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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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는 참으로 매력적인 소재다. 작가라는 인간들이, 혹은 독자라는 인간들이 천형적으로 우울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또 모를까,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안개만큼 매력적인 소재도 있을 수 없다. 김승옥의「무진기행」에서의 안개가 그러했고, 한수산의「안개, 가시거리」가 그러지 않았던가? 또한 마이클 커티스 감독의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안개 자욱한 활주로에서의 이별 장면은 어떠했으며, 테오 앙겔로플로스의 영화 '안개 속의 풍경'에서 두 꼬마가 걸어야 했던 길가의 안개는 또 어떠했던가? 이 모든 작품들이 울림을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안개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매력적인 소재인 안개를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고 있다. 파멸을 뻔히 예감하면서도 브레이크를 잡을 수 없는 사람들의 심정, 증오와 애정이 함께 표현될 수밖에 없는 가족이라는 관계, 과거와 현재의 혼선, 결국에는 독백이 되어버리고 마는 대화. 이런 것들을 표현하는데, 안개는 탁월한 배경일 수밖에 없다. 작가의 카리스마는 결국 작품에 대한 장악력이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유진 오닐의 이 작품은 카리스마가 넘치는 작품이다. 요즘에는 이것처럼 시종일관 독자/관객을 압도하는 작품이 많이 나오지 않지만, 그래서 더욱 신선한 독서경험이었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 그러나, 내 가슴은 너무 겁이 많고, 내 손은 너무 무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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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와 아기별똥 - 청동거울 어린이 10
조태봉 지음, 한현주 그림 / 청동거울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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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동화(童話)라고 하면 밝은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 행복한 이야기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조태봉의 동화가 그려내고 있는 세상은 밝지도 아름답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그의 동화 속에는 죽음과 상실의 그림자가 깔려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는 첨성대가 그러하고, 새끼들을 잃어버린 어미 고양이가 그러하며, 성수대교 붕괴 사건으로 외동딸을 잃어버린 아줌마가 그렇다. 부모님을 잃고 할아버지까지 돌아가신 아이가 있으며, 할머니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손녀딸도 있고, 자신을 만들어준 아이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종이비행기도 있다.

이런 인물들이 등장하고 담고 있으니, 밝고 행복한 이야기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그만큼 작가의 세계관은 비극적이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구태여 비극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다른 동화들처럼 적당한 포장이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동화에는 교훈성이 담겨져 있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짓을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힘겹고 슬픈 세상을 애써 감출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짓이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이란 어딜 둘러보아도 밝고 행복만 가득한 곳은 아니니까.

아이들에게 거짓 낙원의 꿈을 심어주기 보다는,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만들어주는 일이 더 시급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실과 밀접하게 닿아있는 그의 작품들은 의미를 가진다. 이것이 앞으로 우리의 창작동화가 지향해야 하는 부분이라고도 판단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들이 암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비록 슬프기만 한 세상이지만, 작가는 그것을 뛰어넘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거대한 세상의 논리에 맞서는 작은 것들끼리 주고받는 사랑이다.

늙은 첨성대를 위해서 불꽃놀이를 준비하는 아기별들, 새끼 잃은 어미 고양이를 위해 함께 달려가는 동물원의 동물들, 딸을 잃은 슬픔을 비둘기를 보호하는 정성으로 이겨낸 아줌마, 할아버지의 무덤가에서 울고 있는 아이에게 손을 내미는 이웃집 아줌마, 죽은 할머니가 만들어놓은 수의를 '날개옷'이라고 표현할 줄 아는 손녀딸, 마지막 힘을 다해서 병든 소녀에게 날아가는 종이비행기.

이들의 힘은 너무나 작고 초라하다. 이런 노력을 한다고 해서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작은 것들끼리의 사랑은, 적어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변화시킬 수는 있다. 슬픈 세상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될 수는 있다. 밝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는 없지만, 그렇지 않은 세상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는 있다.

이 작품집에 포함된 이야기들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 때문이다. 이렇게 힘겨운 시대에 과연 동화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삶은 힘겹지만, 세상은 슬프지만,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 비록 그 희망이 작고 초라하지만, 그것들이 모여서 세상을 견뎌내는 힘이 된다는 것.

동화는 아이들을 위한 글이지만, 유치하기만 한 글이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들처럼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더욱 큰 힘을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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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구광본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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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에 산을 두고 있다는 것은 불행하면서도 행복한 일이다. 산이 높으면 높을 수록, 험란하면 험란할 수록 더욱 그렇다. 이 작품 앞에는 두 개의 산이 버티고 서있다. 하나는 이상(李箱)이고, 다른 하나는 박상륭(朴常隆)이다. 모두 호락호락 넘어갈 수 있는 산들이 아니다.

