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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쓸쓸한 전화 ㅣ 시작시인선 10
한명희 지음 / 천년의시작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2003년에 읽은 시집중에 한권만 고르라면 나는 한명희시인의 <두 번 쓸쓸한 전화>를 주저없이 선택할 것이다. 이 시집을 읽게 된 계기는 한겨레신문의 났던 신경림 시인의 칼럼때문이다. '낯선 시인 새로운 시 정말 즐겁다'라는 내용의 칼럼에서 신경림 시인은 '그 정서와 문법이 동시대의 다른 시인들과는 사뭇 다르다. 자기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모호한 내용이나 말을 교과서적으로 배운 시창작법에 따라 교묘하게 짜맞추어 독자를 현혹시키는 시들이 난무하는 판에, 정확히 할 말만 하고 일체의 장식을 배제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라고 평한다.
이 시집은 처음 책장을 넘길때 부터 심상치 않았다. 自序를 읽는 순간 편안히 읽으려던 마음새 고쳐잡고 긴장을 하며 꼿꼿한 심정으로 책을 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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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序
이 길 끝이 천길 낭떠러지라 해도
나는 이 길을 곧장 걸어갈 수밖에 없다
전진!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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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무지게 입 꽉 물고 써내려간 시집을 어찌 따뜻한 아랫목에 엉덩이 붙여두고 읽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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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안 써도 좋으니까
언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조카의 첫돌을 알리는
동생의 전화다
내 우울이, 내 칩거가, 내 불면이
어찌 시 때문이겠는가
자꾸만 뾰족뾰족해지는 나를 어쩔 수 없고
일어서자 일어서자 하면서도 자꾸만 주저앉는 나늘 어쩔 수 없는데
미혼,
실업,
버스 운전사에게 내어버린 신경질,
세번이나 연기한 약속,
냉장고 속 썩어가는 김치,
오후 다섯 시의 두통,
햇빛이 드는 방에서 살고 싶다고 쓰여진 일기장,
이 모든 것이 어찌 시 때문만이겠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
한번도 당당히 시인이라고 말해보지 못한 시
그 시, 때문이겠는가
'두 번 쓸쓸한 전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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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의 제목이 된 표제시다. 시인의 자화상 이라고 생각되는 시다. 문지나 창비에 여러편의 시집을 내고 시집의 인세도 어느정도 되고 문학한답시고 문화강좌를 통해 이래저래 소득을 갖는 유명한 시인이 아닌 문학을 천직으로 생각하는 문학도의 모습은 이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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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간의 대학 생활.
내게 남겨진 건 350만원
부채뿐이다
대학에 들어올 때
나는 할 말이 많았다
나 자신을 향해서 친구를 향해서 세상을 향해서
그러나 나는 지금 아무 할 말이 없다
'박사 이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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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함', '군더더기 없음' 한명희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떠 오른 단어들이다. 시를 읽으면서 삶에 대한 시에 대한 치열함을 대할 때 마다 마음의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책을 손에 들고 긴장을 한다는 것은 책과 씨름을 하는 것이다. 한 장, 한 장 가볍게 넘길 수 없고, 정신 바짝 모두고 독자를 대하는 책 앞에 나 또한 자세 고쳐앉고 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책과 씨름한다는 것은 참 즐거운 행복이다.
시들을 접하면서 시가 생활속으로 들어와 버린 느낌이다. 일과 문학이 분리되어 버린 것이 아니라 문학이 일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한명희 시인의 시 속에선 생활 하하나 하나가 시어로 다시 태어났다. 삶이시가 되어버렸다. 폼잡고 서서 남의 삶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삶에서 그 삶의 단어들이 꾸미지도 않은채 시가 되었다.
정말 치열하게 시를 한번 읽어보고 싶을 때 그 때 이 시집을 손에 들어본다면 치열하게 책을 읽는 즐거움을 느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