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에는 시집을 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송승언의 <철과오크>, 황인찬의 <구관조씻기기>이외에는 구매조차 하지 않았다. 예전보다 시집에 대한 정보 얻기도 쉽지 않아진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2016년에는 시집을 좀 읽어야 겠다.

 

철과오크

 “요즘 사회는 혐오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제 안에서 차별과 편견을 가진 나와 그걸 감시하는 내가 자꾸 분리가 되고 충돌을 일으켜요. 그런 싸움이 살면서 경험한 풍경, 문득 봤던 풍경과 겹쳐져서 이미지가 되는 것 같아요. 풍경 그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고 자라나고 성장하고 시들고 죽는 거죠. 무슨 의미든 보는 사람 삶의 경험이 거기에 빛처럼 스며들 수 있어요. 그런 풍경, 빈 공간을 많이 심어두려고 해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3172118145&code=960205

 

'단호한 감정 관찰' '말과 뜻과 방향을 제어하여 낯선 세계로 자신을 개방하는 독특한 힘' 등이다. 그는 사물과 자연, 관계의 풍경에서 의미를 지워내듯 최소화한 이미지를 담담하게 연다. 시집에 담긴 시 55편은 모두 '풍경의 지속―시선의 집중―시간의 채집―음악의 반복―시점의 전환―영원의 분절―죽음을 내재한 삶의 지속'이라는 재료와 의도, 설계와 구조를 띠고 있다.  http://news.mk.co.kr/newsRead.php?no=1224612&year=2015

 

송승언의 시가 사랑받는 까닭 중 하나는 반복을 통한 리듬감의 생성에 있다. “보이지 않는 길로 보이지 않는 차가 지나가고 보이지 않는 사람이 지나간다 보이지 않는 벤치에 들리지 않는 말이 있고 열리지 않는 창고에서 말이 되지 않는 사건이 일어난다 내용이 없는 수업이 있고 아무도 없는 교실이 있다”(‘피동사’)처럼 ‘없음’의 존재론이라 할 법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표제작은 일상의 반복이 쌓여 이루는 문명과 역사라는 거시적 차원으로 시야를 넓히고 있어 주목된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84171.html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안희연의 시는 우리가 가만히 있다고 여겨왔던 사물들, 또는 '저 삶은 너무 무기력하다'고 함부로 재단해왔던 이들이 실은 제각각의 캄캄함으로 끈질기게 빛을 빚어내고 있는 상황에 주목한다.(시사인 432호 별책부록 행복한 책읽기)

 

문학평론가 김수이는 "안희연의 시는 세계의 소멸과 존재의 몰락이 한꺼번에 진행되는 가장 어두운 세계의 흐릿한 삶 속에서 탄생한다"며 "가장 어두운 세계랑 폭력, 불의, 비양심 등의 윤리적 차원의 부정성이나 지배 논리, 구조적 모순 등의 사회·역사적 차원의 부정성을 초과하는 더 근원적인 부정성에 휩싸인 세계를 뜻한다"고 읽었다.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51002_0010325813&cID=10701&pID=10700

 

희지의 세계

함돈균 평론가는 이 시집을 일러 '헬조선 시대의 청춘 시집'이라 평했다. (시사인 432호 별책부록 행복한 책읽기)

 

첫 시집 <구관조 씻기기>가 ‘간결한 감각의 언어’로 흰 여백을 만들어냈다면, 두 번째 시집은 그냥, 시를 넘어, 시를 만들어냈다. 자유로워졌다.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722187.html

 

희지, 두희, 숙이 등 익명의 화자들에 이름을 부여하고, 이들로 시각적 장면을 환기시키는 이야기를 만든다. 인물들의 대화들을 시에 끌어오는 일도 잦다. 어떻게 보면 영화적이기도 하다.

