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가니를 통해 장애인, 사회복지 문제가 새삼 대두되고 있다. 광주 인화학교와 같은 문제는 사실 오래된 문제이다. 언론에서도 많이 다루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묻히고 말았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서 사회복지라는 탈을 쓴 그들의 악랄함이 드러났고 사람들은 분노했다. 당시 책으로 나오면서 잠깐 이슈화가 되었지만 영화화 되면서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되었다.
광주 인화학교 말고도 에바다 농아학교, 성립재단 등이 문제가 되는 대표적 사회복지 법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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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회복지 법인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무현 정부는 사회복지법인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는 법안을 만들려고 했지만 한나라당의 거센반대의 부딪혔다. 대표적으로 한나라당의 고경화의원, 김충환 의원 등이 반대했다. 그들은 도가니 사건을 두고 국민앞에 나와 사죄 해야 할 것이다.
정말 몰랐다고?'도가니'의 '불편한 진실' ← 기사클릭
노무현 정부 만들려 한 '도가니 방지법' 반대한 한나라당 의원들은 바로... ← 기사클릭
장애인에 대한 정책은 한 사회의 복지 수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이다. 우리사회는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장애인을 걸림돌인 존재로 여겨왔다. 고려, 조선사회에서도 관심의 대상이었던 장애인은 현대사회 특히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없어져야 할 존재가된 것이다. 지금은 어떠한가? 이명박, 오세훈이 서울시장이던 시절 서울시청사와 시청역 주변에서는 농성중인 장애인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장애인에 대한 정책을 호혜성이라며 그 혜택을 줄여갔던 장본인들이었다. 복지문제를 논하면서 망국을 이야기하지만 고려, 조선시대보다 못한 그들의 생각은 너무 구식이다. 장애인에 대한 이덕일의 글이 중앙일보에 실렸었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 왔다가 돌아가는 아들 ‘학유(學遊)에게 노자(路資) 삼아 집안의 계율을 써 주는데[贐學遊家誡]’ 여기에 옛날 선왕들이 사물을 활용하는 지혜가 있었다면서 장애인 등용 방식을 설명했다. 즉 “맹인에게는 음악을 관장하게 하고, 다리를 저는 사람에게는 대궐문을 지키게 하고, 환관(宦官)들에게 궁궐 안을 출입하게 하고, 다른 여러 장애인들에게도 모두 적당한 임무를 맡겼다”면서 “그 이유를 깊게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왕정(王政)이 제대로 펼쳐지는지는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를 뜻하는 환과고독(鰥寡孤獨)과 장애인 정책 여부로 판명 났다. 장애인 우대 정책은 조선보다 고려가 더 나았다. 고려 성종(成宗)은 재위 10년(991) 10월 서도(西都·평양)에 행차하면서 민정을 살펴 “중병이 든 자[篤疾]와 장애인[癈疾者]에게 약을 내려 주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예종(睿宗)도 재위 원년(1106) 9월 80 이상 노인과 의부(義夫)·절부(節婦)·효자·순손(順孫) 같은 의행자들과 함께 환과고독과 중병 든 자, 장애인을 대궐 마당으로 초청해 직접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하사했는데, 이런 기록이 많다. 그래서 성호 이익(李瀷)은 ‘고려 때의 진휼정책[高麗賑政]’에서 “환과고독은 모두 관에서 구휼하고 이외에도 온갖 장애인도 모두 국가에서 부양했으니 백성들을 우대하는 정사가 지금(조선)에 비해 조금 나은 정도가 아니었다”고 높게 평가하고 있다 .'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1/10/07/6007456.html?cloc=olink|article|default
장애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한 활동가가 있다. 김도현이다. 장애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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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 뼈아픈 말이다. 아프리카 끔찍한 흑인 노예무역 역사를 읽다 보면 닮은 생각이 절로 난다. “아프리카가 엉망진창이어서 유럽 제국주의에 당한 게 아니라, 유럽 제국주의에 당했기 때문에 아프리카가 엉망진창이 됐다.” 우리 근현대사에도 적용할 수 있다. “조선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일제 식민지가 된 것이 아니라, 일제 식민지가 됐기 때문에 조선이 형편없는 나라가 됐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형편없었기 때문에 나라가 분단당한 것이 아니라, 미국 소련이 우리나라를 분단했기 때문에 우리가 형편 무인지경이 된 것이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05541.html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
'장애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접근을 담은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가 나온다. 북유럽 출신 인류학자인 베네디크테 잉스타와 수전 레이놀즈 화이트가 쓴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은 오랫동안 장애인 차별철폐 운동의 현장에서 일해 온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 김도현(37·사진)씨다. 학교가 아닌 현장에서 장애학을 배우고 고민해 온 활동가로서, 그는 이전에도 몇 권의 저작을 통해 장애학 담론의 필요성을 제시한 바 있다.
