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당을 보면서 드는 궁금점이 있다.

 링컨은 공화당이다. 그는 노예해방을 이야기했고, 남부를 중심으로 한 민주당은 노예해방을 반대했다. 그런데 지금의 미국의 정당 민주당과 공화당을 보면 반대인 것 같다.

 (물론 양 당간의 정책의 차이가 없다는 주장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보기에 트럼프가 굉장히 오른쪽일 것 같지만, 공화당 후보의 정책을 비교한 결과 중도에 가까운 것으로 나왔고, 폴 크루그먼 조차 그의 경제정책이 맞다고 했을 정도니.)

 

10년전 쯤 미국 읽기를 했을 때 접했던 기억이 나는데, 정확히 어떤 책인지 몰라서 못 찾고 있었는데, 이번 미국 대선을 계기로 정치를 중심으로 다시 미국읽기를 하던 중 필요한 부분을 찾았다.

 

정치전문가들은 19세기 선거(1828년, 1860년, 1892년)를 중심으로 보겠지만,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대공황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편하다. 상공업계층이 지지하던 공화당과 농업계층이 지지하던 민주당이, 민주당의 뉴딜정책으로 지지자들이 뒤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1960년대까지 공화당은 미국 남부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했는데, 1960년대 이후 보수적인 지지자들과 자유로운 정당사이에 괴리가 시작되고 그것이 80년대에 들어서 극명하게 뒤바뀐 것으로 보인다.

 

1896년 선거는 유권자들을 재편성했다. 공화당은 도시 노동자, 산업가의 당이 됐다. 반면 민주당은 남부와 변경 주에서 우세를 지켰으나, 여전히 소수 정당이었다. 그 후 아홉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은 패배한 적이 두번 뿐이었다. 1912년 선거에서 공화당은 전직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제3당의 후보로 나오면서 분열돼 우드로 윌슨 민주당 후보에게 패했다, 1916년에는 윌슨이 간신히 재선에 성공했다. 공화당은 대통령 선거의 양상에 따라서 의회도 장악했다. 공화당은 선거구에서 거의 분열상을 보이지 않았다. 

20세기의25년 동안 안정되게 유지되던 선거 구도는 1929년 대공황과 이에 대한 양당의 대응으로 흔들리게 된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당의 간판을 그대로 유지했으나, 공화당원인 사람들이 열혈 민주당원으로 되고, 민주당을 강력히 옹호했던 사람들이 공화당원으로 변신했다. 대공황 발발때 대통령이던 공화당원 허버트 후버는 현상 유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도전자 프랭클린 루스벨트 뉴욕 주지사가 선거에서 변화를 주장하며 집권하자 다른 길을 택했다. 

 

루스벨트의 참모들은 케인스의 경제 논리를 따라 정부의 경제개입과 경제성장을 자극하는 적자 지출을 강조하는 정 즉 미국을 위한 새로운 정책(New Deal for America)인 뉴딜을 주창했다. 정부는 마지막에 의지하는 고용주, 생필품이 없는 이들을 위한공급자 궁핍한 이들의 삶을 자애로 이 보살피는 힘이 되었다. ... 그의 정책은 대중들에게 각인됨 으로써 향후 수십 년 동안 선거 정치를 바꿔놓았다. 

민주당은 남부에서 우세를 유지했다. 주로 남북전쟁 이후 문화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뉴딜연합에는 노동조합원과 소농, 소수민족, 아메리카 원주민, 빈민층, 평등권을 위해 투쟁하는 이들의 지지가 가세했다. 공화당은 대기업과 부유층의 당이 됐다. 

...

뉴딜연합은 1960년대까지 미국 정치를 지배했다. 한 차례의의 대격변으로 연합이 깨지지는 않았으나, 점점 와해되어갔다. 민주당에 대한 충성도나 부모 세대의 충성을 자아 냈던 사건들에 대한 유권자와 시민들의 기억은 여러 다른 이슈와 부딪치며 흐릿해져갔다. 1960년대 공화당 대통령 후보 배리 골드워터는 민주당의 아성인 남부에 첫 진출을 했다. 민주당을 정책적으로 선호해서라기보다 관행적으로 지지했던 유권자를 공략하는 남부 전략은 리처드 닉슨에게 이어졌다. 그 후 남부는 대통령 선거에서뿐만 아니라 주 쩐부와 지방선거에서도 점점 공화당 쪽으로 이동했다. 베트남전쟁 역시 전통적인 당 충성도에 의문을 던졌다.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다수는 민주당원이었다. 그러나 많은 전통적 블루컬러 민주당원들은 군대가 위험한 곳에 있는데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비애국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에 항의해 공화당으로 옮겨갔다. 다른 사람들도 민주당이 바깥 세계에 용감히 맞설 의지가 없이 고립주의자로 변했다고 생각하며 민주당을 떠났다. 

국내 문제에서 민주당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극단적으로 보이는 사회적 입장을 취하는 정책과 깊은 연관을 맺었다. 1972년 대통령 선거 때 민주당은 '(병역 기피자를 위한) 사면, 환각제, 낙태, 정당'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민주당원들의 충성도는 시험대에 올랐다. 로널드 레이건의 대통령 당선은 공화당에 대한 전통적인 충성도를 더 확장했다. 그는 명료한 철학을 가진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였다. 레이건은 강력한 국방, 낮은 세금, 복지정책 축소 그리고 전통적인 사회가치의 옹호를 주장했다. 보수적이었으나 전통적으로 민주당이던 노조 지도자들이 레이건 지지자로 가담했다. 레이건 민주당원, 즉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과 공화당에 투표했던 전통적 민주당원들은 성공적인 레이건 동맹의 중요한 일부였다. 

20세기가 막을 내리면서 보수적 기독교신자들의 정치세력 부상은 정치판 분석을 더욱 복잡하게 했다. 보수적 기독 교인들은 경제적 이유 때문에 민주당을 선호했어야 하나, 공화당에 투표했다. (69-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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