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에는 낱권으로 계산하면 총 75권(분절되어 있는 책을 한 권으로 친다면 56권)의 책을 읽었다.
이 중 상반기 최고의 책을 선정했는데 총 8권이다.
1 <토지 11 >
토지 9권부터 18권까지 읽었으니 거의 토지의 절반 이상의 분량을 상반기에 읽은 셈이다.
12권에는 오가타 지로와 인실이 서로 애정을 품고 있으면서도 더 다가가지 못하는 애끓는 사랑에 연민이 들었다. 16권에는 송관수가 떠남으로 인해서 동학 운동의 세력의 마지막 뿌리가 사라지고 조선의 마지막 독립 운동의 동력이 없어지는 느낌이 들어 속상했다. 18권에는 조준구가 떠났다. 그동안 그 숱한 사람들을 괴롭혔고 보는 것만으로 스트레스 지수가 늘어나서 '대체 이 놈 언제 죽는 거야!' 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가는 모습이 비참해서 그런가 왜 짠한 것인지 참.
이 중에서 굳이 한 권을 꼽으려니 고민이 되었지만 봉순이가 떠난 것만큼의 충격은 비할 수가 없어서 11권을 고르게 되었다.
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잃시찾 시리즈를 6권까지 읽었지만 역시 1, 2권이 가장 좋았다. 1권이 콩브레의 풍경, 마들렌의 맛 등 내용적으로 더 풍성하다 여기지만 개인적으로는 2권을 꼽을 수 밖에 없었다. 피렌체에 대한 묘사 때문이다. 내게 잃시찾 2권하면 피렌체의 이미지와 풍경이 떠오르고 우피치 박물관과 작품인 프리마베라가 자동으로 머릿 속에 그려진다. 아마도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데 그만큼 강렬했고 읽는 내내 행복했다.
잃시찾 시리즈는 이제 반 정도 읽은 셈인데 다른 것은 몰라도 프루스트의 사람에 대한 관찰, 세밀한 묘사 만큼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하반기에 나머지를 마저 읽어서 시리즈를 완독할 예정이다.
3 <행복의 약속>
책의 표지에 속지 말아야 한다. 화사한 책의 겉표지와는 달리 내용은 화사하지 않았다. 여성이 가정과 사회 생활을 하면서 부딪히는 온갖 감정에 대해서 들여다본다. 특히 여성은 울상 짓지 않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미소 마스크를 억지로 강요받으며 살아간다. 나조차도 분노와 슬픔을 느끼는 상황에서 삐에로처럼 웃어 제끼던 나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행복의 약속은 참으로 기만이었다. 그동안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피로, 내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생겼던 문제들을 이 책을 읽으며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앞으로도 두고 두고 도움이 될 책이다.
4 <오리엔탈리즘>
보관함에 몇 년째 있었던 책(10년도 넘은듯)을 이제라도 때를 벗겨내고 완독했다는 것만으로 뿌듯했다. 서구가 생각하는 동양에 대한 생각이 어떠한지 들여다볼 수 있다. 근대 서구인들이 퍼나른 동양의 여행기는 서구 학자들이 문헌학적인 틀에 맞춰 분류하여 자료화되었다. 그 형태는 사실이 아닌 비틀어지고 왜곡되어 있는 이미지로 동양을 재해석하거나 재구축하여 만들어낸 모습이었다. 책의 내용을 비단 서양이 바라보는 동양에 그치지 않고 인종과 젠더에까지 확장시켜서 생각해 본다면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다만 책의 참고 사례들이 우리와 거리가 멀어서(이슬람 계) 그 점이 좀 아쉽다.
5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미술을 잘 모르지만 보는 것은 즐겨한다. 5월에 다녀왔던 한국 근현대 미술 전시는 기존에 알고 있던 작가들에 더해 잘 몰랐던 최근의 작가들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미리 읽어두고 가서 전시를 보는데 꽤나 도움이 되었다. 근대 시기 북촌과 서촌에는 한국의 예술계(미술 뿐 아니라 문학 등)를 주름잡았던 인물들이 마치 오늘날의 아지트처럼 이 곳에 자리잡고 활동을 했다. 80, 90년대 인사동의 느낌처럼 발 닿는 곳에 예술의 흥취를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북촌은 주로 고관대작이나 명문가의 예술인들이 있었다면 서촌은 하급 관리나 일본인들이 자리했다고 한다. 2권의 책에서 북촌과 서촌에서 활동했던 근현대의 예술가들을 만나는 일은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가서 과거를 회상하는 묘미도 느낄 수가 있다.
6 <한자의 풍경>
한자가 지금의 모습으로 갖추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갑골문부터 시작해서 금문, 소전체, 예서체, 해서체에 오기까지 한자의 형태가 바뀌는 과정을 확인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중국의 역사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자는 대표적인 표의 문자인데 상형자, 회의자, 형성자가 만들어졌다가 이로도 뜻을 표현하지 못하여 가차자(대명사나 각종 부정사 같은 요소에 발음이 유사한 글자를 빌려와 사용)까지 만들어지는 과정을 거친다.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서예를 다시 배우고 싶어진다. 쉬운 설명과 관련 서체를 사진으로 실어두어 무엇보다 직관적이다. 내용의 깊이가 너무 얕지도 않아 한자를 처음 알고자 하는 분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한자는 어렵지만 이 책은 결코 어렵지 않다.
7 <하버드 중국사 남북조 분열기의 중국>
과거 세계사 시간에 배우는 '위진 남북조' 시기는 유독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자고 일어나면 왕이 바뀌어 있나 싶을 정도로 외척과 환관이 날뛰던 세월이었고 남조와 북조, 무슨 놈의 국가는 그리 많은 것인지 머리가 핑핑 돌았다. 앞선 분열 시기였던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는 초한지와 삼국지의 배경이어서 그나마도 익숙한데 이 시기는 도무지 그동안 정리가 안 되었다. 하버드 중국사의 장단점은 있겠지만 적어도 시스템을 개괄하는데는 이만한 책이 드물다 싶은데 정치, 군사, 사회, 문화, 예술 등 분야별로 시기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여 심층적 이해를 돕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어두면 왕조의 역사적 흐름을 이해하는 데 다소나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8 <한국전쟁의 기원>
한국 전쟁의 배경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1권의 내용은 1947년까지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을 살펴봄으로써 주로 내부적 시선에서 전쟁의 기원을 살핀다. 먼저, 식민지 시기의 관제와 정책이 군정 시스템에 이양되고 친일 인사들이 재활용되었다. 모스크바 3상 회의 이후 좌우가 분열하면서 미군정이 좌익에 대해 극심한 탄압을 가하며 중도층은 설 땅을 잃었다. 게다가 군정의 경제 정책이 불러온 파장은 전국적 봉기로 이어지며 제주 4.3, 여순 사건으로까지 이어진다. 2-1, 2-2권의 내용은 주로 미국(국무부와 국방부)과 주변국인 일본, 중국, 대만, 소련의 정치적 지형 변화에 따른 한반도의 내부적 상황 변화를 들여다본다. 특히 미국의 외교 정책이 국제협력주의에서 봉쇄였다가 전쟁 발발 후 반격으로 변화한 것은 주변국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전쟁 한 해 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지만 1949년에는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고 1950년에는 전쟁이 일어났다.
그동안의 독서 패턴을 생각하면 상반기에는 꽤나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했던 듯하다. 하반기는 어떤 책들을 만날지 기대가 되고 지치지 말고 즐거운 독서를 이어나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