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뜨거운 태양볕아래에서 롬멜이 보였던 기지와 지략도 역부족이었고 차가운 동부전선에서 북극곰과 힘을 겨루며 보였던 의지와 용맹도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전쟁은 끝까지 계속될 수 밖에 없었다. 서부전선은 오랫동안 조용했다. 매일 차가운 바다를 바라보는 임무를 부여받았던 독일군 병사들은 하루 하루에 대해서 어떤 의미들을 부여하고 있었을까? 어쨌든 연합군은 바다를 건너 쳐들어 올 것이 분명하고 문제는 쳐들어오는 지점일 따름이다. 그리고 최전선에 서있는 병사들은 자신들의 임무는 고작 적의 상륙을 일정시간 지연시키는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날은 무척이나 파도가 거셌다. 그렇기 때문에 연합군은 더욱 자신들의 상륙작전을 독일쪽에서 알아채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어쨌든 상륙정에 줄을 맞추어 서있던 병사들은 무척 떨리는 상태였다. 차분하라는 하사관과 장교들의 지시가 있었지만 여전히 불안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변에 도달하자 앞문이 열렸다. 그순간 앞줄부터 차례대로 병사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저쪽 독일군 벙커에서 쏘아대는 기관총탄은 삽시간에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가져가버리는 것이다.
밖으로 뛰쳐나가 보았지만 몸 숨길 곳 없는 해변에서 우왕좌왕하다가 기관총탄의 밥이 될 따름이었다. 날아오는 총탄이 그대로 보인다면 그 총탄에 떨어져나가는 살점도 같이 보여주는 섬세함을 영화는 발휘한다. 전쟁은 한참동안 일방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작전을 짜는 쪽이란 늘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고도 이길만큼의 숫자를 작전구역에 배치하게된다.
그렇게 거시적인 작전이라도 막상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율적으로 자신에게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는 충실한 수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인공 톰 행크스는 바로 옆에서 죽어가는 부하들을 보면서도 차분히 지시하고 행동한다. 전진해서 엄호하라고 하고 저격병을 시켜 돌파구를 만들고 뒤를 돌아서 마침내 벙커를 부셔버린다. 조금전까지 앞만 보고 쏘아대던 독일병들도 이제 수류탄과 화염방사기의 공세에 의해 타죽어가는 가련한 신세로 변하고 말았다. 동료들의 죽음을 잊지않는 미군병사들은 결코 저항력을 잃은 상대방이라도 포로로 남기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죽고 죽이는 과정에서 미군은 교두보를 확보했다.
자 여기까지가 영화의 도입부다. 논문으로 보자면 문제의 제기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러면 어떤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는 것일까? 아마도 무수한 사람들의 희생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하는 단순하고도 직설적인 물음이 될 것이다. 이 물음을 안고 영화는 계속 이어진다.

잠깐 역사적인 배경을 덧붙이자면 서부전선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것은 사막의 영웅 롬멜이었다. 하지만 사막에서 너무 무리하며 열심히 싸웠던 롬멜 원수는 신병 치료차 독일 본토로 가 있었고 자신이 응급처방해 놓았던 몇가지 방어선이 미군에게 피해를 주는데 어느정도 효과를 보았지만 결코 상륙을 완전히 저지하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보다 그의 머리속에는 상대가 쳐들어왔을 때 상륙을 허용했다가 우세한 기갑력으로 밀어붙여 오갈데 없게 만드는 타격을 입힐 것인가 아니면 바로 상륙하려는 곳에서 저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상층부와 벌이는 논쟁이 놓여있었다. 롬멜의 입장은 곧바로 저지하자는 쪽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필수적인 기갑전력에 대한 통제권은 오직 히틀러의 손에 있었고 이 중요한 순간에 그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바다로 적을 몰아넣기에는 너무나 시기가 않좋은 상태였다. 독일에 대한 연합군 측의 양동작전으로 어느쪽에도 힘을 집중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륙을 허용하고 만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이제 상륙작전을 막 성공시킨 톰 행크스는 곧이어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는다. 라이언이라는 병사의 형제 모두가 이번 전투와 태평양의 전투에서 사망하고 만것이다. 그래서 그를 집의 어머니에게 돌려보내주자는 인도적인 결정을 따르기 위해 적지에 낙하한 라이언의 구출작전을 수행하라는 것이다.

초반의 영화가 무자비한 전투신을 아주 빠른 속도로 보여주던 것에 비해 이제 영화는 아주 작은 부대가 천천히 꽤 긴 행보를 하는 모습을 비춰주게 된다. 음악에서 흔히 쓰이는 소나타 형식이 빠르게 느리게 다시 빠르게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참고로 할만하다.
하지만 이제 관객들도 전쟁의 다양한 면을 이해하기 위해 좀 더 찬찬히 여러 부분을 뜯어보아야 할것이다. 우선 톰 행크스가 작전지시를 받는 장면을 보자. 군지휘부의 명령을 전달하는 상사의 앞에는 테이블이 놓여있고 그 위에는 먹다남은 샌드위치가 있다. 이를 힐끔 쳐다보는 톰 행크스의 무심한 표정에는 이런 생각이 담겨 있지 않을까? “조금 전까지도 우리의 동료들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고비를 넘기며 이 땅을 쟁취했다. 무수히 많은 동료들이 총탄에 쓰러져갔다. 하지만 사람은 슬픔만으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먹어야하고 잠도 자야하고 그렇게 슬픔을 접고 또 앞으로 나가야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지금은 전쟁중이니까 말이다.”
호머의 오딧세이를 보면 괴물들에게 희생된 동료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그들은 배가 고파 먹고 잠이와서 잤다라는 대목이 있다. 엇비슷한 자세로 삶이 이어져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어쨌든 상륙지에는 벌써 수많은 병사들과 함선들이 모여있다. 그들도 모두 먼저 왔던 사람들의 희생을 밟고 모인 것이다.

