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주는 여자 명진 읽어주는 시리즈 1
한젬마 지음 / 명진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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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읽어주다>라는 말의 뜻을 모르고 있다. 아니, 읽어<주다 >라는 것은 고사하고, <읽다>라는 말의 뜻도 역시 모르고 있다. <읽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읽는다는 행위는 어떠한 대상을 자신의 감각과 의지를 동원하여 파악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읽기'는 흔히 '보기'와 구별된다. 보는 것은 1차적인 행위, 즉 즉물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에 비해서 읽는 것은 자신의 가치판단이 들어간다는 점에서 분명히 다르다.예를 들어, 어떤 글을 보고나서 '재미있다' 또는 '지루하다' 등의 말을 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글을 '보는' 행위가 된다. 그렇지만 그 글이 왜 재미있었는가, 혹은 왜 지루했는가를 이야기하는 순간, 그 행위는 <읽기>가 된다. 우리가 글 뿐만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 광고, 그림 등등에도 '읽기'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림을 읽고 있지 않다. <읽기>라는 행위의 출발은 텍스트 그 자체에 있다. (물론, 텍스트에서 출발하여 사회문제나 이데올로기의 문제로까지 확산되는 경우도 없지 않으나, 그런 경우라도 역시 출발점은 텍스트이다.) 이 책에서는 텍스트가 되는 그림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단편적인 미술사적인 정보를 제시하는데 그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그림을 <읽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단지 그림을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그림 자체와는 별반 관계도 없는 자신의 인생역정이나 단편적인 감상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 부분에 대해서라면, 별로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그림으로 표현되었더라면 또 모르겠지만, 글로 표현된 그런 부분들은 싸구려 수필집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처럼 <읽기>도 하고 있지 못하면서, 제목은 거창하게 '그림 읽어<주는> 여자'라고 달았다. 읽어<주다>라는 말은 무엇인가? 자신의 <읽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겠다는 의미이다. <주다>라는 말에서 교육적인 어감을 찾을 수도 있지만, 그것까지는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감상을 타인과 교류한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싶다. 이처럼 의미를 축소시킨다고 해도, 이 책의 오류는 사라지지 않는다.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저자는 너무나 개인적인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읽기>도 읽어<주기>도 되지 못한다. 그녀가 읽어주어야 할 것은 '그림'이지, 다른 사람의 인생역정도 별로 다르지도 않은 개인의 과거 따위가 아니다. (그런 것을 보려면, 연예인들의 수필집이나, 정치꾼들의 자서전을 보라. 그거에 훨씬 절절하고 감상적이면서도 파란만장한 인생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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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철도의 밤 - 미야자와 겐지 걸작선
미야자와 겐지 지음, 이선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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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고르게 된 이유는 표제작인 「은하철도의 밤(銀河鐵道の夜)」이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원작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렇게 심오하고도 묵시록적인 작품의 원작이 동화라는 점이 흥미를 자극했으며, '은하'와 '철도'라는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동화를 구축했을 지에 대한 궁금증이 내 선택을 부추겼다. 물론, 이 동화작품은 애니메이션의 내용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우선, 신비의 여인 '메텔'이 등장하지 않는다. ^^ 동화에서는 두 소년이 함께 여행한다.) 그러나 빈민가 출신의 소년이 은하철도를 타고 여행을 한다는 설정, 그리고 별에 들려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영향을 받는다는 구조, 그리고 정서적인 측면 같은 요소들은 공통된다. 이 작품을 제외하고 흥미로웠던 작품은 「쏙독새의 별」이다. 무엇보다 행복한 동화가 아니었기 때문인데, 그 동안 읽었던 동화들에 대한 불만을 잘 긁어주었다. 동화라고 해서 항상 착한 사람들의 행복한 이야기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세상은 전혀 행복하지 않은데, 왜 동화 속의 세상만 행복으로 가득한가? 아이들이 보는 작품이라고 해서, 거짓 행복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거짓된 행복보다는, 뼈아픈 진실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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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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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만의 작품세계는 그가 작품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예술의 세계 속으로 길을 잃은 시민'(「토니오 크뢰거」)이라는 말로 정리될 수 있다. 이 말은 독자들에게 두 가지 길을 보여주고 있는데, ⓐ 예술가의 길, 즉 유미주의적인 태도와 ⓑ 시민의 길, 즉 사회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태도라고 할 것이다. 수록작품의 목록을 살펴보면 그와 같은 두 가지 길이 극명하게 파악된다.