우선 이상이라는 봉우리를 살펴보자. 우리 문학사에서 이처럼 매혹적인 작가는 찾기 힘들다. 발표했던 거의 모든 작품이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의 행적 하나하나가 스캔들이었다. 이런 인물이기에 그를 다룬 작품도 많이 발표되었다. 그러므로 이상을 소재로 삼아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인물을 새롭게 조명하는 작업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전에 발표된 작품들과 비교되는 것이며, 이전 작품들의 성과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부담을 내포한다. 더구나 더이상 이상에 대한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낯선 이야기가 되지 못하기도 한다.

작가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뛰어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 노력이 성공했는가? 안타깝게도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같다. 이상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의 생애를 몇몇 인물들로 분할하여 제시하는 수법도 획기적이라고 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이상을 현대의 시공간에 위치시킨 수법이 문제다. '이상'이 가장 큰 매력을 발휘하는 것은 역시 전통과 근대가 충돌하는 지점이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이상은 모던한 인물이지, 포스트모던한 인물은 아니다.

뒤에 붙은 해설들은 이 작품에 '포스트모던'이란 꼬리표를 붙여놓았다. 그런데 과연 이 작품이 포스트모던한 지 모르겠다. 기독교-불교의 세계가 하나의 축을 이루고, 맑시즘이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 과연 포스트모던이 될 수 있을까? 포스트모던의 기법에 해당하는 것은, 중간중간에 끼어드는 작가의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작품에서 사용되는 각주는 작품의 의미를 확장시키거나, 소설의 허구성을 밝히려는 명백한 의도를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에 달린 각주는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고, 독서를 방해하는 잔소리가 되고 말았다.

포스트모던 기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포스트모던한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법은 어디까지나 기법일 뿐이다. 카메라를 메고 거리를 뛰어다닌다고 해서, 왕가위와 같은 영화를 찍을 수 없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작가가 어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세계인식이 포스트모던한 것이라면 자연스럽게 그런 기법이 활용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그런 기법을 사용하더라도 포스트모던이 될 수 없다.

다음은 박상륭이라는 봉우리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리나라에서 종교에 대한 글을 쓰려면, 그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실제로 많은 작가들이 박상륭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발표했고, 스스로 밝히지 않아도 그랬으리라는 혐의를 받기 십상이다. 구광본의 경우도 그렇다. 이 작품의 결말부에서 박상륭의 영향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동자승이며 노승이고 어린이며 늙은이인 인물 설정, 그들의 태도며 말투, 그들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모두 박상륭 소설의 그것들과 다르지 않다. 작가가 박상륭의 영향에서 벗어난 부분은, 맑시즘에 대한 해석이다. 하지만 이를 예수와 결합시킨다던지, 불교적 가르침을 통해 결말을 유도하는 수법은, 역시 박상륭의 것과 같다.

물론 한 작가에게서 다른 작가의 영향을 찾아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접근이다. 세상의 그 누구도 타인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완전한 독창성이란 존재할 수 없으므로. 문제는 다른 사람의 영향을 얼마나 내 것으로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부족한 것도 그런 부분이다. 이상과 박상륭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온전한 자기 것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

선배 작가는 넘어가야 하는 봉우리가 되는 법이다. 봉우리를 넘어선 자만이 또 다른 봉우리가 될 수 있다. 그런 작업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이 모든 창작자의 숙명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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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의 마지막 한숨 -상 - 세계현대작가선 2
살만 루시디 지음, 오승아 옮김 / 문학세계사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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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있어서 어머니는 몇 가지 상징을 가진다. 하나는 혈통으로의 어머니이고, 다른 하나는 조국으로의 어머니[母國]이다. 이 두 가지는 각각 별개의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보통 한꺼번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는데, 그러한 예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최인훈의 <광장>이 그러하고, 막시 고리끼의<어머니>역시 그러하다.

이 작품도 역시 마찬가지. 살만 루시디는 작품 속에서 주인공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그것은 그대로 조국 인도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여기까지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가족사가 복잡해봐야 몇몇 사람들의 관계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조국에 대한 이야기가 복잡해봐야 역사적 사실보다 더 복잡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의 조국이 '인도'라는 점이다. 여기에서부터 이야기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인도란 어떤 곳인가? 각종 신들의 고향,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신화가 공존하는 땅, 그곳이 바로 인도라는 공간이 아닌가. 더구나 몇 천년의 세월이 형성한 이러한 문제와 함께, 20세기의 인도는 영국 식민지 경험으로 인해서, 서구의 근대문물까지 포함되게 되었으니, 복잡해질 대로 복잡한 혼란의 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곳은 카오스의 땅, 태초의 혼돈이다.