차출된 부하 병사들이 새 임무를 좋아할리는 없다. 가야하는 곳이 적지이고 또 임무가 기껏해야 한 병사를 데려오라는 것이니까 말이다. 누구든 “왜 나도 부모님이 있는데 남의 부모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하나?”하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질문을 던져댄다. 어쨌든 그들은 길을 떠나게 되는데 이 대목에서 전쟁터와는 거리가 있게 생긴 샌님 하나가 독일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 하나로 같이 합류하게 된다. 타자기를 들고 가면 안되냐는 질문에 연필을 들어보이는 톰 행크스의 표정이 재미있다. 그만큼 전쟁터라는 곳은 사람에게 응용력을 길러주나보다. 어쨌든 영화의 두번째 단락은 꽤 길게 전게된다. 저격병도 만나고 전장터를 피해 숨어있는 프랑스 농부도 만나고 하면서 몇번의 싸움을 겪게 된다. 한번은 적병들과 서로 총을 들고 마주보면서 상대에게 총을 내려노라고 고함을 지르는 경험을 하게된다. 누구든 먼저 당기는 쪽이 유리하지만 결코 피해로부터 자유롭지도 못할 것이다. 그래서들 머뭇대다가 미군쪽에서 사격을 시작하였다. 삶과 죽음이 한시점을 경계로 서로 나뉘는 장면이었다.
다음 장면은 일련의 병사들이 행군하는 속에서 라이언의 소식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는 대목이었다. 혹시나 희생자중에 있을까해서 군번표들을 뒤진다. 웃으며 작은 쇠붙이 조각을 넘기는 그들에게 누군가 진지하게 물어온다. 자신들의 넘기는 그 표딱지도 실은 한 생명의 상징이 아니었냐고 저렇게 적진을 향해 어쩌면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병사들의 눈에도 자신의 소중한 목숨의 희생이 표딱지 던지기와 동격으로 취급된다면 얼마나 허무하겠냐는 그런 내용들이 담긴 질문이었다.
또 다른 장면에는 지휘관이 탄 지프를 그대로 내려놓으려고 하다가 추락해버린 비행기를 보여준다. 별 의미 없는 안전과 편의를 위해 부하들까지 한꺼번에 죽음으로 몰고간 그런 우매함의 상징이다.

라이언이 있을만한 위치는 확인되었다. 행군은 계속되고 다음에 도달한 곳은 기관총이 엄폐된 독일군 벙커였다. 자신들의 임무와 상관이 없지 않냐며 돌아가자는 의견이 다수였지만 톰 행크스는 위험을 알면서도 방치할 수 없다는 투철한 군인정신을 발휘한다. 기습작전으로 상대를 거의 헤치웠지만 미군쪽에서도 희생자가 하나 나왔다. 동료의 죽음을 본 병사들은 분풀이를 하기 위해 독일군 포로를 즉결처분하려고 한다. 그런 미군들 사이에서 우리의 샌님은 제네바 협정과 인도주의를 들먹이며 처분을 반대한다. 하지만 의견은 분분하고 처형이 막 실행되려는 순간 톰 행크스가 나서서 포로를 풀어주며 미군에게 가서 항복하라고 명령한다. 영화 시작의 전투장면과 이어지는 전쟁의 윤리와 잔혹성에 대한 물음이 계속되는 것이다.
힘겹게 도달한 목표지점에서 그들은 라이언 일병을 발견한다. 하지만 어디인가 맥이 좀 빠지고 똑똑치는 않아보이는 상대방을 보면서 자신들의 희생과 노력이 별 의미가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담긴 표정을 짓게된다. 하지만 곧 그 라이언 일병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된다. 여행은 계속되고 그들은 드디어 진짜 라이언 일병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정찰용 장갑차를 바주카포로 해치우는 용감한 청년 병사가 바로 고대하고 고대하던 라이언 일병이었다. 이정도면 좀 보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표정들로 변하게 된다.
그에게 자신들의 임무를 설명해주는 것도 한편에서는 그리 편안한 일이 아니다. 형제들의 죽음, 본인에게 허용된 귀환 명령 그리고 오가며 희생되었던 다른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가 지나갔다.
대원들에게는 이제 너는 지겨운 전쟁터를 벗어나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부러움과 자신들의 위험한 임무가 이제 종결되었다는 기쁨이 밀려왔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여의치가 못했다. 여기에는 다리가 하나 놓여있고 이 다리를 적에게 빼앗기지 않고 지켜야 아군을 계속 전진시킬 수 있다는 보다 큰 임무 속에 우리의 라이언 일병은 하나의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중차대한 임무를 개개인의 안전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는 사뭇 지사적인 태도를 라이언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싸우기로 작정하고 다양한 준비를 한다. 준비가 모두 끝나고는 잠시 휴식이 주어진다. 라이언은 죽은 형들에 대한 재미있는 회고를 한다. 이 장면도 오딧세이에 나오는 그런 모험담 비슷한 느낌을 준다. 죽은 자에 대한 자유로운 방담도 끝나고 이제 그들도 새로운 죽음앞에 마주서게 된다.
이제 영화는 종결부로 치닫는다. 처음 전투장면이 미군과 독일군을 포함해서 무수한 사람들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매우 거시적이고 외향적인 카메라의 움직임이었다. 영화는 분명 왜 이렇게 많은 죽음이 있어야 했는가하고 물어오는 것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약간의 인물들을 보다 세밀히 관찰하면서 그들의 대화를 통해 내면을 쫓아가는게 방법일 것이다.

