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창조자이다. 이 당연한 명제가 때로는 엄청난 부담이 된다. 남들과는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 그것도 이왕이면 남들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세상에 완전하게 독창적인 이야기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렇다고 남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神에 가까운 창조자로의 작가와 神이 되지 못하는 인간으로의 작가 사이의 괴리. 이것이 작가가 가지는 부담감의 실체이다. 작가는 인간이면서도 신이 되기를 꿈꾸다. 신을 꿈꾸면서도 인간일 수밖에 없다. 신이라는 말이 너무 거창한가? 그렇다면 ‘완전’이라고 바꾸어도 좋다. 결국 인간일 수밖에 없는 작가가 만들어내는 세상이란 몇 장의 종이, 혹은 몇 바이트의 파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까. 그래서 작가들에게는 책임이 따른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완결되게 유지해야 한다는 책임. 또한 작가들에게는 의무가 따른다. 다른 사람이 창조한 세계에 함부로 끼어들 수 없다는 의무. 표절이 작가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도덕적인 결함이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물론 표절이 아니라도 다른 작가들의 세계에 끼어들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기법으로 제시되었던 패러디를 제외하더라도, 이 작품과 같은 방법이 가능하다. 즉, 다른 사람이 만든 작품의 前史 혹은 後史를 다루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명백히 표절은 아니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행동도 아니다. 그러나 꺼림직 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분명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니까. [작가는 창조자]라는 개념을 버리지 않는 한, 이런 부담감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이런 방법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재미가 있는데 말이다. (그런 부담이 꼭 버려야 하는 것인가? 나는 버리기 보다는 오히려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런 부담이 작가로서의 긴장감과 자존심을 유지시키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前史, 즉 윌리엄 신부의 젊은 시절을 다루고 있다. 물론 작품의 설정 자체는 재미있다. 또한 다루고자 하는 내용도 나쁘지 않다. 특히 에코의 원작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았던 계급적인 갈등의 문제가 첨가되었던 것은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 작품의 어떤 장점, 혹은 단점이라도 모두 <장미의 이름>과 비교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도전이 성공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쉽게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면서도 그는 도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작가란 것들은 신이 되기를 바라는 자,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에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자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이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작가가 사용하고 있는 한문 투의 문장이었다. 분명히 중세유럽이 무대이면서 왜 이런 식의 문장을 사용해야 했을까? 유럽의 공용어였던 라틴어와 아시아의 공용어였던 한문을 동등한 것으로 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수도사들의 현학적 말투를 흉내 내었던 것일까? 어떤 것이라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차라리 라틴어였다면 훨씬 어울렸으리라.역시 무모한 싸움이었다고 할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