그러므로 혈통→조국으로의 제법 단순한 확장은, 그 혼란의 공간에 산재하는 각종 이미지들을 자유롭게 넘나들게 된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 전통과 근대의 대립, 혈연들 간의 복수 등등이 뒤엉켜 거대한 서사를 이루어낸다. 단순하고 개인적인 이야기가 복잡하고 집단적인 이야기로 변하는 힘, 그것이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난점이자 매력이다.

작품의 주인공은 '무어'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한숨인가? 주인공 무어는 일종의 조로증(早老症) 환자인데, 그는 남들보다 두 배 빠른 성장을 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는 남들보다 빨리 고통을 겪고, 빨리 적응하고, 빨리 체념해야 한다. 그는 살아있는 것 그 자체에 자신의 존재이유를 부여한다. 작품 속에는 이와 유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인물들이 제법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죽음은 움직이던 도중, 활동하던 도중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무어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그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그런데 그가 쓰는 글이 자신의 가족사라는 점이 주목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가족사가 아버지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부계(父系) 가족이 아니라, 어머니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모계(母系) 가족이라는 점이 다시 주목된다. 이것은 상고시대의 가족의 형태이며, 지성과 논리를 통해 사회적인 계약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니라, 감성과 포용을 통해 혈연적인 유대관계로 형성된 가족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런 이유로 작가가 그리고자 하는 또 다른 어머니는 '인도 공화국(republic of India)'이라는 국가가 아니라, 민족으로의 '바라트-마타(우리 모국 인도, 上 p.133.)'가 되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 때로는 영국의 식민지배에 찬성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인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이고,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전통이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국가는 체계가 변하면 사라져버릴 수 있는 것이지만, 민족은 다양한 변화를 수용하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힘이고, 여성의 힘이다. 이것은 소설의 무대가 되는 도시인 '봄베이'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다.

결국 작가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이러한 여성의 힘, 어머니의 힘이 아니겠는가? 박해와 포용, 질투와 박애, 죽음과 부활 등의 상반되는 개념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그것을 통해서 서구에서부터 밀려드는 근대문명과 모국 인도의 전통 사이의 조화를 꿈꾸는 것은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인도에서 태어난 작가가 영어로 작품을 발표해야 한다는 모순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자기 구원의 노력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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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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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발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놀라운 재능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예술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작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작가적 자세로 만들어진 예술품이다. 얼마 전에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인터넷에 발표되는 작품, 이를테면 귀여니의<그 놈은 멋있었다>와 같은 글은 문학작품이 아닙니까?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질문을 한 사람이 되물었다. 왜 그렇지요? 그럼 소설은 항상 무거운 것만 다루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나는 다시 대답했다. 소설인 것은 맞다고, 하지만 모든 소설이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당시의,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내 생각은 이렇다. 소설이 문학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예술품이 되어야 한다. 예술품은 작가적인 자세, 즉 세상에 대한 나름의 해석이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독립된 구조를 형성하며, 그 자체로 하나의 의미망을 형성해야 한다고. 이것이 다소 현학적인 표현처럼 들린다면 말을 이렇게 돌려보면 어떨까? 말이 아니라 글이 되어야 한다고. 수다를 떠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체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이러한 생각의 연장에서 보자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미진한 구석이 많다.

물론 그 발상 자체는 인정할만 하다. 발상의 기발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 책의 발상은 전혀 낯설지 않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읽은 듯한 것들이 더 많았다. 대부분이 SF영화나 '환상특급'같은 TV시리즈와 익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상에는 세상을 비틀어보려는 도발적인 태도와 여기저기로 시각을 옮겨본려 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는가? 시각만 잘 조정할 수 있어도 분명 재미있는 소설을 쓸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도드라지는 것은, 구성적인 측면에서이다. 이 책은 아이디어의 집합체이지, 소설작품집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야기를 빨리 진행시키는 것은 좋았지만, 그를 위해서 충분히 고민하고 사유해야 되는 부분을 건너 뛰고 말았다.(이것은 독자의 몫을 남긴 것과는 다르다. 최근 들어 무조건 독자의 해석만을 강요하는 글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작가가 충분히 고민한 뒤에야 독자들에게도 고민을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구성되었고, 그에 따라 발상 자체도 가볍게 다루어지고 말았다. 특히 「내겐 너무 좋은 세상」, 「황혼의 반란」, 「수의 신비」등의 발상은 충분히 작품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되었는데, 그리 되지 못했다. 아쉽다. 아쉬울 뿐이다.

아이디어는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 내느냐 하는가에 달려있다. 역시 지은이가 작가적인 태도를 체득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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