답은 어느 정도 나왔다. 라이언이라는 인물은 충분히 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하나의 생명과 다른 하나의 생명이 서로 더하기 빼기해서 제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실은 라이언이라는 인물은 하나의 상징으로 놓여있다. 왜 굳이 대서양 너머까지 아들들을 보내야 하는가? 타인의 자유를 위해 굳이 우리의 자유가 희생되어야 하나? 한 사람의 죽음이 다른 한 사람의 죽음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까? 그런 일련의 질문들 속에서 라이언은 2차대전을 통해 미국이 지키려고 했던 땅과 사람과 가치를 모두 축약시킨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 상징은 충분히 자신의 가치를 내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던져진 답을 놓고 구출작전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게 된다. 그리고 결말은 아주 빠른 템포로 처음에 보았던 것과 같은 전투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처음의 전투장면이 진지한 문제 제기를 위해 세밀하고 충격적인 기법을 사용했다고 하면 마무리 전투장면은 실은 그냥 서부활극의 수준을 그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상적이었던 대목도 얼마간 있었다. 본인이 영화를 본 곳이 삼성플라자의 씨넥스라는 영화관이었는데 사운드 시설이 좋다보니 마치 내가 전쟁터의 한가운데서 타이거 탱크의 굉음을 듣는 고통스러운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사운드는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독일군 SS 친위대원과 미군 한명이 칼한자루를 들고 서로 맞대결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삶과 죽음이 이런식으로도 갈라지는구나 하는 가르침 하나를 받았다. 서로 위치가 뒤바뀌면서 죽이려하다가 죽게되는 순간에 정말 있는 힘을 다해 저항해보다가 마지막으로 외치는 말은 “안돼” 였다. 조금전에 사람을 죽인 칼을 툭툭치며 여유있게 계단을 내려오는 승자를 보면서 우리의 샌님은 여전히 벌벌떨며 한쪽에 앉아있었다. 동료를 죽게 만들었다는 자책감과 자신에게 밀려오는 공포 이런 것들이 뒤섞이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증에 빠져버린 것이다. 전황은 급격히 밀려가면서 미군들을 차례로 쓰러진다. 그렇게 미군을 쏘아붙이는 독일군 중에는 어디서 낯이 익은 사람이 하나 있다. 아까 벙커에서 처형되기 직전에 살려준 병사였다. 그를 보는 순간 샌님이 느끼는 한숨 그리고 그들에게 들키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계속 밀려온다.
하지만 영화는 어차피 해피엔딩이고 독일은 지게 마련이다. 우스꽝스러운 전투기의 등장으로 적의 탱크는 부서지고 우리의 샌님은 갑자기 일어나서 독일군들을 세우고 아까 살려준 사람을 이제 자기손으로 죽이게 된다. 무엇인가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설정일 따름이다.
톰 행크스에게는 약간의 숨돌릴 기회가 주어진다.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은 죽음이 헛되지 않게 열심히 살아라라는 메시지였다. 영화는 다시 회고가 시작되었던 묘지로 돌아오게 된다. 이제 삶을 다 누린 노인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그가 남긴 족적들은 뒤에서 그를 쳐다본다. 뒤돌아보며 묻는 말은 아 참 내가 이 많은 사람들의 희생만큼 값어치 있는 삶을 이루어냈을까하는 것이었다. 답은? 아마도 그렇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모두들 전쟁의 목적에 대해 영화가 보여주듯 그러한 숭고한 자기 희생의 영웅적 이미지에 동조할 수 있을까? 2차 대전 바로뒤에 있었던 한국전쟁과 조금 뒤에 있었던 베트남 전쟁을 통해 우리는 전쟁이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회색빛에 담아서 아련하게 보이도록 포장한 감독의 테크닉에는 실상 붓의 테크닉으로 감쳐진 상처들이 잔뜩 담겨있는 것이다.
미국이 끊임없이 2차대전의 영웅담을 강조한다면 한쪽 당사자였던 독일에서는 베트남을 이야기하기 마련이다. 그런 균형감각을 가지지 못한채 영화에 대한 기억을 마무리한다면 또 하나의 희가극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영화 곳곳에 스필버그의 유태인다움이 가끔 드러나지만 묘지에 놓인 특이한 십자가도 지켜볼만하다. 다윗의 별이라고 유태인의 상징이 묘비 앞에 놓여있는 것은 유태인도 분명 이 전쟁에서 한몫을 했다는 시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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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의 장면들은 게르마니아의 숲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묘사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역사적 배경을 약간 설명하겠다. 영화의 시점은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치세가 끝나가는 순간이었다. 원래 로마문명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시작해서 지중해세계를 모두 통합했고 캐사르에 의해 지금의 프랑스인 갈리아 지방까지 정복했다. 하지만 지금의 독일인 게르마니아지역에서는 더 이상전진을 하기 어려웠다. 이유는 크게 두가지 인데 하나는 지리적인 것으로 게르마니아 지역은 개발이 덜되어 길이 작고 많은 부분이 숲으로 이루어졌다. 숲에서는 기병의 활약이 제한되고 지리를 잘 아는 원주민의 매복과 기습이 가능하기 때문에 정복전쟁이 그렇게 용이하지 않았다. 두번째는 게르만인들의 성격으로 이들은 문명화된 삶을 살기보다는 자신들의 자유에 더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을 정복하기 위한 노력과 비용보다는 얻어지는 이익이 적다고 생각되었다. 실제 로마군은 토이거부르그 숲이라는 곳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군단 여럿이 몰살당하게 되었다. 어쨌든 제국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이 부근을 북방의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더 확장하지도 물러서지도 않도록 상황을 유지하였다.
한동안 평화롭던 북방의 경계선도 아우렐리우스 황제 치세 때쯤 되어서는 점점 강해지는 게르만인들의 압력에 의해 부담을 느끼게 된다. 그 덕분에 우리는 최전선에 나와있는 황제의 모습을 보게된다.

