 공산주의자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토지의 사용 조건과 관계, 불공평한 곡물 공출, 지방에서 지주·공무원·경찰의 유착에서 연유한 깊은 분노 때문에 전라남도 농민이 일어났음을 증거들은 보여준다. - P470
폭동이 대부분 가라앉은 뒤 비판신문은 가을 봉기가 동학농민운동 이후 한국에서 일어난 가장 거대한 봉기라고 언급했다. 그런 판단은 그리 정확하지 않다. 분명히 1946년 봉기는 몇 가지 측면에서 동학과 비슷했다. 가을 봉기의 참여자들은 동학과 모든 지역의 농민 봉기에서 기법을빌려왔다. 그들은 낫·갈고리 · 망치처럼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를 무기로 삼았다. 그들은 화기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경찰이 소총을 장전하느라 잠깐 멈추는 동안 집단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언덕에서 봉화를 올리거나 산에서 북을 치거나 사람을 보내거나 구두로 전달하는 등 원시적 통신 방법으로 하룻밤 새 군중을 모을 수 있었다. 아울러 농민은 경찰·군수·지주 그리고 그들의 하수인이 자신을 억압한다는 것을 정확히 파악해 목표를 택했다. 지방 관청이 점령되면 미국 공출 기록이 가장 먼저 파괴됐다. - P472
한국의 좌익 지도자들은 1946년 가을 분출된 인간의 놀라운 힘을 지휘하고 일정한 방향으로 인도하려 했다. 격렬한 농민 봉기를 유발한 그들의 역할에는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농민의 거친 힘을 조직화된 정치로 이끌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남한에는 그들이 후퇴할 수 있는 안전 지역이 거의없었다. 거기에는 베트남처럼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중부 고지대가 없었다. 거기에는 중국 옌안처럼 전국을 지배한 정권과 경쟁할 수 있는근거지도 없었다. 그리고 농민을 조직으로 편입시켜 그들에게 이익과 지위, 적을 방어하는 핵심 요소를 제공하는 과정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시간도부족했다. 한편으로 남한의 좌익과 공산주의자는 대중을 조직하는 데 경험이 부족한 지도자들의 실패를 계속 보여줬다. 그 결과 그들은 그저 자신들만 조직했을 뿐이다. 즉 그들은 한 파벌에서 다른 파벌로 분화했으며 서울에 지나치게 힘을 집중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우세한 통신・교통을 비롯한 그 밖의 물리적 수단을 갖고 농민을 철저하게 탄압하는 훈련을 받은 - P485
관료 기구와 마주쳤다. 이런 기구는 1946년 가을 동안 수많은 사건에서 미군의 지원을 받았는데, 공산주의자와 좌익 조직자의 실패만큼이나 진압을성공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봉기 이후 한국 농민의 가장 큰 손실은 그들의 이익을 보호해준 지방 조직이 사실상 소멸됐다는 사실이다. 남한 전역에서 대부분의 인민위원회와농민조합이 사라졌다. 전국과 지방의 중요한 좌익 조직의 지도자들은 죽거나 투옥되거나 체포되거나 은신했다. 그들의 지지자 수천 명은 정치적으로온건해지거나 매우 급진화됐다. 모든 좌익이 연합해야 한다는 민전의 정확한 주장은 산산이 부서졌으며, 대중적 기반의 큰 상실과 좀더 과격하고 수용의 폭이 좁은 조직인 남조선노동당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적어도 농민에게 합리적 선택은 평온한 농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 P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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