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의 스커트
스티븐 F. 아이젠만 지음, 정연심 옮김 / 시공사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제목을 보고는 '고흐의 구두'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 보다 이 책은 학술서적에 가까운 책이다. 고갱을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돌아본다. 덕분에 고갱에 대한 새로운 축이 하나 발견되는 셈이다.

 

고갱은 그의 그림과는 달리 그의 타히티 예술로 인해 많은 연구자들의 비평대상이 되었다. 고갱을 비판하는 요지는 다음과 같다. "활기차고 영웅적이며, 독창적이고 탁월한 예술로 무장했던 고갱은 도덕적인 중산층의 위선과 유럽 남자의 성적인 방탕, 서구 회화의 보수성을 보여주었다." 고갱 본인은 타히티에서 원시의 세계를 그렸다고 하지만 타히티에서의 그의 행동은 유럽인의 행동과 다를바 없었고, 타히티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 세계에 녹아들려 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고갱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다. 애초에는 고갱도 이국적 취미에서의 원시성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타히티에서의 생활에서 문명에 의해 파괴되는 원시성을 발견하며 근대국가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고 말한다.

" '곧 마르케사스 사람들은 코코넛 나무를 탈 줄도 모르며, 야생 바나나를 찾으러 산에 올라가지 못할 것이네. 학교에 갇힌 아이는 이제 잘 뛰지 못하며, 품위유지를 위해 옷을 입은 아이는 단정하게 변해 산에서 밤을 지내지 못하네. 이제 모두 신을 신고 다니기 때문에 발은 부드러워지고 거친 길 위를 달리지 못할 뿐더러 돌을 짚고 급류를 건너지 못할 정도야. 우리는 인종의 멸종을 구경하지. 대부분 수은으로 파괴된 불임의 허리와 난소를 갖춘 채, 결핵에 걸릴 지경이야'

  죽기 직전에 쓴 이 글에서 고갱은 인종과 착취에 관한 변증법적인 관계를 잘 이해했다. 당시 제국주의는 '물질'이자 '문화적 억압'이었고, 이 두 개념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그리하여 학교, 의복, 태도와 같은 문화적 영역은 원주민의 신체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었다. ... 마침내 고갱의 관점은 인종주의의 이국취미에서 원시주의로 변한다. 이 원시주의자는 이국적인 폴리네시아 문화를 직접 체험하며 예전에 자신이 속했던 근대 국가와 국민을 비판적 관점으로 바라본다."(93쪽)

 

그렇다고 고갱이 타히티 원주민들의 대 제국주의와의 싸움에 선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제국주의의 편에 설 수도 없었다. 타히티에서 그는 점차 타히티를 이해하게 됐고, 반대로 근대국가의 문제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이 고갱의 스커트인 것은 바로 그런 양자 속에서의 고갱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이는 타히티의 독특한 젠더, 남녀를 구분할 수 없었던 타히티의 독특한 성문화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처음엔 고갱의 스커를 고흐의 구도와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다. 고흐의 구두가 고흐가 마음썼던 고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삶이라면 고갱의 스커트는 원시와 그 원시를 사랑했던 고갱을 뜻한다. 문명국이었던 프랑스에서는 계산적이었던 그가 타히티에서는 원시적으로 바뀐 것이 바로 고갱의 스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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