이제 막 눈앞에 보여지는 숲에 머무르고 있는 관객의 주의를 감독은 곧 전쟁터로 끌고 간다. 수많은 사람과 사람이 충돌하는 대 전투가 벌어지고 덕분에 한동안 정신도 차리기 어려워진다. 하나 하나의 국면을 본다면 살육행위로 이어지는 잔인한 전투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장엄한 느낌조차 다가온다.
장군이 직접 일선 전투에 참가해서 위험을 무릅쓰는 용맹을 발휘하는 모습은 흔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 하지만 여기에는 의도적인 복선이 깔려있다. 그는 곧 그 용맹을 다른 공간에서 발휘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전투는 로마제국 측의 승리로 끝났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우선 막 죽음을 넘긴 병사들은 왜 이렇게 열심히 싸워야했는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이들을 대표해서 장군 막시무스는 황제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청원을 한다. 이미 제국시대에 들어오게 되면 로마군은 대부분 직업군인으로 충당되게 된다. 원래 로마의 출발은 자유민 스스로가 자신을 위해 무장하고 싸움터에 나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직업군인이라면 그저 돈을 받고 그 대가로 싸울 뿐이지 별다른 명분에 무게를 두지 않는다. 그래도 전쟁은 잔혹한 것이다.

여기서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 장면이 잔혹할수록 “왜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가지게 한다. 이 질문은 싸움터의 로마군을 대표하는 막시무스 뿐이 아니라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들 모두가 품게 된다. 로마의 상대편인 게르만인들은 여기에 대해 간략하고 명쾌한 답을 가지고 있다. “자신과 가족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다.” 영화에 계속 보여주는 고대사회는 엄격한 신분의 차별을 가지고 있는 사회였다. 평민이나 노예들에게 주어지는 자유의 폭은 지극히 작을 뿐이다. 자신과 가족에게 그런 노예로서의 삶을 살게하지 않기 위해서 게르만인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
비슷한 대답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 에서도 나왔던 것을 잘 기억해보시기 바란다.

이 국면에서 황제가 갑자기 목숨을 잃는다. 범인은 바로 자신의 아들인 코모두스이다. 이유는 황제가 자신의 제위를 아들에게 넘기지 않고 장군 막시무스에게 주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맞지 않지만 한가지 배경은 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까지 이어지는 5현제 시대에는 황제의 지위를 무조건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그 자리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골라 미리 입양하고 권력수업을 시킨 다음 넘겨주는 전통이 있었다. 비록 민주주의 만큼 민의가 반영된 것은 아니라도 제법 개인의 욕구에 비해 공공의 이익을 고려한 훌륭한 제도였다. 하지만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역사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아들 코모두스는 오랜만에 나온 폭군으로 무척이나 어리석게 살다가 신하에 의해 죽고 말았다. 그래서 왜 현명하고도 사색이 많아서 <명상록>까지 지었던 스토아 철학자 아우렐리우스가 그런 이기적인 행동을 했을까 하는 의문을 역사학자들은 많이 가졌었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과감히 여기에 픽션을 도입해서 하나의 자연스러운 해명을 하려고 한다.
황제는 원래는 막시무스를 현명하고 사심 없는 자로 선정했었지만 아들에게 자신이 죽음으로 그 유지가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황제는 죽고 새로운 황제 코모두스가 요구하는 충성서약을 거부한 막시무스는 기습적인 체포를 당해 처형당할 위기에 몰렸다. 여기서 놀라운 기지를 발휘해 살아남아 고향으로 내달았지만 부상 때문에 어렵게 도착했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이미 새까맡게 타버린 가족들의 시체들이었다. 절망 때문에 쓰러진 그가 눈을 떠보니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노예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체력이 건장한 그는 곧 검투사로 선발된다. 사막위에 놓인 자그마한 도시 그곳에도 원형극장은 있다. 그 곳에서는 과거 그리스 사람들이 연극을 보고 정견을 발표하고 운동경기를 하는 참여의 문화 대신에 황제의 신하가 내리는 포고를 듣고 관리들의 판결을 보고 검투사가 서로 찔러 죽이는 것을 지켜보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관객과 주체는 분명 서로 다른 자리다.
로마 문명의 보편성은 여기서도 확인될 수 있지만 그 결과물은 심하게 말하면 보편적인 허무였다.

