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이 저물고 2012년이 시작되었다.
서재는 비어 썰렁하다. 그래도 찾아와 안부를 물어주는 분들 덕에 춥지만은 않은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2011년 마무리가 영 개운하지가 않았다.
12월 29일, 음력 12월 5일, 생일이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분들과 그날 1박2일 여행을 계획했다.
한달 전부터 숙소를 예약해두었다.
용평리조트에서 관광곤도라를 타고, 아이들과 눈썰매를 타고 강릉으로 넘어가 오죽헌, 선교장, 경포대 등 유적지에 잠깐 들렀다가 설악금호리조트에 회를 떠가서 저녁을 먹기로 계획을 세웠다.
29일 오전 9시 30분 가평휴게소에서 만나기로 전 날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29일 아침 약속 시간보다 일찍 집에서 나갔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게 낫다고, 제 시간보다 일찍 가는 것이 습관에 밴 남편의 재촉에 우리 가족은 서둘러 집을 나선 것이다.
그런데 9시 5분 쯤 한 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같이 타고 오기로 한 팀이 이제 일어났다는 것, 그래서 자기는 엔진오일을 바꾸고 오겠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행 당일 아침에 엔진오일을 바꾼다는 사실과 만나기로 한 시간에 당도하려면 출발해야하는 시간에 일어났다는 사람들.
그래도 우선 휴게소에서 기다렸다.
약속 시간이 9시 30분인데 그들은 9시45분이 넘어서 출발한 것 같다. 열시가 넘어도 오지 않았고, 남편말에 의하면 마석에서 가평휴게소는 15분에서 20분정도면 올 거리란다.
시계는 10시 5분을 넘었고, 점점 화가 났다.
내 화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1년동안 만날떄마다 통상 5분, 10분은 기본으로 늦는다. 마지막 모임때는 자기들끼리는 7시20분으로 약속을 정하고 우리에겐 7시 약속이라고 말해서 무려 40분을 기다렸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약속 시간에 대한 스트레스가 쌓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내가 화를 낸 건 아니다.
휴게소에서 음료수를 사주겠다고 하는데 현준이는 싫단다. 속이 불편하고 이상하단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아무 것도 싫다는 것이다. 아이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추운 날씨까지 겹쳐서 아침 조금 먹은 게 체한 것 같았다. 얼른 종합안내소로 가서 소화제를 사서 먹였다. 음식 냄새 가득한 휴게소 안은 우리가 있기에 불편한 장소였고 약속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한 우리는 휴게소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도 직접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전화를 거는 순간 기분 나쁜 말을 쏟아낼 것 같았기 때문에, 남편에게 전화해서 그냥 용평리조트에서 보자고 말해달라고 했다. 전화를 걸었는데 네비게이션을 가져오지 않아서 찾아갈 수가 없고, 곧 도착할 거니까 계속 기댜려달라고 했단다.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차 한대로 가겠다고 11인승을 빌리겠다더니 렌트는 싫다고해서 우리차랑 마석팀 차 한대를 가져가기로 했다. 그럼 우선 먼 길을 가고, 길에 대해 자신이 없다면 네비게이션을 챙겨야했다고 생각한다. 네비게이션이 없었던 것도 아니니 말이다. 전혀 준비없이 여행을 가겠다고 하다니 솔직히 화가 났다. 고속도로에서 어떻게 앞차를 그대로 따라 갈 수 있느냔 말이다.
친한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용평리조트에서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자신들은 찾아갈 수가 없으니 계속 기다려만 달란다. 그래서 마구 마구 화를 냈다. 엔진오일을 바꾸러 간다는 전화부터 늦잠잤다는 팀까지 화가 나는대로 마구 쏟아냈다.
도저히 내가 내 화를 감당하지 못하고서 말이다.
결국 여행은 취소가 되었다. 함께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가족 대 가족의 약속이었고,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는 일방적인 전화, 미안하다는 말로는 전혀 마음이 풀리지 않는 그런 상황이었다.
나도 이런 내가 정말 싫다.
남편처럼 화가나도 조금만 참았더라면 싶을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어졌고 다시 담을 수가 없었다.
불편한 마음으로 한 해를 마무리했다.
물론 남편 말대로 이미 지나간 일 생각하면 무엇하겠는가.
그래도 내게는 화를 참아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올 해에는 좀 더 자랐으면 좋겠다.
가고 싶지 않다는 내말과 달리 남편의 차는 용평으로 향했다.
가다보면 내 마음이 풀릴 거라는 걸 남편은 알고 있었다.
내가 상대를 향해 화를 내던 순간도 남편은 나무라지 않았다. 화 낼만한 상황이긴 했다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남편 덕분에 정말 기분이 나아졌다.
남편에게 면목없고 창피했다. 하지만 그게 나였다.
지혜로운 남편 덕에 용평리조트에 가서 아이들이랑 관광곤도라를 타고 정상까지 올라갔다왔다. 눈 쌓인 산책로를 걷는 기분이 좋았다. 눈꽃 활짝 핀 나무들을 보는 것은 황홀하기만 했다. 곤도라를 타고 내려와 간단히 점심을 먹고, 아이들 좋아하는 눈썰매를 탔다. 따뜻한 음료수를 나눠 마시고 우리 가족만의 훈훈한 애정을 느꼈다.
금호리조트는 취소를 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중간에 대관령 목장에 들러 양떼먹이주기체험도 하고, 엄청나게 쌓인 눈밭도 보았다. 나의 실수로 망칠 수 있었던 여행을 기분좋게 만들어준 남편에게 고마울뿐이다.
새해 첫 책으로 정유정의 <7년의 밤>을 읽었다.
읽는내내 압도당했다. 세령호에 빠진 세령과 그를 죽인 현수, 그의 뒤를 쫓는 영제, 현수의 아들 서원, 현수의 아내 은주, 그리고 승환.
그들과 함께 며칠의 밤을 보냈다. 7년의 밤처럼 길었지만 지루하진 않았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소설 속의 공간과 시간이 겹쳐오는 것만 같았다.
그들에게 불어닥친 인생의 변화구를 나는 어떻게 쳐낼 것인가를 생각했다.
연말의 불편했던 마음은 결국 화를 낸 나의 잘못으로 여행이 취소되었다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었다.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은 뭐 그런 일로 화를 내? 한다. 그러니 내 마음은 더 불편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건대 그나마 함께 여행가서 하룻밤을 보내지 않은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고개 넘어 폭설이 내리고 있었고, 서로에 대한 배려없이 떠난 여행지에서 어떤 사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책을 읽으며 위로를 받고, 위안을 받는다.
그렇게 새해를 맞이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아들이 묻는다.
"엄마, 왜 어른들은 책을 읽어?"
"책 속에 많은 것이 담겨 있으니까, 그걸 읽고 배우려고."
나는 또 나를 들여다보며 속상해했지만 지금은 한결 자라났다.
다음에 이런 상황이 생기면 그때 나는 어떻게 할까? 그건 단정짓지 못하겠다. 그건 그떄 내 마음과 상황에 따라 다를테니까.
그래도 조심은 하고 싶다.
남들에게 보낸 화가 다시 내게 돌아오는 게 싫기 떄문이다.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서재에 찾아와 인사 남기고 가셨던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저의 옹졸한 마음때문에 마음 편히 서재에 글 남길 수 없어 새해 인사 일일이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를 찾아와 속삭여주셨던 많은 분들께 행복과 건강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덕에 밝고 활기찬 새해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