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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구광본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눈 앞에 산을 두고 있다는 것은 불행하면서도 행복한 일이다. 산이 높으면 높을 수록, 험란하면 험란할 수록 더욱 그렇다. 이 작품 앞에는 두 개의 산이 버티고 서있다. 하나는 이상(李箱)이고, 다른 하나는 박상륭(朴常隆)이다. 모두 호락호락 넘어갈 수 있는 산들이 아니다.
우선 이상이라는 봉우리를 살펴보자. 우리 문학사에서 이처럼 매혹적인 작가는 찾기 힘들다. 발표했던 거의 모든 작품이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의 행적 하나하나가 스캔들이었다. 이런 인물이기에 그를 다룬 작품도 많이 발표되었다. 그러므로 이상을 소재로 삼아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인물을 새롭게 조명하는 작업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전에 발표된 작품들과 비교되는 것이며, 이전 작품들의 성과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부담을 내포한다. 더구나 더이상 이상에 대한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낯선 이야기가 되지 못하기도 한다.
작가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뛰어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 노력이 성공했는가? 안타깝게도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같다. 이상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의 생애를 몇몇 인물들로 분할하여 제시하는 수법도 획기적이라고 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이상을 현대의 시공간에 위치시킨 수법이 문제다. '이상'이 가장 큰 매력을 발휘하는 것은 역시 전통과 근대가 충돌하는 지점이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이상은 모던한 인물이지, 포스트모던한 인물은 아니다.
뒤에 붙은 해설들은 이 작품에 '포스트모던'이란 꼬리표를 붙여놓았다. 그런데 과연 이 작품이 포스트모던한 지 모르겠다. 기독교-불교의 세계가 하나의 축을 이루고, 맑시즘이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 과연 포스트모던이 될 수 있을까? 포스트모던의 기법에 해당하는 것은, 중간중간에 끼어드는 작가의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작품에서 사용되는 각주는 작품의 의미를 확장시키거나, 소설의 허구성을 밝히려는 명백한 의도를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에 달린 각주는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고, 독서를 방해하는 잔소리가 되고 말았다.
포스트모던 기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포스트모던한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법은 어디까지나 기법일 뿐이다. 카메라를 메고 거리를 뛰어다닌다고 해서, 왕가위와 같은 영화를 찍을 수 없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작가가 어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세계인식이 포스트모던한 것이라면 자연스럽게 그런 기법이 활용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그런 기법을 사용하더라도 포스트모던이 될 수 없다.
다음은 박상륭이라는 봉우리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리나라에서 종교에 대한 글을 쓰려면, 그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실제로 많은 작가들이 박상륭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발표했고, 스스로 밝히지 않아도 그랬으리라는 혐의를 받기 십상이다. 구광본의 경우도 그렇다. 이 작품의 결말부에서 박상륭의 영향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동자승이며 노승이고 어린이며 늙은이인 인물 설정, 그들의 태도며 말투, 그들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모두 박상륭 소설의 그것들과 다르지 않다. 작가가 박상륭의 영향에서 벗어난 부분은, 맑시즘에 대한 해석이다. 하지만 이를 예수와 결합시킨다던지, 불교적 가르침을 통해 결말을 유도하는 수법은, 역시 박상륭의 것과 같다.
물론 한 작가에게서 다른 작가의 영향을 찾아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접근이다. 세상의 그 누구도 타인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완전한 독창성이란 존재할 수 없으므로. 문제는 다른 사람의 영향을 얼마나 내 것으로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부족한 것도 그런 부분이다. 이상과 박상륭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온전한 자기 것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
선배 작가는 넘어가야 하는 봉우리가 되는 법이다. 봉우리를 넘어선 자만이 또 다른 봉우리가 될 수 있다. 그런 작업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이 모든 창작자의 숙명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