이곳에서 막시무스는 앞서의 싸움터에서 보여주었던 기술을 남김없이 발휘한다. 이유는 단 하나 살자는 것 뿐이다. 나중에는 아예 혼자 나가서 상대방을 모조리 해치우기까지 한다. 피가 많이 튈수록 환호의 목소리도 커져 간다. 무수한 사람을 죽인 자신에게 환호하는 관객들을 향해 막시무스는 칼을 내던져 버리기 까지 한다.

지방에서의 놀라운 활약으로 만들어진 명성은 그가 속한 검투사 집단을 로마의 대형경기장에서 열리는 황제 즉위 축하연에 초대되게 만든다.

시합이 열리는 공간을 조금 더 살펴보면 여기저기에 빵이 뿌려지고 있다. 이미 당시의 로마군중들에는 스스로 먹을 것을 해결할 능력조차 잃은 사람들이 많았다. 일이 없는 사람들만큼 허무한 존재들도 드물다. 곳곳에 세워지는 영광스러운 건축물들 장엄한 행진 하지만 어느곳에도 민중들이 낄 수 있는 곳은 없다. 그들은 단지 관객으로 남겨지고 계속 그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요구받는다. 이들이 쌓이는 욕구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응해서 나온 것이 바로 원형경기장의 살육극이었다.
죽고 죽이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환호한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게르만의 싸움터에서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던 게르만 전사들의 싸움도 제국의 영광을 지키려는 로마 병사들의 외침도 아닌 단지 관객으로서의 환호일 뿐이다. 투표할 권리조차 빼앗기고 체육관에서 벌어지는 선거의 결과를 TV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노예 같은 백성들과 별로 다들 바 없는 삶이다.

원형 경기장에서 주최측은 자마의 전투를 흉내내게 된다. 자마 전투는 기원전 198년에 있었던 것으로 카르타고 장군 한니발과 로마 장군 스키피오가 각기 운명을 걸고 사투를 벌였던 것이다.
이것이 경기장 현장에서는 전차와 노예군의 대결로 나타난다. 말이 끄는 전차에 타고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활로 공격하는 적에 맞서 발이 느린 보병으로 이루어진 막시무스 쪽은 아무래도 불리할 수 밖에 없다. 훌륭한 지휘관의 자질 중 하나가 위기에 대해 발빠르게 대응하는 능력이다. 막시무스는 빠르게 대열을 만들게 했다. 그리스의 팔랑스, 로마의 레지움은 모두 대열을 만들어 위세를 보이는 전법이었다.
이런 효과는 경기장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처음에 손쓸 수 없이 밀리던 막시무스 측에서 완전히 상대를 제압해버리게 만들었다. 마지막에는 말까지 집어 타고 상대방을 해치우는 보복까지 수행한다. 거의 경기장에 모인 모두를 압도하는 솜씨였다.
덕분에 반갑지 않은 손님을 빨리 만나게 된다. 황제가 아예 내려와 자신을 부르게 되자 꼼짝없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게 되었다. 완전 무장한 근위대가 자신들을 포위한 상태에서 목숨에 대한 결정은 황제에게 달려있다. 이때 계속 그들을 살리라고 환호하는 군중들의 위세는 막시무스가 당당히 걸어나 올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서로 이미 상대를 알아보게 되었다면 어느 한쪽이 끝장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막시무스를 죽이려는 황제의 시도들은 계속 무산되었지만

그라쿠스라는 원로원 의원이 등장한다. 그 이름은 꽤나 유명하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가장 애틋한 삶을 살았던 비운의 형제들이다.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다 죽어간 덕분에 그들은 오랫동안 이름을 남겼고 오늘날에는 헐리우드의 영화감독들에게 꼭 이런 장면에 소신있는 지도자의 표상으로 써먹히게 되었다.
그라쿠스와 협력하고 밖으로 나가 자신의 군대를 불러들이려는 막시무스의 시도는 여러 동조자들을 규합했지만 결국 실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욕심만 그득했던 검투사들의 주인이 대의에 동조해서 막시무스에게 기회를 주게하는 것은 꽤 부자연스러운 기획이다. 감독은 이 장면에서 그가 전황제로부터 목숨을 구하는 징표로 목검을 받았었다고 설정한다. 고대사회의 인간관계는 개인 대 개인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행위가 동서를 막론하고 있었다.

이제 영화는 마지막으로 치달았다. 황제가 직접 복수를 위해 조금 시각을 달리하면 인기 높은 검투사를 꺽어 더 높은 인기를 얻기 위해 아니면 공공장소에서 정당한 수법으로 상대를 해치워서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칼을 들고 싸움터에 나서게된다. 역사적으로도 실제 코모두스 황제는 직접 칼을 들고 검투사들과 싸움을 했지만 실은 엄청난 비웃음과 경멸을 샀을 뿐이다.
영화에서 그는 비겁하게도 독침으로 그의 몸에 상처를 내어놓고 싸움을 건다. 막시무스는 복수를 성공했지만 그 자신의 생명도 꺼져갔다. 계속 이어지는 비겁함과 추함에는 마침내 근위대장까지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막시무스의 생명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어느 순간에 경기장이 보이다가도 곧 아내와 아이들이 사이좋게 서있는 들밭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서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영생에 대한 믿음이 짙게 깔려있다. 사려 깊은 관객이라면 영화 중간 쯤에서도 막시무스가 동료 검투사와 대화하면서 먼저 죽는다면 아이에게(아내는 빼고) 자신의 메시지를 전해달라는 대화를 나눈 것도 기억을 할 것이다.
이러한 소망들은 결국 이 사회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이 이승의 거친 모습을 초월하게 만드는 내세와 불멸의 가치를 담고 있는 종교였다는 논리로 이어지게 된다. 실제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치세에서도 기독교는 자유를 위해 피흘리는 싸움을 계속했고 결국 후대에 와서는 승리를 쟁취하게 된다.
종교의 핵심은 존재의 이유를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다. 기독교란 모두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내는 위력을 발휘한다. 그들이 베드로와 같은 어부건 바울과 같은 가죽 수선공이던 노예건 할 것 없이 모두를 말이다. 오늘 그들의 삶이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자신의 존재가 실은 더할나위 없이 소중하게 만들어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이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었을까? 그렇게 해서 로마는 황제의 제국에서 교회의 제국으로 변화해가게 된다.

