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믿을 것인가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낡아버렸다. 그건 분명하다. 이젠 아무도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물론 종교가 있는 사람들은 많이 있고, 가끔씩 종말과 구원에 대한 논의도 계속되고 있다. 무엇보다 지하철역에서 들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신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은 낡은 것처럼 보인다. 논쟁도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정치적 대담이 있고, 각종 심포지움이 개최되고 있으며, 늦은 밤 TV에서는 각종 토론 프로그램이 난무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열정적으로 논쟁을 하는 사람은 낡아빠진 유행처럼 보인다.

왜 이런 것들이 낡아버린 것일까? 사실 그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예수가 태어난 시절이나, 논쟁을 통해 사람을 마녀로도 성자로도 몰았던 시절이나, 본질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구원받기를 원하고, 종말을 두려워하고,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것들을 낡았다고 한다. 무엇 때문일까? 아마 그것은 본질적인 것의 문제가 아니라, 성향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속도에 익숙해져버렸다. 천천히 산책하면서 하늘을 바라볼 시간은 없어지고, 철도와 비행기로 재빠른 여행에 익숙해졌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묵상을 할 시간은 없어지고, 만원버스에 시달리는 바쁜 출근시간에 익숙해졌다. 결정적인 것은 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신에 대한 이야기, 혹은 논쟁은 밝은 대낮보다는 어둠이 지배하는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촛불을 밝혀놓고 혼자 앉은 시간, 술자리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대화, 그리고 술취한 다음 날 아침에 밀려드는 자괴감, 이런 것이 고민과 논쟁을 만든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것이 없어졌다. 혼자 있는 밤이 사라져 버렸다. 인터넷, TV, 심야의 헬스클럽……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밤시간을 빼앗아 버렸고, 그와 함께 신에 대한 고민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논쟁도 사라져버렸다. 그런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의미를 가진다. 사라진 논쟁을 새롭게 부각시켰다는 점. 끝나지 않은 것을 끝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것, 사라지지 않은 것을 사라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것, 계속되고 있는 것을 계속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더구나 신을 믿는 사람들 혹은 믿지 않는 사람들, 둘 중의 어느 한쪽만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입장을 가진 두 사람이 논쟁을 벌였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 사람들이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인 에코와 차기 교황으로 거론되는 마르티니 추기경이라면, 이보다 막상막하인 상대가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 동안의 논의들이 가졌던 한계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토론이 꼭 결론을 맺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구나 이런 종류의 토론은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지만, 두 사람의 논의가 전혀 근접되지 못한 채 끝이 났다는 점이 가장 아쉽다. 사실 토론은 비슷한 패러다임을 가진 상황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법이다. 전혀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기준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토론은 주장의 반복에 그칠 뿐이 아닌가. 물론 입장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가치는 있다. 서로 다른 점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가치는 있다. 하지만 결론 맺을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면, 그래서 비슷한 말들의 반복이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질리게 된다.