=이름은 정서를 환기시키려는 차원에서 임의로 부여한다. 시에 서사를 도입하는 것은 관계성을 드러내려다보니 가져오게 되는 거다. 존 치버나 안톤 체호프의 단편을 읽다보면 빛을 발하는 어느 순간이 있는데, 시에서도 그런 표현을 하고 싶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1607

 

이번 시집 <희지의세계>를 통해 시인은, 한국문학사와의 대결에 돌입한다. 그것은 '매뉴얼화'된 전통과의 다툼이며, 전통에 편입하려는 본인과의 사투이기도 하다. 주체가 퇴조한 동시대 젊은 시인의 움직임 중에서 황인찬의 시는 돋보이는 사유와 감각을 보여 준다. http://ch.yes24.com/Article/View/29687

 

온갖 것들의 낮

그러나 미세하게 , 유계영의 시는 조금 더 회화적이며, 조금 더 불안하고, 조금 더 어긋난다. 나는 이 세부들이 조금 더 읽 히고 조금 더 주목받고 조금 더 밀고 나가야 할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밀고 나간다는 문장의 주어는 물론 유계영이다. <온갖 것들의 낮>이 조금 더 일찍 나왔으면 어땠을까…. '한 아이는 반드시 백발로 태 어날 겁니다'(시 '백발' 중에서) 같은 문장 참 좋다. http://media.daum.net/life/outdoor/leisure/newsview?newsId=20151216161505869

 

 

     

 

 

     

 

 

어린 당나귀 곁에서

고향의 토속어와 일상 언어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언어감각이 일품이다. 작고 여린 것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여기는 시인은 낮은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삶의 소소한 풍경들을 따뜻하고 섬세하게 그려낸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고,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가련한 생명들을 사랑과 연민으로 품어 안는다. 그럼에도 시인은 정치적인 시편을 시집에 함께 실었다. 새로운 형식의 시적 정치성이 묻어난다. http://news.mk.co.kr/newsRead.php?no=1224612&year=2015

 

서정시의 위기가 운위되는 세태에 김사인의 시들은 여전히 서정의 몫이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웅변한다. 인간과 사물의 특징을 따뜻하면서도 섬세하게 포착하는가 하면,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불교적 정신 세계가 공존하는 것이 또한 이 시집이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23456.html

 

 

생활이라는 생각

이현승 시인(2002년 ‘문예중앙’으로 등단)의 세 번째 시집 ‘생활이라는 생각’은 “절박한 삶”에 얽매여 세상 밖으로 망명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부끄러움을 찾아 떠나는 한 운명론자의 기록이다. 현실에 머무는 것은 생활이고, 떠나고 싶은 것은 생각이다. 그런데 그의 생각은 생각에 그칠 뿐이다. 결여의 상태인 것. 그에게 생각이란 현실회피가 아니라 몸과 마음이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하나의 강박”(‘이동’)이다. 그리고 “어디쯤에서 돌아온 자리를, 또 떠나온 자리를 보”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그가 “떠나지 않는 이유는 여기가 이미 바깥”이고, “참으로 이기지 못하는 것은 생활”(‘생활이라는 생각’)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5111719080533326&outlink=1

 

개천은 용의 홈타운

늦깎이로 등단했음에도 어느덧 시력 사반세기에 이른 최정례(사진)가 자신의 여섯번째 시집에서 심드렁한 어투를 자주 구사하는 것이 시 쓰기에 대한 권태와 염증의 발로는 아닐 터이다. “나는 시 같은 걸 한편 써야 한다”(<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라거나 “어떤 시는 오래 공들여도 거기서 거기다/ 억울한 생각이 드는데 화를 낼 수도 없다”(<동쪽 창에서 서쪽 창까지>) 같은 구절은 차라리 시적 갱신을 향한 의지와 모색의 증거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행갈이가 주는 긴장과 여백 효과를 포기한 채 때로는 자유연상을 방불케 할 정도로 분방하고 방만한 산문투의 진술들은 사실은 세계의 비참과 인간의 한계에 대한 치열한 고투의 결과로 읽어야 마땅하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771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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