막시무스가 마지막으로 내리는 유언은 그라쿠스를 중심으로 민주주의를 복원하라는 것이다. 버려진 황제의 시신을 내팽겨 쳐버리고 소중히 막시무스는 실려나간다.
여기서 더 영화를 끈다면 역사의 왜곡이 점점 더 크게 일어날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막바로 엔딩신이 나오게 하는 것으로 감독의 거대한 스펙터클 기획은 마무리된다.

감독이 역사를 왜곡시켰다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실은 교묘한 배치를 통해 많은 부분에서 역사의 의미를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었다. 현대에 와서도 많은 사람들은 역사적 진행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간다. 강자에게는 더 강해질 권리가 항상 있지만 약자에게는 늘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따라다닌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사소한 오락거리들을 보면 로마시대와 얼마나 흡사한지를 발견하고 놀랄것이다. 원형극장은 TV로 검투사의 피튀기는 싸움은 장갑을 낀 권투선수의 경기와 각종 프로스포츠로 대체되었다. TV를 보며 먹는 각종 인스턴트 식품들은 황제가 주던 빵과 비슷하지 않을까? 감독은 다시 현대의 로마인들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목숨을 걸고 싸울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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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대공황을 겪던 1935년이라는 시기에 루이지애나에 있는 중죄인을 수용하는 감옥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바깥에서 천천히 접근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한 장소에 와서 멈춘다. 바로 사형 집행 직전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 E지역이다. 톰 행크스가 책임자로 일하고 있는 이 곳에 무척 특이한 죄수 하나가 도착한다. 다른 사람 보다 최소한 머리 하나는 크고 팔뚝의 굵기는 보통 사람의 허벅지만한 그런 대단한 거구의 흑인이다. 이 사람의 죄목은 소녀 둘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것이었다.
여기서 감옥 안의 사람들을 약간 세심하게 보면 한가지 문제점이 눈에 들어온다. 사형수들이 대부분이 미국 사회의 비주류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인디언, 흑인, 프랑스인이 각기 한명씩 이다. 인종의 비율로만 보아도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가 사회적 편견에 의해 억울하게 사형수로 몰렸다가 집행까지 된 적이 있었다. 그 반향으로 사형제도에 대한 폐지운동과 여론이 크게 일어났었다. (실제로 2000년 시점에 나온 신문보도에도 사형수의 3/4이 소수민족 출신이라는 내용이 있다.) 어쨌든 무척 온순하게 죽음까지 맞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굳이 이 사회는 이런 사람들을 사형수로 만들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들을 가질 수 있다.

시꺼멓고 덩치가 큰 흑인 존 커피를 모두들 다시 보게 되는 계기는 우연치 않게 다가온다.정신병 환자로 가장한 사형수가 방심을 틈타 벌인 난동이 벌어졌는데 커피는 그 사이 요도염으로 고통 받던 톰을 치유해준다.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에 어안이 벙벙했던 톰은 정말 이 사람이 범인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며 재판을 담당했던 변호사에게 찾아가본다. 이 변호사가 하는 말을 들어 보면 흑인은 곧 개와 동일시되는 존재다. 항상 경계해야 하고 살펴야 하는 특별한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그는 커피가 범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조금의 의심이 없다.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었을 터인데 말이다. 영화는 굳이 커피가 겪었던 고초에 대해 자세히 다루려 하지는 않는다. 그 보다는 좀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다.
잠깐 배경 설명을 좀 붙이자면 루이지애나 지역은 전형적인 남부 지방이다. 남북전쟁과 노예해방이 있었지만 백인 농장주의 후예들과 흑인 노예들의 후예들이 화목하게 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이 있기 전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대학교육, 군복무 심지어는 버스에 타서 같은 자리에 앉는 것 까지도 흑과 백은 엄격히 구별 될 정도였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자. 이 영화는 당시의 현실을 무서울 정도로 리얼하게 그려내 간다. 특히 사형수가 감방에서 전기의자까지 앉고 충격으로 사망해 실려나가는 모든 장면을 찬찬히 결코 가감 없이 그려내 간다. 영화에는 모두 3번의 사형집행이 나온다. 처음 그것은 매우 담담하게 진행된다. 사형수에게 최후의 면회가 있고 그 사이를 이용해서 대역을 놓고 예행 연습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다음날은 피해자 가족까지 포함해서 의자를 꽉 채운 참관인들 앞에서 실전이 있게 된다. 당시는 피해자의 가족이 참관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하나가 마무리되면 그 다음이 이어지게 된다. 두 번째 희생자는 프랑스인이었다. 성모상을 벽에 걸어놓은 그는 정말 진실로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고 있다. 커피가 톰을 들어올렸을 때도 그는 밖의 간수들에게 고함을 외칠 정도로 자신의 죄와 그것을 벌하기 위한 집행자들의 공식적인 행위는 구별해낸다. 그에게도 하나의 기적이 있었다. 다름 아닌 작은 쥐였다. 우연히 감방에 찾아온 이 쥐에게 먹이를 주고 재주를 가르키면서 그는 하나의 생명을 사랑하게 되고 분명 각자가 존재해야 할 필요성과 이유에 대해 느꼈을 것이다. 하나의 생명이 죽음의 고통에 놓였을 때 이를 안타까워 하고 되살리기 위해 들이는 정성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그런 사람이 왜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쳤을까 하는 물음도 가지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화가 관객을 유도해가는 방법이다. 다른 생명의 가치와 중요성에 공감하는 것이 곧 자신의 존재 의의를 깨닫고 나아가 자연의 질서와 조물주의 섭리에 경외를 표하는 것 까지 이어지게 된다.

