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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기 ㅣ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평점 :
윤이형 작가의 책은 처음이다.
문학평론가 심진경은 "윤이형 소설은 줄곧 약자와 소수자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한다.
"기혼 여성들의 정치적 주체 되기의 지난한 과정을 그린 [작은마음동호회], 레즈비언 커플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정상성의 폭력을 고발하는 [승혜와 미오], 성폭력 피해 사실 여부를 중심으로 '성폭력 피해자/가해자' 간의 대립 구도만 앙상하게 남게 되는 성폭력 논쟁을, 피해자에 대한 우리 자신의 고정관념과 통념을 통해 드러낸 [피클]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며 [붕대감기]는 그 연장선상에 있는 소설"이라고 한다. 나는 기꺼이 다른 소설들을 찾아서 읽어볼 생각이다.
하나의 줄기를 따라 이어지는 소설의 형태가 아닌 서로 연결된 다양한 관계 속에서의 여성들의 사연과 에피소드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고 우리 시대의 다양한 연령과 직업군의 여성들을 보여준다. 워킹맘과 전업주부, 젊은 여성과 늙은 여성, 학생과 교수, 기혼여성과 비혼여성 등 각자의 입장과 처지가 다른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어느 한편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서든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나라는 사람의 이야기도 고스란히 이 소설 속에 담겨 있었다. 같은 여성이지만 서로의 삶이 다른만큼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 소설이 정말 매력적인 것은 이분법적인 사고가 정답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진짜 페미니스트와 가짜 페미니스트, 이런 건 없다고 말이다. 여자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선택해야만 하는 것들이 각자의 위치와 형편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하고 생각한다.
"버스? 이게 버스라면 나 역시 운전자는 아니야. 난 면허도 없고, 그러니 운전대를 잡을 일도 아마 없을 거야. 그건 우리보다 젊은 사람들이 할 일이야. 하지만 우리 이제 어른이잖아. 언제까지나 무임승차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나는 최소한의 공부는 하는 걸로 운임을 내고 싶을 뿐이야. 어떻게 운전을 하는 건지, 응급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정도는 배워둬야 운전자가 지쳤을 때 교대할 수 있잖아. 너는 네가 버스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우리 모두가 버스 안에 있다고 믿어. 우린 결국 같이 가야 하고 서로를 도와야 해. 그래서 자꾸 하게 되는 것 같아, 남자들에게는 하지 않는 기대를."(p.156)
소설 속 자신의 커리어를 쌓기 위해 학부모들과 정서적 관계를 쌓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은정이 미용사에게 자신의 어렵고 힘든 이야기를 꺼내는 것에서 우리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꺼내놓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어디에고 할 수 있어야 공감받고 위로받을 수 있다.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 내 옆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든든한 지원군일 수밖에 없다. 소설 속 고등학생때부터 친구인 진경과 세연의 관계와 같지는 않지만, 나에게도 중학교때부터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온 친구에게 문득 전화하여 만나자고 청하고, 만나서 커피 한 잔하며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들이지만 서로가 다른 사람들에게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친구가 되는 법"을 아직 모른다는 세연에게 진경은 말한다.
"음....일단 네가 아프거나, 아팠거나, 입원을 했다면 그런 사실을 나한테 알려줘야 해. 그건 친구의 알 권리야. 부담이 될 거라는 생각 같은 건 하지마. 그 정도의 부담은 컨트롤할 능력이 있는 게 친구니까. 너한테 축하라 일이 있을 때도 알려줘. 나는 네 일을 같이 기뻐해주고 싶어. 가서 박수를 쳐주고 맛있는 것을 사주고, 샴페인을 터뜨리고 싶어."(p.157)
친구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이여야 한다. 또한 다름을 인정해줄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같아질 필요는 없어. 억지로 그러려고 했다간 계속 싸우게 될거야."(p.158)
작가의 말에서 "마음을 끝까지 열어 보이는 일은 사실 그다지 아름답지고 않고 무참하고 누추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더 많지만, 실망 뒤에 더 단단해지는 신뢰를 지켜본 일도, 끝까지 헤아리려 애쓰는 마음을 받아본 일도 있는 나는 다름을 알면서도 이어지는 관계의 꿈을 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 꿈에도 서로를 사랑할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 사람들 역시 은밀히 이어져 모르는 사이에 서로를 돕고 있음을, 돕지 않을 수 없음을 이제는 알기 때문에"라는 글을 다시 새겨 읽는다. 우리는 은밀히 이어져 모른 사이에 서로를 돕고 있다는 이 말이 내게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