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상 아이디나 별명에 '비'를 종종 사용한다. 그래서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 중 비가 중요한 소재인 <언어의 정원>을 좋아한다. 하지만 단지 그래서만은 아니다. 


처음 <언어의 정원>을 봤을 때 비 내리는 모습을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한 영화, 애니가 있을까라는 생각에 푹 빠져들었다. 그리고 한번, 두번 보면서 주인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회생활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유키노는 그런 말을 한다. 열다섯살 이후로 한걸음도 못 나아갔다고,,,, OST에서도 나오는 장면인데, 유키노는 발을 그려보고 싶다는 타카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되었어, 언제부터인가"


"일어서볼래요?" 

발 건너편에서 소년이 조용히 말했다. 

"마지막으로 체중을 실은 상태의 발 모양을 뜨고 싶어요."

 좋아,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떨려서 숨을 내쉬는 것으로 대답 을 대신했다. 왼쪽 신발도 벗고 정자의 들보를 잡으며 벤치 위에 올라섰다. 소년은 유키노의 오른발 밑에 노트를 깔고서 종이에 대고 유키노의 발등을 지그시 누르며 신중하게 연필로 발의 윤곽을 따라 그렸다. 유키노는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 다보았다. 저 먼 곳에서 이파리가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비가 은행나무 잎과 유키노의 머리카락을 한꺼번에 흔들었다. 아주 작은 빗방울이 뜨거운 뺨에 톡톡 닿았다. 네 안에는 틀림없이 나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빛이 있을 거야. 유키노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 말이야.”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소년이 유키노를 올려다보았다.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되었어. 언제부터인가" 

유키노의 얼굴을 보는 소년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

 “……그거 일 얘기예요?" 

"음......, 이것저것.” 

소년은 말이 없었다. 할미새가 우는 만큼의 틈을 두고 아주 잠깐이지만 그가 빙그레 웃었다. 유키노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그는 묵묵히 시선을 다시 떨어뜨렸다. 연필이 내는 소리가 다시 빗소리를 파고들었다. 

여기는 마치 빛의 정원 같아, 반짝이는 비를 보며 유키노는 생각했다. (166쪽)


소설 <언어의 정원>은 주인공 타카오와 유키노의 주변 인물의 이야기가 추가 되었다. 타카오의 형이 등장하고, 엄마가 나온다. 그리고 유키노의 전 남친 등. 

신카이 마코토가 이야기했듯이 두시간 가량의 영화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유키노가 왜 정원에 있게 되었는지 등에 대한 설명이 된다. 그럼에도 굳이 소설을 읽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타카오와 유키노가 나중에 재회하는 장면은 소설을 그냥 라이트 노벨처럼 느끼게 하고, 전반적으로는 영화의 생략된 스토리에 지나치게 설명을 자세히 한 것 같다. 


애니 <언어의 정원>은 그 나름대로 생략된 플롯 속에서 조금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준다. 소설에서는 느끼기 힘든... 언제부터인가 걷는 법을 잃어버린,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된 청년 세대에 대한 위로가 보인다. 



           

* 제목에 대해 <맥스무비>에 설명이 되어 있다. 

 <만엽집>이라는 일본 고전 시집이 있습니다. 이 책은 <언어의 정원>에도 등장해서 이야기의 중요한 열쇠가 되는 역할을 합니다. <만엽집>에 의하면 '언어이 잎새'라는 말이 지금의 언어로 정착되었다고 합니다. 말씀 언 (言)'과 ‘잎 엽(葉)'자를 합하면 일본어로 언어라는 뜻이 됩니다. 언어의 정원, 역시 옛날식 언어를 이용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주고 싶은 생각으로 지은 제목입니다. 또 비 내리는 정원에서 다카오와 유키노가 말과 기분을 나누는 것이 중심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제 목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맥스무비#38, 145쪽)



* <언어의 정원>은 무엇보다도 묘사가 좋다. 개인적인 기록차원에서 묘사장면을 옮겨본다. 


신주쿠-신주쿠- 

알림 방송과 동시에 플랫폼으로 쏟아져 나온 타카오는 심호흡을 해서 비 내리는 5월의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계단을 향해 무심하게 흘러가는 인파에 떠밀려 나아가던 그는 고개를 들 었다. 여기다. 플랫폼 지붕이 가늘고 길게 잘라낸 하늘 저편-요요기에 우뚝 서 있는 도코모 요 요기 빌딩의 전파 탑이 흡사 미지의 산봉우리처럼 비 내리는 풍경 속에 아스라하게 솟아 있었다. 

걷는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자 타카오의 등에 사람들이 차례로 부딪쳤다. 한 직장인이 혀를 차는 소리를 무시하며 타카오는 2초쯤 그 자리에서 비와 탑을 응시했다. 

아득하게 먼 저곳의 공기를 비가 가져다주고 있었다. (10쪽)


주위의 나무들은 비에 흠뻑 젖어 이 계절 특유의 생명력이 넘치는 푸릇푸릇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주오선의 광포한 굉음도, 수도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트럭의 굉음도 여기에서는 먼 저곳에서 전해지는 속삭임처럼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 무엇인가로부터 보호받는 듯한 느낌에 유키노는 안도했다.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걷다보니 좀전의 피로감이 느릿느릿 빠져나 가는 기분이 들었다. 펌프스가 진흙에 더러워지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촉촉해 진 땅을 밟는 감촉에 기분이 좋아졌다. 잔디밭에서 벗어난 그녀는 대만식 건물 옆에 나 있는 산길처럼 좁다란 오솔길을 지나 일본정원에 들어섰다. 오늘도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편안해진 마음으로 축 처진 은행나무 잎 아래를 지나 작은 돌다리를 건넌 후 정자 안으로 들어가 우산을 접었다. 벤치에 앉자 온몸이 산소 결핍증에 빠진 것처럼 무겁게 마비되는 감각이 그녀를 옭아맸다. 칼로리가 필요했다. 매점에서 산 캔 맥주를 따서 단번에 꿀꺽꿀꺽 마시고는 푸아-하고 길게 숨을 쏟아 냈다. 몸에서 슬금슬금 힘이 빠져나가면서 정신까지 무너질 것 만 같았다. 이유 없이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오늘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알지 못했고 바라지도 않았던 하루를...... 

유키노는 조그맣게 읊조렸다. (56-5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