톰 행크스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성선설을 믿는다. 처음 커피에 의해 치유를 받고 나서 톰은 커피의 전과 기록이 있었는지를 묻는다. 죄를 저지르는 성향은 계속 발전하게 되므로 무슨 전조가 있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또한 성선설이 전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인으로서의 특색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결코 악인에게 주었을리는 없다는 소박한 믿음도 보인다.
톰을 따르는 대부분의 간수들도 엇비슷한 생각들이다. 사형수를 보면서 죄의 값을 치루었다면 그도 보통사람과 똑 같이 대우받아야 한다는 자세들 또한 매우 인도적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사형제도는 무수하게 많은 무고한 희생자들을 만들어내었다. 소크라테스(신을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사형), 예수, 잔다르크, 사보나롤라 등 종교재판의 희생자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무수한 혁명가와 정치범들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이름을 내지 않았더라도 또 얼마나 많은 억울한 죽음들이 있었는지는 더더욱 모른다.

어쨌든 톰과 같이 선의 입장에 선 사람이 있다면 반대도 있어야 한다. 그런 악역으로 나오는 사람은 교도관으로는 신참이지만 주지사 부인의 가까운 인척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배경을 믿고 설치는 사람만큼 허약한 존재도 없다.
이 친구가 굳이 힘든 사형수 감방의 교도관으로 머물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직접 사형을 집행해보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간수장인 톰과의 타협으로 프랑스인에 대한 사형을 직접 집행하게 된다. 이때 개인적인 보복심에 전기 전달을 빨리하기 위해 머리에 얹는 수건에 물을 적셔야 하는 과정을 빼먹어 버린다. 결과적으로 고압의 전류를 쉬지않고 몸에 흘렸지만 숨이 채 끊어지지 않는 차마 눈으로 지켜보기 어려운 매우 비참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과연 죄를 뉘우친 사람에게 이렇게도 잔혹하게 벌을 더 내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감독은 모두에게 물어간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커피에게 전달이 되었고 남의 고통까지 모두 끌어안아 함께 아픔을 느끼는 커피로서는 정말 참기 힘든 사태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벌을 내리기로 작정하였다. 교도소장의 부인에게서 빼낸 독을 이 악당 친구의 입에 부어넣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참회를 모르는 인간에게 내리는 벌이었다.

존 커피의 마지막 말은 “저들이 사랑을 매개로 죽음을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의 삶과 죽음은 결국 예수의 그것을 고스란히 상징한다. 예수는 땅에 내려와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해 사랑이야기를 쉬지 않고 하다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인간들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었다. 그가 정말 신의 아들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잠시 접어둔다고 해도 그는 많은 기적을 행했다. 소경을 눈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하고 심지어 죽은자를 되살리게 까지 하는 그런 대단한 기적들을 행하였다. 십자가에 못박혀서도 아마 또 다른 이적을 보여서 내려올 수도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보다 선선히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의미를 주려고 했다.

존 커피에게도 오랜 삶은 또 하나의 고통이었다. 그런 삶을 보면서도 톰으로서는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고기요리에 집에서 구운 빵 한걸음 나아가 영화를 보여준 것은 재치였고 이 영화의 맨앞과 연결시키는 고리로서의 기능도 나타났다.

영화에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법으로 반복이 가끔 사용되었다. 전기의자에 앉은 사형수에게 당신은 명망 있는 판사에게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말을 해주는 절차가 있다. 영화에 나오는 세번의 사형 집행 장면 동안 이 말은 세번 반복된다. 처음 이 말은 사형수를 상대로 사회를 대표해서 전달하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마지막에 나오는 이 말은 관객들이 억울한 사람에게 죽음을 집행하도록 만드는 법과 제도의 불공정함을 조롱하도록 사용된다. 명망 있는 판사도 하나의 인간일 뿐이다.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심판한다는 것에 대한 강한 회의가 영화에는 짙게 깔려있는 것이다.
불의를 보고 가만히 있었다면 그 또한 방관자로서의 죄의식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대의 톰은 선량했지만 한명의 소시민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던지는 후회의 말과 생의 잔잔한 여운은 사실 고스란히 현대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나처럼 살지는 말아라. 분명히 당신도 주변에서 억울한 사람이 죄를 받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멈추어 눈을 돌린다면 당신 또한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예수를 죽이는 유태인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사회는 꾸준히 발전한다. 발 맞추어 감옥도 덩달아 발전하게 된다. <양들의 침묵>을 보면 손을 뻗는 일이 없도록 특수유리가 간수와 죄수 사이에 놓여지게 된다. 더 중요한 변화는 법과 제도의 변화다. 무엇보다 배심원의 자리가 모든 인종에게 개방되었고 덕분에 인종에 대한 차별이 많이 개선된 편이다.
아마 지금 같은 유형의 상황에 놓인다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결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사형수의 경우 최종적으로 청원을 주지사에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억울함에 대해 신문, 방송과 같은 매체를 통해 여론의 반향을 일으킬 수 있도록 만들 수도 있다. <데드 맨 워킹>은 그런 노력의 하나를 그려낸 작품이다.