29일 만난 김씨는 “장애학 담론 소개라는 벅찬 작업에 착수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장애 차별에 맞선 사회운동에 필요한 담론적 기반을 찾는 것이다. 여성운동이 여성학 담론을 부르고 그 담론이 다시 여성운동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처럼, 장애운동도 담론과의 상호작용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장애운동·담론은 여러 이유로 그런 상호작용을 본격적으로 겪지 못했다고 그는 진단한다.
두번째 목적은 장애 문제를 장애인의 문제라고 치부하고 낯설게만 대하는 사회에 대해 확장된 고민과 소통을 제안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다움’이란 과연 무엇이냐 하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 고민을 놓고, 결코 장애 문제를 생략하거나 우회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우리가 사는 사회를 풀이하고 인간다움이 뭔지 밝히는 일에서 “장애는 중요한 연결점이자 매개점”이라고 했다. 컬렉션 출간은 떨어져 있던 장애-비장애의 연결고리를 다시 복구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학의 주요 내용은 무엇인가? 여성학에도 다양한 성격과 견해의 담론들이 있는 것처럼, 장애학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 따라서 컬렉션에서도 다양한 견해와 방법을 담은 책들이 소개될 예정이다. 그 가운데에서 굳이 하나의 일관된 흐름을 찾자면, “장애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관점으로 다룬다는 것”이라고 김씨는 말했다. 곧 ‘장애는 만들어진 개념’이자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억압’이라는 인식이다.
우리가 아는 장애란 개념은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발달과 연관되어 나타났다고 한다. 자본주의 이행기에 공장제 노동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부랑인들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이들의 ‘훈육’을 맡았던 국가가 이들을 분류·관리하는 과정에서 ‘일할 수 없다고 판단된 사람’(the disabled bodied)이라는 기준을 적용하게 됐다. 이것이 근대적 장애 개념의 시초라고 한다. 그 뒤 이들에게 사회적 배제·격리가 가해졌고, 이들을 다시 노동하게 만드는 ‘재활’이란 개념도 등장하게 됐다는 것이다. 문화인류학적 접근인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는 아프리카, 아시아, 북유럽, 미국 등 다양한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장애의 저마다 다른 양태를 보여준다. 신체의 일부나 전부가 불완전하다는 ‘손상’의 개념이 손상을 지닌 사람을 사회 활동으로부터 배제시키는 ‘장애’라는 개념으로 확장되고, 그런 낙인 효과에 의해 인간 존재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구조화된다. 이런 방식으로 장애를 둘러싼 역사, 문화, 사회적 관계 등을 두루 읽어내는 것을 장애학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470734.html
장애학 함께 읽기
'말이 나온 김에 우리 사회가 장애에 관해서 얼마나 찌질한 사회인지 떠들어 보자. 왜 찌질하다고 하냐면 저열함을 감추기 위해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는데, 그 포장지가 너무 천박하기에 하는 말이다. 우리나라 곳곳에는 아직도 장애인의 집단 거주지가 있다. 시설이라고 하는 곳이 그것인데, 가끔 비인간적 운영 실태가 보도되곤 한다. 그런데 언제나 사건은 운영자와 관리자의 개인 비리, 그것에 대한 분노, 그걸로 끝난다. 장애인들을 왜 그런 시설에 격리 수용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논의조차 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장애인들이 사회 속에서 같이 살아나가려면 이 사회의 구조가, 사회 구성원의 생각과 매너가 바뀌어야 하는데, 바로 그 비용 감당이 싫어서다. 시설에 두면 일단 내 눈앞에서 들어가는 비용과 노력이 없어도 되고, 그렇게 되면 장애는 오로지 장애를 가진 자, 그들만의 문제에서 멈춘다. 그래서 장애 운동 하는 사람들은 '탈시설'을 외치지만, 비장애인들은 두려워한다. 왜 나오려고 해? 그냥 그 속에서 편하게 살아, 걸리적거리지 말고, 이렇게 말이다.
