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리스트의 파라솔
후지와라 이오리 지음 / 동방미디어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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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에서, 아니 모든 이야기에서 매력적인 캐릭터를 창조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만큼 매력적인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매력적인 인물들의 매력적인 삶을 엿보기 위해서 이야기를 읽고, 보고, 듣는다.

특히 그 이야기가 추리소설일 경우에는 캐릭터 창조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된다. 추리소설이야 말로 매력적인 인물들의 매력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이 경우의 매력은 악당으로의 매력일 수도 있고, 정의의 수호자로서의 매력일 수도 있다).

마치 소설 속의 인물들이 그런 변화를 겪었던 것처럼, 추리소설 속의 인물들도 같은 변화를 거쳐 왔다. 즉, 추리소설의 주인공들은, 슈퍼맨적인 영웅호걸의 모습에서, 음울하고 냉정하고 이기적인 탐정으로, 샐러리맨과 별다를 것 없는 형사로, 그리고 탐정도 형사도 아닌 평범한 인물로 변화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몇몇 사람들의 영웅적인 활약에 의해 좌우되었던 시스템에서, 철저히 기계적으로 통제되는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사회구조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즉, 현실 속의 수사현장이 과학화되고 분업화되고 전문화되는 것에 맞추어, 추리소설의 주인공들도 변화되었던 것이 아닐까? 결국 소설이라는 것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추리소설은 그 중에서도 범죄와 미스테리를 전문적으로 비추는 거울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추리소설에서 매력적인 인물은 추적자 역할을 하는 주인공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상대자 역할을 하는 범죄자도 역시 매력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괴도신사 루팡를 기억하고, 엽기적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 박사를 기억하며, 급진적인 테러리스트 인민군 장교 박무영을 기억한다. 그들은 분명히 범죄를 저지르고 있지만,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고, 심지어는 매력을 느끼기까지 한다.

정의를 지키려는 자에 대한 동경과 파괴하려는 자에 대한 동경. 그것은 분명히 상반되어 있지만, 동일한 감정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다. 추리소설이야 말로 우리 안의 천사와 악마가 사투를 벌이는 아마겟돈의 현장이다.

이처럼 좋은 추리소설이 되기 위해서는 선과 악, 두 편의 인물들이 모두 매력적이어야 한다. (물론 아서 코난 도일의 허락을 받았던 것은 아니고, 모리스 르브랑의 의해서 만들어진 이야기이지만) 루팡과 홈즈의 대결이 추리소설 독자들에게 인기를 모으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선과 악의 두 편이 모두 매력적으로 만들어지지는 못했다. 추적자에 해당하는 가쿠치의 매력은 충분하지만, 그의 반대편에 해당하는 구와노는 상대적으로 매력이 떨어진다. 즉, 인물들 사이의 균형감각이 유지되지 못했던 것이다.

알코올 중독자이면서 바텐더인 가쿠치, 그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폭탄테러에 연루되어 도피생활을 하는 인물이고, 테러의 목격자이면서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탐정 역할을 한다. 그의 과거와 현재는 천천히 드러나며, 그렇게 때문에 충분한 매력을 보여줄 수 있었고,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구와노의 경우는, 과격파 학생운동가면서 테러리스트이고 대기업의 전무이기까지 한,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는 여지를 가진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체가 후반부에 집중적으로 노출되고, 자신의 독백을 통해서만 일방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공감도 얻지 못하고, 매력도 얻을 수 없었다.

역시 중요한 것은 구상뿐만이 아니다. 그러한 구상을 어떻게 표현해낼 수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다.

상상하는 것은, 떠올리는 것은, 말로 토해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 사람이 바로 작가이고, 그 표현능력이야 말로 작가의 능력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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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횡단 특급
이영수(듀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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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독창성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독자들은 여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원한다. 설령 그것이 기존의 이야기들을 재구성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독자들이 원하는 것은 낡은 이야기를 새롭게 보이게 만드는 작가의 노력이다.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들이 가지는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낯설지가 않다.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것 같은 내용, 어느 영화에선가 보았던 것 같은 상황, 어느 만화에선가 다루어진 것 같은 장면들만이 그득하다.

물론 나는 이 작가에게 표절의 혐의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 혹은 그들의 상상력은 일종의 스테레오타입(stereotype)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새로운 미래를 창조해내지도 못했으며, 인류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하지 못했고, 미래 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응도 묘사하지 못했다.

