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마늄의 밤
하나무라 만게츠 지음, 양억관 옮김 / 씨엔씨미디어 / 1999년 4월
평점 :
절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것이 이번 독서를 끝내고 내가 느꼈던 첫 번째 감정이었다. 그의 거칠 것 없는 금기 파괴, 좌충우돌 극단적인 언행. 아무리 봐도 이것은 낯설기만 한 태도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고민한다. 과연 이 사람이 보이고 있는 이런 태도가 진정인가?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우선 다음과 같은 대사에 주목한다. '사회란 거의 무너질 지경에 처한, 좀더 규모가 클 따름인 또 하나의 수도원 같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p.15.) 그는 세상을 수도원이라고 말한다. 왜 수도원인가? 그것은 소설의 내용이 수도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냥 수도원이 아니라, '거의 무너질 지경에 처한' 수도원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바로 여기가 그의 극단적인 태도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은 낡은 것이다. 낡고 낡아서 무너질 지경의 것이다.

그는 이러한 논리에 기반을 두고 기존의 논리, 누구나 느끼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을 뒤집고 있다. 더구나 기존의 것이야 말로, 조만간 무너져버릴 것이 아닌가. 그렇게 낡은 것을 무너뜨리는 일에 거칠 것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의 뒤집기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복이라기보다는 결합에 가까운 것이다. 그는 종교와 섹스를 결합시키고, 여성과의 섹스와 남성과의 섹스를 결합시키고, 가학과 피가학을 결합시킨다.

작품 중에서 새로운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란 결국, 종교적인 쾌락과 육체적인 쾌락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육체적인 쾌락은 강렬한 자극이고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쾌락이지만, 종교적인 쾌락은 훨씬 오래 간다는 것.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의 태도는 과격하지만, 과격하게 밀고나가던 태도에 비해서 타협은 너무 쉽게 이루어지고 있다. 육체 쾌락이 가지고 있는 위력에 대해서 한참 강조를 하다가, 갑자기 종교적인 쾌락을 옹호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졸렬한 자기변호에 불과하다.

그가 진정으로 종교적인 쾌락을 욕망한다면, 그에 합당하는 노력을 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한 일이라곤 오직 자신의 욕망을 방기하고, 강조해서 僞惡적인 포즈를 취한 것뿐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각종 이론들을 작품에 도입하고, 부연설명 한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는 단지 포즈를 취한 것뿐이다. 그는 조숙해보이고자 하는 어린아이, 나쁜 짓을 한 것을 자랑하려는 악동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어린아이의 행동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파격적인 행동을 한다고 해서, 낡은 금기를 깨뜨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대안이 없이 무조건 저질러지는 파괴는 폭력에 불과하다. 작품 속의 이러한 행동에 의미를 가지려면, 주인공은 자신의 행동에 조금 더 책임을 지어야 한다. 대안이 없는 파괴는 책임회피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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