간혹 기특하게도 어떤 종류의 장애인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주목하는 장애인들은 대개 스스로의 장애를 극복하고(혹은 부모가 극복시키고) 비장애인에 근접한 기술과 기능을 익힌, 의지의 인물들이다. 그래서 장하다고 상도 준다. 여당 국회의원도 장애극복상이라나 뭐라나를 만들어서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을 국회로 초청해서 행사를 벌였었다. 그 행사 주체의 하나인 나모라는 의원도 장애아의 부모였다는 점에서 어이가 없었다.
장애인과 장애인 가족들은 누구도 장애인이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진정 극복되어야 하는 것은 장애인 살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회이지 장애를 가진 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애를 극복하라는 말은, 장애가 곧 자기결함이라고 인정하라는 윽박지름과 같다. 장애인이 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장애를 극복해내야 하는가. 이런 기본적인 의문도 갖지 않았었다는 말이니, 이는 장애부모의 임무와 사회인의 책임 둘 다를 저버린 것이다.
비장애인들이 자기들만의 출발선을 그어놓고는 바로 거기서부터 자기들은 출발하면서, 장애인한테는 그 출발선까지 가는 게 목표여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왜 자기조건을 극복하고 이른바 일반인(그들만의 표준인을 말하는 것이겠지)처럼 살기가 목표여야 하는가 말이다. 이래서 웃긴다는 말이다. 그 인간 표준이라는 거. 낡아빠진 우생학적 발상 아닌가. 상품성에 미달되니 솎아내고자 하는. 비장애인들의 출발선까지 가기 위해 장애인들은 자신의 존재와 무관한 헛땀을 쏟아야 한다.
나는 그것은 비본질적 노동이라고 부르고 싶다. 내 존재를 풍요롭게 하는 일과 상관없는 허상의 포장을 위한 헛땀 말이다. 금칠 범벅한 고층 빌딩이 강줄기를 차고 세워질 때, 수초 우거진 아름다운 강변이 시멘트 길로 메워질 때, 밤새도록 현란한 조명이 한강다리에서 번쩍일 때, 아, 삶의 터전이던 온 나라가 저들의 돈놀이와 유원지로 변해 가는 것을 볼 때, 그것들을 위해 내 땀과 내 수고가 얼마라도 쓰였구나 하고 생각하면 억울하기 짝이 없다. 바로 그게 비본질적 노동이 아닌가. 장애인들에게 자기 조건을 극복하고 표준화된 이 사회에 적응해서 네가 해야 할 몫의 노동을 하라는 것도, 바로 그 헛땀을 강요하는 셈법에서 나온 것이다.
다소 감상적인 이러저러한 내 소박한 장애관(이라고 말하니 좀 쑥스럽기도 하지만)이 바야흐로 '이론 학습'을 통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기회를 가졌다. 김도현의 책 <장애학 함께읽기>를 접하면서 장애학이라는 분야가 따로 있으며 그것은 여성학처럼 여러 분과를 통섭하는 학제적 의미를 갖는 분야로 있어야 하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장애 자체에 대한 논의가 사회복지학, 특수교육학, 의학 내에 분산되어 있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도 장애 문제가 체계성을 갖고서 논의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늦었지만 이론적 기반과 실천운동의 기반을 제공하는 독립적 체계로서 장애학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때이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1017073634&Section=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