예술가의 길에 해당하는 부분은, 내게 있어 그리 큰 울림을 주지는 않았다. 그것은 예술에 대한 고민의 깊이가 부족하다거나, 그가 지나치게 유미주의적인 성향으로 빠졌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많은 고민을 하고 있고, 유미주의를 경계하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러한 부분에 동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이를 창작했을 그 시절과 그의 창작물을 읽는 내가 살고 있는 시절이 그만큼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리라. 시절은 너무 변했고, 그에 따라 그의 논리도 낡아바렸다. 특히, 예술가를 천재적인 영감에 의존하는 사람들이라는 견해에는 쉽게 동감할 수 없다. 물론 '천재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예술가는 그러한 천재성에 의해서 선천적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아니라, 그보다는 부단한 자기 단련을 통해서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시민의 길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의외의 재미를 찾을 수 있었다. 흔히 토마스 만은 나치에 동조했던 작가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동조했기 보다는 그것을 방조했다는 표현이 더욱 적합하다고 판단된다. 그의 초기 작품세계에는 현실에 대한 관심이 아예 부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도 역시 당시 독일사회에 만연되어 있던 인종차별적인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2번 인용 참고]) 하지만 이후 작품에서 그는 현실에 대해 눈을 돌리며, 파시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가 만들어내는 알레고리와 상징이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대목이다.

사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술가이면서 시민이라고 할 수 있다. 지상에 발을 붙인 채, 선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사람. 그것을 파악했다는 점이 이 작가의 위대한 점이고, 그 둘의 조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점이 그의 작품들의 빼어난 점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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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군화 - 한울사회문학시리즈 1
잭 런던 지음, 차미례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8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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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가지는 사회적인 가치는 대단하다. 또한 SF소설로서의 흥미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 그것은 바로 '재미'이다. 소설이 아무리 대단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장르적, 혹은 기법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소설의 기본이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책들이 시간의 압제를 견뎌내고 빛을 발하고 있다.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이 너무 뚜렷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많은 책들이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고도 경쾌한 발걸음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흥미를 끌지 못하는 이유는, 작품의 내부에 숨어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지적될 수 있는 이유는 과도하고 일방적인 설명이다. 물론 설명이 있다는 것 자체가 흠이 될 수는 없다. 어떤 책이든 등장인물의 의도(혹은 작가의 의도)가 설명되지 않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주장'으로까지 이어지면 문제가 생긴다. 이 작품의 많은 설명들은 많은 부분 주장에 닿아있다. 특히 사회주의 이론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대부분이 주장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동감되는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방적인 주장은 공감의 유무와 상관없이 버거운 법이다.

다음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일방적인 선악의 대립이다. 인간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는 것은, 분명한 폭력이고, 파시즘적인 논리이다. 동지 아니면 적, 사랑하는 사람 아니면 미워하는 사람. 이 작품도 이러한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이데올로기를 바탕에 두고 있는 작품들에서 흔히 발견되는 오류이다. 왜 이리도 다양한 인간들이 그러한 두 가지 유형으로만 나뉘어져야 하는가? 이 작품은 압제에 대한 저항을 다루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또 다른 압제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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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새 행복한 책읽기 4
이지현 지음, 김형준 그림 / 계림닷컴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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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의 동화는 야무지고 단단하다. 흔히 생각하는 동화의 이미지에 '야무지다'와 '단단하다'라는 설명이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동화 역시 <작가에 의해서 '잘' 말들어진 이야기>라는 기본을 다시 떠올린다면, 그와 같은 특성은 참으로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나라 문학의 여러 분야에서 아쉬운 점이 참으로 많지만, 동화라는 특수한 분야에서는 그 아쉬움이 더욱 커진다. 동화작가는 많이 양상되고 있지만 창조적인 작품은 별로 발표되지 못하는 상황, 외국 유명 작품의 아류작에 불과한 기획동화가 양산되고 있는 추세, 그리고 무엇보다 동화작가들의 작가의식 부재 등등, 참으로 우리의 아동문학계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생각할 때, 이지현의 동화는 참으로 야무지다.

동화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이다. 그러므로 작품도 아이들의 시각에서,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이 곧 함부로 작품을 쓰거나 유치한 생각의 조합이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른이기 때문에 간과하고 지나가는 문제들을 다루기에 '아이들의 시각'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삶의 진실들을 다루기에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측면을 잘 살려내고 있다. '어떠한 삶이 바람직한 삶인가?'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은 아이와 어른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세상살이에 물들어버린 어른보다, 상대적으로 순수한 아이의 시각이 더욱 올바른 해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동화는 어린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러한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동화는 아이들이 읽을 수 있고, 어른도 읽을 수 있는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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