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물질>이라니.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제목이었다. 시와 친하지 않고 시를 막상 읽으면 무슨 말인지 뜬구름 같이 느껴져서 아마 평생 읽은 시집이 손에 꼽을 것이다. 근데도 이 시집의 제목을 보니 궁금하고 계속 눈길이 가서 참을 수가 없었다. 유혹할 땐 읽어줘야지. 초반에는 좀 진도가 안 나가다가 이후에는 의외로 쭉쭉 읽었다. 희한한 경험이었다. 시가 이리 두루뭉술하게 느껴지지 않다니. 피부로 와 닿는 느낌이라니. 내겐 좀 특별한 경험이었다.왜 그런가 생각해봤는데 저자가 인용하는 책, 기사, 사건 등이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었다. 자본과 이익을 위해 욕심을 부리는 인간, 환경을 뒷전으로 하고 개발에 앞장서며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려는 자들에게 일침을 날린다거나 노동자를 가벼이 여기는 관행에 분노를 내뿜기도 한다. SPC 노동자 이야기는 시를 읽으면서 주먹을 불끈 쥐게 되기도 했다(나는 그 이후로 파리바게뜨, 삼립, 쿠팡은 계속 불매 중이다). 예전에도 그래왔으니 계속 그래도 된다는 가벼운 생각은 선택하기 쉽지만 미래를 후퇴하게 만들 수 있다. SPC 공장에서는 불과 얼마 전에도 또 노동자의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나. 대체 이런 관행은 언제나 바뀌는 건지.광장은 위치가 변하고 목적도 변화하였지만 진화 중이라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후퇴하는 광장터를 만들지 않고 불의를 참지 않기 위해 모인 시민들이 보여준 단결과 의지는 자랑스러운 문화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정치는 지지부진하고 후퇴한다 해도 시민 의식이 살아 있는 한 정치는 갈 길을 잃지 않을 거라 여긴다. 한국이 참전한 베트남 전쟁은 (정부가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미와 퐁니, 퐁넛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시간이 오래됐다고 해서 덮어두기만 할 것인가. 여전히 피해자의 유족 및 후손들은 진실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더이상 외면하지 말고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일 것이다.히잡을 쓰지 않았다고 구금된 뒤 구타로 3일 만에 사망한 아미니의 이야기도 있다. ‘머리카락 깃발‘이란 제목과 내용을 보며 눈물이 났다. ‘자유‘라는 두 글자에 무게감과 고통을 또 한 번 느꼈다.몰랐던 사건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호주에 있는 ‘사과의 날‘이었다. 호주는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 태어난 혼혈 아이를 가족으로부터 분리하는 정책을 자그마치 100년 간 시행했다고 한다. 정책은 1960년대 종료되었으나 실태 조사가 시작된 것은 1990년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니... 이들을 도둑맞은 세대라 부른다고 한다. 흑백 분리, 인종 차별... 눈에 보이는 차별이 문제라고 인식한 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다. 이제 조금씩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도 문제임을 깨닫고 개선해나가는 중이라 여긴다.조지 오웰의 장미라던지, 사울 레이터의 사진을 보고 영감을 받아 쓴 시도 반가웠다. 시의 이름은 정확하지 않지만 죽음에 대해 여러 번 생각하기도 했다. 장례식의 풍경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아주버님이 가는 길이 떠올랐다. 옆지기는 그때 무척 힘들어했다. 만난 뒤 처음으로 마주한 그의 눈물을 보면서 죽음의 무게를 느끼기도 했다. 항상 아주버님에 대해 불만이 많던 그였는데 막상 그가 떠났을 때 빈자리를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옆지기였나보다.시가 아니라 마치 저자와 대화하는 느낌이랄까. 에세이 같기도 하고. 내겐 너무 명쾌해서 이해하기가 쉬웠다. 독자에 따라 이 시들이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호‘였다. 인간은 결코 단독으로 살 수 없고 세계는 이어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