(이렇게 쓰고 나니 설명이 너무 거창해져 버렸다. 보다 쉽게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첼로」라는 작품에서 작가는 인간과 로봇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사랑은 아이작 아시모프가 설정한 로봇의 세 가지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다. 거장의 상상력에 기대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작품의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타인의 상상력을 활용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이 상황을 보다 깊이 있게 고민했다면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상상력에 기대어 상황을 만들고서, 그 상황을 고민하지 않은 채 타인의 상상력을 통해서 해결하고 있으니, 이 이야기는 낡고 낡은 이야기의 새로운 버전에 지나지 않게 될 수밖에.)

작가는 새로운 상황을 만들지 못했다. 상황이 낯익은 것이라면 그 상황을 풀어가는 서술기법, 묘사, 캐릭터, 대화 등등을 낯설게 만들어도 새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작가는 그러지 못했다. 그의 상상력이 낯익은 것들로 가득한 것처럼, 그의 이야기 방법도 익숙하기 짝이 없는 것들뿐이다.

더구나 작가는 대중문화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거의 날 것으로 토해내고 있다. 이런 서술방법이 때로는 좋은 효과를 내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히즈 올 댓」이란 작품에서는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구성은 현학적인 자기과시 이상은 되지 못했다.

작가는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기 보다는, 독자들이 만족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일에 더 주력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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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도둑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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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다. 일본 작가들의 감수성은 지극히 얇다. 이런 식의 설명이 가능한 것일까? 이런 설명은 내가 가장 혐오하는 구분이다.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평가하는 방법. 어찌 모든 일본작가들이 같은 감수성을 가질 수 있을까? 그건 마치 몇 명의 한국인이 치즈를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한국인이 치즈를 좋아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 작가의 경우라면, 이러한 폭력적인 구분이 가능하다. 아사다 지로의 감수성은 얇다. 그는 언제나 사회문제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실직 당한 회사원, 퇴락한 콜걸, 물질적 풍요에만 익숙해진 회사 직원, 정신의 공허함을 물질적 풍요로 감추고 있는 중산층 가정, 신문기사에서 한번쯤은 보았을만한 이야기들이 그의 작품소재가 된다. 그와 같은 사회문제에서 시작했지만, 그가 문제를 다루는 방법은 사회적인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는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문제를 극복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는 아파하지만, 아픔을 이겨내려 하지 않는다. 그는 슬퍼하지만, 슬픔을 이겨내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그런 삶을 견뎌낼 뿐이다.

무엇이 삶에 대한 그의 인식을 결정했는가? 번역자인 양윤옥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라져가는 고향에 대한 상실감은 세상 어디에서든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모든 작가들이 그 상실감을 고통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아사다 지로는 서울내기가 한강에서 헤엄치고 놀던 시절을 그리워하듯, 이문구 님이 관촌을 그리워하듯 도쿄내기적인 기질이 통용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다. / 올바른 정신과 ‘꾀부리지 않고 깨끗하게’ 사는 마음들이 합리성과 자본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방향을 잃고 오물이 날리는 도심의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맬 때 제대로 된 길을 찾아주는 것 ― 잃어버린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까지 힘겹게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이유일 것이다.' : 양윤옥,「누가 장미를 훔쳤나?」역자후기, (p.274.)

나 역시 위의 인용에 동감한다. 그가 살아야 하는 현실은 어둡고 힘들고 눈물겹지만, 그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세상은 지금 여기 눈앞에 있는 곳이 아니라, 예전에 저기 머나먼 곳에 있는 곳이니까.

그러니 그의 감수성이 얇을 수밖에. 몇 번이고 꺼내봐서 너덜너덜해졌으니 이제 얇을 대로 얇아졌을 수밖에. 장미의 꽃잎처럼 향기롭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밖에.

그러나 그 얇은 감성이 그의 무기가 된다. 온통 둔탁한 것밖에 없는 세상을 감싸는 것은 얇은 것이다. 비록 힘이 없다고 해도, 비록 쉽게 무너진다고 해도, 그것만이 세상을 견뎌내는 방법이다. 슬픈 아름다움만이 과거를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정녕, 모든 아름다운 것은 얇구나. 얇기만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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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사과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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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창조자이다.
이 당연한 명제가 때로는 엄청난 부담이 된다. 남들과는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 그것도 이왕이면 남들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세상에 완전하게 독창적인 이야기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렇다고 남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神에 가까운 창조자로의 작가와 神이 되지 못하는 인간으로의 작가 사이의 괴리. 이것이 작가가 가지는 부담감의 실체이다. 작가는 인간이면서도 신이 되기를 꿈꾸다. 신을 꿈꾸면서도 인간일 수밖에 없다. 신이라는 말이 너무 거창한가? 그렇다면 ‘완전’이라고 바꾸어도 좋다. 결국 인간일 수밖에 없는 작가가 만들어내는 세상이란 몇 장의 종이, 혹은 몇 바이트의 파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까.