이것이 사람들이 논쟁과 신에 대한 문제에서 멀어지게 된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책이야말로, 한계가 명확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런 문제가 가지는 한계로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런 한계를 뻔히 알면서도 이런 종류의 글을 계속 읽어야 하는가? 대답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래야만 한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므로. 다만, 이제는 조금 새로운 형식으로, 조금만 더 새로운 분위기의 책이었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불구경, 물구경, 싸움구경이라고 해도, 맨날 싸우기만 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어찌 유쾌하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콘돌리자 라이스
안토니아 펠릭스 지음, 오영숙 외 옮김 / 일송북 / 200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읽는 일은 흥미진진한 경험이다. 그 사람이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아왔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것은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동경, 일종의 대리만족이다. 독자들은 그들의 인생에 자신이 시도하지 못했던 부분을 투영시킨다. 나의 게으름 때문에, 환경 때문에, 소심함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일들을 그 안에 담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부분 때문에, 나는 휴먼스토리를 절반만 신뢰한다. 어찌 그들이라고 해서 게으름이 없었겠는가? 배경적인 한계가 없었겠는가? 소심하고 두려웠던 적이 없었겠는가? 그들이 사람이라면, 초인이었다면 혹시 모르지만, 그들이 사람인 이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다만, 전기의 작가들이 한계를 드러내지 않을 뿐이고, 그런 점에서 전기작가들은 역사를 왜곡한다. 물론 좋은 의미로 '취사선택' 혹은 '재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좋다 나쁘다의 판단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런 점에서 전기작가는 신문기자와 함께 가장 위험한 인물 중의 하나이다. 이 책도 이런 휴먼스토리의 범주에서 어긋나지 않는다. 백악관의 안보보좌관이자, 차차기 대권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콘돌리자 라이스>라는 인물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첫번째는 그녀가 부시 행정부라는 막강한 권력의 핵심에 위치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미국 공화당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힘을 통한 세계 제압>을 주창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가 아닌가? 그들의 뒤에 바로 그녀가 있다.
그녀는 뛰어난 전략가이다. 전략가는 승패에만 책임을 진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도덕이나 양심, 혹은 인간에 대한 애정 따위는 떠올릴 필요가 없는 말이다. 더구나 그녀와 그녀가 속해있는 미국 행정부처럼, '우리나라를 위해서, 우리 국민을 위해서'라는 주장까지 앞세운다면 더욱 그러리라.

하지만 미국인이 아닌, 오히려 그들이 앞세우는 '강력한 힘'의 희생자가 되기 쉬운, 분단의 나라 대한민국에 살고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논리가 달갑지 않다. 무엇보다 그들은 총을 쏠줄만 알지, 총을 맞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주목받는 두번째 이유는, 여성이면서도 전통적인 남성 중심사회인 백악관에 들어갔다는 것이고, 더구나 흑인 여성이면서 그랬다는 점이다. 인종차별은 참으로 뿌리 깊다. 그런 역경을 이겨냈으니 마땅히 휴먼스토리의 주인공이 될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쉬움이 남는다. 그녀가 인종차별과 편견을 이겨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 택한 방법은 그야말로 전통적인 백인남성사회의 방법이었다. 그녀의 가문이 내세우는 문구는 '두 배로 열심히!'라는데, 무엇을 열심히 한다는 말인가? 실제로 그녀는 열심히 했다. 미식축구, 피아노, 세계명작읽기, 피겨 스케이팅… 그런데 이것은 결국 백인이 되기 위한 조건들, 교양 있는 백인사회에 편입되기 위한 노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특별한 백인 사회에 진입한 특별한 흑인이다. 그녀는 특별한 사회에 들어가기 위해서 노력했다. 마치 초인처럼, 단 한번의 게으름이나 소심함이나 실패도 없이. 하지만 그녀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다시 누군가 그녀와 같은 길을 가고 싶어한다면, 그도 역시 그녀와 똑같은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은가? 하지만 노력을 해야 그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것이 불평등한 제도, 불합리한 구조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녀는 특별한 백인사회에 진입한 특별한 흑인일 뿐이다. 그녀가 성공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 성공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뒷면에서 또 다른 인물을 본다. 그녀는 특별해지고자 하는 욕망과 흑인으로의 정체성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과연 그녀에게는 그런 면이 없었을까? 평범한흑인이 되고자 하려는 욕망이. 어떤 것이 더 행복한 일일까? 과연, 어떤 것이 더 가치있는 일일까? 전략가적 선택으로야 콘돌리자 라이스가 옳다. 백번 옳다. 그러나 나의 이성의 동의하더라도, 감성을 쉽게 동의해주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안개는 참으로 매력적인 소재다. 작가라는 인간들이, 혹은 독자라는 인간들이 천형적으로 우울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또 모를까,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안개만큼 매력적인 소재도 있을 수 없다. 김승옥의「무진기행」에서의 안개가 그러했고, 한수산의「안개, 가시거리」가 그러지 않았던가? 또한 마이클 커티스 감독의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안개 자욱한 활주로에서의 이별 장면은 어떠했으며, 테오 앙겔로플로스의 영화 '안개 속의 풍경'에서 두 꼬마가 걸어야 했던 길가의 안개는 또 어떠했던가? 이 모든 작품들이 울림을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안개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매력적인 소재인 안개를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고 있다. 파멸을 뻔히 예감하면서도 브레이크를 잡을 수 없는 사람들의 심정, 증오와 애정이 함께 표현될 수밖에 없는 가족이라는 관계, 과거와 현재의 혼선, 결국에는 독백이 되어버리고 마는 대화. 이런 것들을 표현하는데, 안개는 탁월한 배경일 수밖에 없다. 작가의 카리스마는 결국 작품에 대한 장악력이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유진 오닐의 이 작품은 카리스마가 넘치는 작품이다. 요즘에는 이것처럼 시종일관 독자/관객을 압도하는 작품이 많이 나오지 않지만, 그래서 더욱 신선한 독서경험이었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 그러나, 내 가슴은 너무 겁이 많고, 내 손은 너무 무디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첨성대와 아기별똥 - 청동거울 어린이 10
조태봉 지음, 한현주 그림 / 청동거울 / 200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흔히 동화(童話)라고 하면 밝은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 행복한 이야기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조태봉의 동화가 그려내고 있는 세상은 밝지도 아름답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그의 동화 속에는 죽음과 상실의 그림자가 깔려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는 첨성대가 그러하고, 새끼들을 잃어버린 어미 고양이가 그러하며, 성수대교 붕괴 사건으로 외동딸을 잃어버린 아줌마가 그렇다. 부모님을 잃고 할아버지까지 돌아가신 아이가 있으며, 할머니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손녀딸도 있고, 자신을 만들어준 아이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종이비행기도 있다.

