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한 시간을 운전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너무 속상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고나면 조금 나아질 것 같았지만, 누구에게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지 오는 내내 전의 일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일지와 종결보고서를 작성하고 일찌감치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누웠지만 계속해서 오후의 일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어떤 일에 대해 미련스럽게 떨쳐버리지 못하고 계속 곱씹으며 나를 괴롭히는 사람......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를 머릿속에서 그리고 또 그리는 사람......나의 어떤 점이 신뢰를 주지 못했을까, 나는 그녀에게 잘 응대한 걸까......조금 천천히 온 몸이 쑤셔오면서 급 피곤함이 몰려왔다. 잠을 잤지만 개운함이 없다.
그래도 오늘 쉬는 날이라 한편 홀가분하고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선생님 아이가 오늘 잘 놀았나요?" 아이가 잘 놀았는가 하는 궁금증의 질문이라고 생각하고 아이의 놀이를 설명했다.
"선생님 아이가 다른 수업에서는 안 그러는데 놀이치료는 즐거워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물어본 거에요."
3번째 만나는 날이었고, 아이 엄마는 아이가 놀이치료실만 즐거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다른 치료 수업은 매우 즐거워하는데 나의 수업만 즐거워하지 않는다며 예전에 1년동안 놀이치료를 했었는데 거기랑 너무 비교가 된다며 물론 선생님도 좋으신 분이고 잘 하시겠지만, 이라는 단서를 붙여가며 정중하게 사람 속을 후벼파는 것이었다. 마치 내가 아이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마치 아이와 놀이를 하는 치료실을 직접 봤다는 듯이, 내 아이가 즐거워하지 않을 때 보이는 반응을 보인다며 즐거워하지 않는 놀이치료를 내가 왜 해야 하는가, 하고 내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수용하고 버텨주어야 하는데 나도 사람인지라 상처받았고, 속상한 마음이 계속해서 올라왔다.
잠시 내려놓고 쉬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나를 계속해서 괴롭힐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난 깔끔하지 못하게 이렇게 그녀의 이야기를 여기에 풀며 나를 지키려 애쓰는 나를 발견한다. 안쓰럽다.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도 나를 괴롭히고 소진시킨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가기 위해 전공서적들을 읽고 또 읽었는데 오늘은 가볍게 소설책을 읽고 싶었다. 최근에 읽었던 [딸에 대하여]가 여운이 있어 도서관에 가서 3권의 책을 빌려왔다.
소설을 읽으며 나를 괴롭히는 생각을 잠시 잊고 싶었다.
이 중 가장 얇은 [항구의 사랑]을 먼저 읽었다. 잠시 소설 속에 빠져 과거를 회상한다.
어딘가 묻어두었던 그림자를 펼쳐드는 느낌이었다.
여고 시절 '팬픽 이반'이라는 동성애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공감되진 않았으나, 그 시절의 아련한 환상과 모호한 현실의 경계의 아찔함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했던 그 시절의 어리석음도 함께 떠올랐다. 최선의 선택은 늘 최악의 선택이 되었고, 나를 후회하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리숙했다. 아는 것이 없었음에도 다 안다고 착각하며 세상을 넓게 볼 줄 몰랐고, 그런 안목조차 없었다. 그때는 몰랐던 것들이 지금 생각하니 당연한데, 내가 몰랐다는 사실을 그때도 알았다면 나는 좀 더 나은 삶을 살았을까.
"분명 존재했으나 오래전 까마득히 깊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다는 대륙에 관해 생각해 볼 때처럼. 6년간 본 것들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었다. 그 엄청났던, 소녀들의 사랑하려는 욕구."(p.153)
사랑에 목 마른 아이들, 놀이치료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늘 관심과 보살핌, 무한한 애정과 수용을 갈구한다. 나는 그 아이들을 수용해주고, 버텨주고, 기다려준다. 그 아이들의 부모가 기다리지 못하고 담아주지 못한 것들을 담아주고 그래도 괜찮다고 다독여준다. 너를 마음껏 표현해도 괜찮아. 물론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 하지만 이렇게 할 수 있어. 하고 아이들을 격려하고 지지해준다. 가만히 그 아이들의 행동을 살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한 편안하고 안전감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한다. 나는 아이의 요구와 지시를 수용해주며 따라가주며 너는 이런 아이야, 너는 이런 걸 하고 싶어해. 너는 이렇게 할 수 있는 아이야. 너 이렇게 하는 게 좋구나. 지금 너가 이럴 때 화가나는구나. 화가날 때 너는 이렇게 하는 구나.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있어. 하고 다독거려주며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며 아이 스스로 자신을 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한다. 스스로가 깨닫고,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스스로 선택하고, 선택한 것에 책임지도록 하기 위해서... 이 사회에 적응하며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아이가 놀이치료실만 즐거워하지 않는다'라는 말에 대해 결국, 나에게 귀결하는 나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에 상처받을 필요가 없었다. 속상해할 필요도 없었다. 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 말에서 그녀가 나를 밀어내는 것이라고 잘못 해석했다. 그저, 그녀를 받아주었어야 했다. 그녀의 불안을 함께 견뎌줘야 했다. 놀이치료를 통해서 이 아이가 변할 것이라는 기대가 부족한 엄마의 불안을 안아주었어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었다. 그녀는 아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아이의 부족하고, 문제되는 것들을 놀면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적극적인 개입으로 가르쳐야 하고, 가르쳐서 나아지는 것은 작은 변화라도 눈에 잘 보인다. 하지만, 놀이하면서 변화되는 것은 조급하게 기다린다고해서 그 변화가 바로바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에 불안해한다는 것을 이해했어야 했다. 내가 아무리 설명하고,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라고 말해도 그녀는 그녀의 생각이 옳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그것조차도 이해했어야 했다. 그녀는 나를 공격하려고 한 말이 아니고, 자신의 불안을, 믿지 못함을 표현한 것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공격으로 상처로 받아들였으니, 여전히 소양이 부족하다는 반성으로 나의 마음을 다독인다.
나는 나를 볼 수가 없다. 그래도 나는 나의 마음을 자꾸 헤아린다. 속상한 나의 마음에 반창고를 붙이며, 내가 왜 속상해했는가를 생각한다. 나의 자존감이 높았다면, 그녀의 말이 그녀의 불안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알아차렸을텐데, 그래도 지금이라도 깨닫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그만두겠다고 말할까봐 두려운 나의 마음도 알아차렸다. 이제 시작하는 아이인데, 그냥 그만두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던 나의 불안도 함께 본다.
다음주에 그녀를 만나면 좀 더 다독여줘야겠다. 그만두고 오지 않는다면 못 보게 되겠지만......설마, 그냥 그만두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하며 나를 다시 무장해야겠다. 전공서적을 펼쳐든다. 열공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그래도 가끔 소설책 읽으며 머리를 식힐 수 있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