그래서 작가들에게는 책임이 따른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완결되게 유지해야 한다는 책임. 또한 작가들에게는 의무가 따른다. 다른 사람이 창조한 세계에 함부로 끼어들 수 없다는 의무. 표절이 작가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도덕적인 결함이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물론 표절이 아니라도 다른 작가들의 세계에 끼어들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기법으로 제시되었던 패러디를 제외하더라도, 이 작품과 같은 방법이 가능하다. 즉, 다른 사람이 만든 작품의 前史 혹은 後史를 다루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명백히 표절은 아니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행동도 아니다.

그러나 꺼림직 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분명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니까. [작가는 창조자]라는 개념을 버리지 않는 한, 이런 부담감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이런 방법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재미가 있는데 말이다. (그런 부담이 꼭 버려야 하는 것인가? 나는 버리기 보다는 오히려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런 부담이 작가로서의 긴장감과 자존심을 유지시키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前史, 즉 윌리엄 신부의 젊은 시절을 다루고 있다. 물론 작품의 설정 자체는 재미있다. 또한 다루고자 하는 내용도 나쁘지 않다. 특히 에코의 원작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았던 계급적인 갈등의 문제가 첨가되었던 것은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 작품의 어떤 장점, 혹은 단점이라도 모두 <장미의 이름>과 비교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도전이 성공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쉽게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면서도 그는 도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작가란 것들은 신이 되기를 바라는 자,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에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자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이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작가가 사용하고 있는 한문 투의 문장이었다. 분명히 중세유럽이 무대이면서 왜 이런 식의 문장을 사용해야 했을까? 유럽의 공용어였던 라틴어와 아시아의 공용어였던 한문을 동등한 것으로 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수도사들의 현학적 말투를 흉내 내었던 것일까? 어떤 것이라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차라리 라틴어였다면 훨씬 어울렸으리라.

역시 무모한 싸움이었다고 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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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늄의 밤
하나무라 만게츠 지음, 양억관 옮김 / 씨엔씨미디어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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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것이 이번 독서를 끝내고 내가 느꼈던 첫 번째 감정이었다. 그의 거칠 것 없는 금기 파괴, 좌충우돌 극단적인 언행. 아무리 봐도 이것은 낯설기만 한 태도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고민한다. 과연 이 사람이 보이고 있는 이런 태도가 진정인가?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우선 다음과 같은 대사에 주목한다. '사회란 거의 무너질 지경에 처한, 좀더 규모가 클 따름인 또 하나의 수도원 같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p.15.) 그는 세상을 수도원이라고 말한다. 왜 수도원인가? 그것은 소설의 내용이 수도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냥 수도원이 아니라, '거의 무너질 지경에 처한' 수도원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바로 여기가 그의 극단적인 태도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은 낡은 것이다. 낡고 낡아서 무너질 지경의 것이다.

그는 이러한 논리에 기반을 두고 기존의 논리, 누구나 느끼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을 뒤집고 있다. 더구나 기존의 것이야 말로, 조만간 무너져버릴 것이 아닌가. 그렇게 낡은 것을 무너뜨리는 일에 거칠 것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의 뒤집기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복이라기보다는 결합에 가까운 것이다. 그는 종교와 섹스를 결합시키고, 여성과의 섹스와 남성과의 섹스를 결합시키고, 가학과 피가학을 결합시킨다.

작품 중에서 새로운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란 결국, 종교적인 쾌락과 육체적인 쾌락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육체적인 쾌락은 강렬한 자극이고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쾌락이지만, 종교적인 쾌락은 훨씬 오래 간다는 것.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의 태도는 과격하지만, 과격하게 밀고나가던 태도에 비해서 타협은 너무 쉽게 이루어지고 있다. 육체 쾌락이 가지고 있는 위력에 대해서 한참 강조를 하다가, 갑자기 종교적인 쾌락을 옹호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졸렬한 자기변호에 불과하다.

그가 진정으로 종교적인 쾌락을 욕망한다면, 그에 합당하는 노력을 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한 일이라곤 오직 자신의 욕망을 방기하고, 강조해서 僞惡적인 포즈를 취한 것뿐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각종 이론들을 작품에 도입하고, 부연설명 한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는 단지 포즈를 취한 것뿐이다. 그는 조숙해보이고자 하는 어린아이, 나쁜 짓을 한 것을 자랑하려는 악동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어린아이의 행동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파격적인 행동을 한다고 해서, 낡은 금기를 깨뜨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대안이 없이 무조건 저질러지는 파괴는 폭력에 불과하다. 작품 속의 이러한 행동에 의미를 가지려면, 주인공은 자신의 행동에 조금 더 책임을 지어야 한다. 대안이 없는 파괴는 책임회피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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