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과는 전시에 구상한 미국 계획의 순서를 뒤바꾼타협이었다. 한국 정부는 신탁통치 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수립될 것이었다.
실제로는 그것은 자치를 위한 신탁통치 협정이거나 한국인들에게는 후견이 - P296

필수적임을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협정은 오직 미국과 소련의 협력만이 한국의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인정했다. 모든 것은 협정이 어떻게 시행되고 그것이 한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달려 있었다.
미국과 소련이 신중하게 협력하고 협정을 엄격하게 실천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 P297

1945년이 저물 때까지 한민당은 자신들의 협소한 이해관계를 보편적 이해관계로 제시하는 것과 소수부유층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겉모습과 본질을 초월하는 데에서 실패했다.
그러나 신탁통치를 둘러싼 난국은 폭넓은 국가적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 기회를 제공했다. 이것은 몰락할 위기를 맞은 집단이 정치적 투쟁의 범위를 넓히는 데 성공해 좀더 유리한 권력 기반을 얻는 방법을 보여주는 주여한 사례였다. - P301

소련은 식민 지배를 겪은 나라의 즉각적 독립을 가장 옹호하는 국가라는 인상에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며 자신들이한국에서 추진해온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연합이 손상될 것이라고예상하면서도 북한 사람들을 설득해 협정을 지지하게 했다. 미군 사령부가 남한에서 우익의 반탁 세력을 지지했을 때 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 것인가? 군정 초기부터 미국이 한국 우익을 지지하리라는 사실은 소련이 예상할 수 있는 문제였을 것이다. 아울러 소련은 토착 좌익 세력이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며, 자신들의 이익은모스크바협정의 이행과 상관없이 관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처럼 협정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진 사태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사태를 미국과의 협력은 미국의 조건을 따를 때만 가능하다는 신호이자 배신 행위로 해석했을 것이다. - P306

대표민주의원은 1946년 한 해 동안 군정이 조선공산당과 인공의 온건한 좌익을 "급진파"와 분리하고 후자를 고립시켜 남한에서 연합을 이루려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첫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대표민주의원 지도 - P317

자들은 좌익과의 연합을 전혀 원하지 않았다.
2월 14일 개회식부터 그들은자신들을 한국 정부로 묘사하려고 충동적으로 행동했다. 하지는 그들이 신중하기를 바라면서 우대하고 지켜봤다. 그 결과 그들은 좌익이 아니라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 P318

소련의 오랜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독립되고 민주적이며 안정된 한국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미국이 보기에 소련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완전한 독립보다 중요하다. (…) 무력으로 강요되지 않는다면 한국은 예측할 수있는 미래에 소련보다는 미국으로 향할 것이다.
문서는 미국의 "1차 목표가 소련의 지배를 막는 것이고 "2차 목표는 한국의 독립이라고 한 뒤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한국의 독립은 2차 목표이므로 조기에 한국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미국의 - P320

이익에 부합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유엔이 침략을 막을 충분한 능력이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런 증거를 제시할 때까지 미국은소련과 함께, 필요하다면 한국에 일정한 영토를 확보하고 한국의 국제관계에일정한 핵심적 특권을 행사해야 한다. ・・・) 그러므로 한국에 과도정부를 구성하는 방안은 미국이 적어도 정부 최고 수뇌부에 위장된 통제를 몇 년 동안행사한다는 조건에 기초해야만 한다. - P321

공위의 핵심 쟁점은 미국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한국 정부가 소련이 점령한 북한 지역까지 확대되기를 바랐으며 소련은 그들대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한국 정부가 미국이 점령한 남한지역까지 넓혀지기를 기대했다는 데 있었다. 미국의 골칫거리는 소련이 지지하는 형태의 정부가 남한 전역에도 존재했다는 사실이었다. 자주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해방 직후 인민위원회가 핵심 쟁점이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 P327

군정의 공식 자료에 따르면 1946년 5월 "미국인이 남한 전역을 다니면서관찰한 결과 모든 좌익 지도자를 체포하라는 지시가 한국 경찰에 내려진것이 분명했다." 군정청 여론부의 내부 보고는 군정법령 72호가 "경찰이여러 지역에서 좌익을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데 전권을 부여했다"고 지적했다. 공식 기록은 이런 행동에 대한 책임을 얼버무렸지만, 4월 30일 랭던은 "미국이 점령한 남한 지역에서 좌익을 대대적으로 검거한 것은 기존 질서와 권력에 대한 도전을 진압하려는 쌀 배급 허가권 발급과 같은 권한을불법적으로 장악하려는 등의 목적에서 시행됐다"고 보고했다. - P332

하지를 비롯한 미국인들은 마침내 같은 시각을 갖게 됐다.
1947년 하지는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합작 정부는 곧 "공산주의 정부로 갈 - P342

것"이라는 견해를 말했다. 하지는 "소련과 국지적 협상을 끝내고 공산주의자를 여기(남한)서 몰아낼 것"을 제안했다. 11월 미소위 미국 대표단은 합작위원회의 온건 좌파는 "사령관이 정치 문제를 협상할 수 있는 믿을 만한좌익 정치 세력"을 대표한다면서 하지와 약간 다른 견해를 보였다. 하지의 견해가 우세한 이상 온건 좌파를 포섭하려는 정치적 노력은 모두 덧없었다. 버치는 지혜롭고 열정적으로 합작을 추구했지만 상관의 도움이 부족했다. 게다가 중도파에 힘을 실어주면 좌익과 우익을 이끌 수 있을 거라고 한국 정치 지형을 판단했던 그의 견해는 틀렸다. 중도파는 기반이 없었지만 좌익은 강력한 조직과 대중적 지지를 받았고 우익은 부유층과 관료 기구에 의지했다.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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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6-10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루스 커밍스의 그 유명한
저작이로군요.

해방 후, 8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여전히 분단 상태고 고착된 상태
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참...

거리의화가 2023-06-10 18:47   좋아요 1 | URL
식민지 시기, 해방 후 3년의 시간의 과정이 지금의 결과죠. 식민 청산이 안 되었고 계급, 이념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점이 크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