이런 인물들이 등장하고 담고 있으니, 밝고 행복한 이야기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그만큼 작가의 세계관은 비극적이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구태여 비극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다른 동화들처럼 적당한 포장이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동화에는 교훈성이 담겨져 있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짓을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힘겹고 슬픈 세상을 애써 감출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짓이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이란 어딜 둘러보아도 밝고 행복만 가득한 곳은 아니니까.

아이들에게 거짓 낙원의 꿈을 심어주기 보다는,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만들어주는 일이 더 시급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실과 밀접하게 닿아있는 그의 작품들은 의미를 가진다. 이것이 앞으로 우리의 창작동화가 지향해야 하는 부분이라고도 판단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들이 암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비록 슬프기만 한 세상이지만, 작가는 그것을 뛰어넘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거대한 세상의 논리에 맞서는 작은 것들끼리 주고받는 사랑이다.

늙은 첨성대를 위해서 불꽃놀이를 준비하는 아기별들, 새끼 잃은 어미 고양이를 위해 함께 달려가는 동물원의 동물들, 딸을 잃은 슬픔을 비둘기를 보호하는 정성으로 이겨낸 아줌마, 할아버지의 무덤가에서 울고 있는 아이에게 손을 내미는 이웃집 아줌마, 죽은 할머니가 만들어놓은 수의를 '날개옷'이라고 표현할 줄 아는 손녀딸, 마지막 힘을 다해서 병든 소녀에게 날아가는 종이비행기.

이들의 힘은 너무나 작고 초라하다. 이런 노력을 한다고 해서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작은 것들끼리의 사랑은, 적어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변화시킬 수는 있다. 슬픈 세상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될 수는 있다. 밝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는 없지만, 그렇지 않은 세상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는 있다.

이 작품집에 포함된 이야기들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 때문이다. 이렇게 힘겨운 시대에 과연 동화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삶은 힘겹지만, 세상은 슬프지만,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 비록 그 희망이 작고 초라하지만, 그것들이 모여서 세상을 견뎌내는 힘이 된다는 것.

동화는 아이들을 위한 글이지만, 유치하기만 한 글이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들처럼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더욱 큰 힘을 발휘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궁
구광본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눈 앞에 산을 두고 있다는 것은 불행하면서도 행복한 일이다. 산이 높으면 높을 수록, 험란하면 험란할 수록 더욱 그렇다. 이 작품 앞에는 두 개의 산이 버티고 서있다. 하나는 이상(李箱)이고, 다른 하나는 박상륭(朴常隆)이다. 모두 호락호락 넘어갈 수 있는 산들이 아니다.

우선 이상이라는 봉우리를 살펴보자. 우리 문학사에서 이처럼 매혹적인 작가는 찾기 힘들다. 발표했던 거의 모든 작품이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의 행적 하나하나가 스캔들이었다. 이런 인물이기에 그를 다룬 작품도 많이 발표되었다. 그러므로 이상을 소재로 삼아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인물을 새롭게 조명하는 작업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전에 발표된 작품들과 비교되는 것이며, 이전 작품들의 성과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부담을 내포한다. 더구나 더이상 이상에 대한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낯선 이야기가 되지 못하기도 한다.

작가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뛰어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 노력이 성공했는가? 안타깝게도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같다. 이상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의 생애를 몇몇 인물들로 분할하여 제시하는 수법도 획기적이라고 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이상을 현대의 시공간에 위치시킨 수법이 문제다. '이상'이 가장 큰 매력을 발휘하는 것은 역시 전통과 근대가 충돌하는 지점이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이상은 모던한 인물이지, 포스트모던한 인물은 아니다.

뒤에 붙은 해설들은 이 작품에 '포스트모던'이란 꼬리표를 붙여놓았다. 그런데 과연 이 작품이 포스트모던한 지 모르겠다. 기독교-불교의 세계가 하나의 축을 이루고, 맑시즘이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 과연 포스트모던이 될 수 있을까? 포스트모던의 기법에 해당하는 것은, 중간중간에 끼어드는 작가의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작품에서 사용되는 각주는 작품의 의미를 확장시키거나, 소설의 허구성을 밝히려는 명백한 의도를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에 달린 각주는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고, 독서를 방해하는 잔소리가 되고 말았다.

포스트모던 기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포스트모던한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법은 어디까지나 기법일 뿐이다. 카메라를 메고 거리를 뛰어다닌다고 해서, 왕가위와 같은 영화를 찍을 수 없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작가가 어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세계인식이 포스트모던한 것이라면 자연스럽게 그런 기법이 활용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그런 기법을 사용하더라도 포스트모던이 될 수 없다.

다음은 박상륭이라는 봉우리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리나라에서 종교에 대한 글을 쓰려면, 그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실제로 많은 작가들이 박상륭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발표했고, 스스로 밝히지 않아도 그랬으리라는 혐의를 받기 십상이다. 구광본의 경우도 그렇다. 이 작품의 결말부에서 박상륭의 영향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동자승이며 노승이고 어린이며 늙은이인 인물 설정, 그들의 태도며 말투, 그들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모두 박상륭 소설의 그것들과 다르지 않다. 작가가 박상륭의 영향에서 벗어난 부분은, 맑시즘에 대한 해석이다. 하지만 이를 예수와 결합시킨다던지, 불교적 가르침을 통해 결말을 유도하는 수법은, 역시 박상륭의 것과 같다.

물론 한 작가에게서 다른 작가의 영향을 찾아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접근이다. 세상의 그 누구도 타인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완전한 독창성이란 존재할 수 없으므로. 문제는 다른 사람의 영향을 얼마나 내 것으로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부족한 것도 그런 부분이다. 이상과 박상륭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온전한 자기 것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

선배 작가는 넘어가야 하는 봉우리가 되는 법이다. 봉우리를 넘어선 자만이 또 다른 봉우리가 될 수 있다. 그런 작업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이 모든 창작자의 숙명이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