자 여기서 영화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이런 식의 사회 변화가 그냥 아무런 자극과 노력 없이 주어졌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너무 안이한 자세다.
<그린 마일>을 보고 어떤 이는 잔인한 장면들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을 비난할 수도 있다. 영화가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는 결코 보고 웃고 느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미국 사회는 법률 자치의 전통이 있어서 아주 기초적인 조건만 된다면 누구도 배심원이 될 수 있다.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은 사람이 좀 더 현명한 판단으로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영화는 먼저 보다 냉정히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어야 한다. 다음으로 가져야 할 이상형의 모습을 영화들에서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충족시키는 최루성 멜로물이야 만들기도 쉽고 돈벌기도 쉬울지도 모른다. 누가 사람이 죽어나가고 주인공도 죽어버리는 그런 찝찝하고 따분한 영화를 보고 기분이 좋을까? 당연히 감독도 헐리우드의 자본시스템도 되도록 피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 <그린 마일>을 비롯해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일급 살인>과 같은 일련의 영화들은 가장 부끄러운 현실에 대해 결코 덮어버리려 하지 않고 도전해나간다. 물론 격렬한 찬반이 있고 심지어 만든 사람에게 죽음의 위협까지 가해지지만 그들도 결코 호락호락 물러서지는 않는다.
실제 지금도 미국사회는 끊임없이 사형폐지 운동이 일어나고 있고 특히 인종적으로 차별적인 판결에 대해서 끊임없이 반성하고 도전하려는 노력들이 있다.
문화의 중요한 기능 하나가 바로 이와 같은 반성反省적 태도를 일으키는 것이다. 스티븐 킹의 작품은 다른 베스트 셀러 작가들과 다른 격조가 있는 것은 이런 사회적 교육의 기능을 잘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올리버 스톤의 작품 또한 이런 성찰과 교육의 기능들을 잘 수행한다.
이들을 어떻게 톰 클랜시가 쓰고 해리슨 포드가 출연하는 CIA를 예찬하는 작품들이나 007 시리즈에 비교할 수 있을까?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로 사족을 좀 달아보자. 200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부시의 경우 텍사스의 주지사였다. 남부에 속하는 주들에서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데 여기서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어느 여자 사형수가 감옥에서 정말로 개심을 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주변 사람들을 무수히 감화시켰다. 그래서 그녀를 감형 시켜 달라는 청원이 빗발쳤지만 부시는 완강히 거부했었다. 심지어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메시지를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본인은 나도 기도를 통해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마지막을 결정짓는 사인을 했다. 물론 결과는 영화에서 나오는 식의 모습이었지만 그 여자 사형수는 결코 남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지금 보다 한걸음을 더 나아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남을 보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되돌아 보고 변화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왜 한국에는 그런 주제들을 다루는 작품이 없을까 하고 물어야 한다. 한가지 이유는 검열이다. 하지만 그와함께 관객의 태도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가끔 한국 사람들이 금속 활자를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고 자랑하는 것을 보면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기 어렵다. 사건에 있어 중요한 것은 날짜가 아니라 사회적 의미다. 기독교 사회가 활자기술의 개선을 통해 출판된 책들을 가지고 종교혁명을 불러일으켰지만 한국사회에서 그런 변화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의료와 농사에 도움이 되는 책을 찍어내기는 했지만 주자학에서 벗어나 양명학을 배웠다고 대학자 박제가를 감옥에서 죽게 만드는 사회였을 뿐이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사회에서는 사회적 주제에 대해 개인들이 담론을 형성하고 이를 행동을 통해 실현하려는 분위기가 너무 미약하다. 유서대필 사건의 한 주역이었던 검사가 대법원 판사로 선임되는 과정에서 제청하는 대법원장, 임명하는 대통령 다시 이를 추인하는 국회의원들까지 아무도 인권이라는 기준을 엄밀히 놓고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특히 저들 기독교 사회들과 비교해서는 말이다. 이래 놓고도 아시아에서도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노벨 평화상을 바라는 것은 분명 무리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 영화는 <박하사탕>이 보여주는 은유적인 기법의 묘사도 필요하지만 올리버 스톤의 와 같이 보다 더 직설적으로 도전해가는 작품들이 필요한 시기다.

정상을 향해 돌을 굴려보지만 매번 떨어져버리고 그래도 다시 또 굴리기를 시작하는 시지프스의 의지를 한국의 영화인들과 관객에게 기대해본다. 그리고 그들이 수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고향까지 돌아오게 되는 오딧세이처럼 지혜와 행운을 함께 가졌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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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 나온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비디오로 소개된 것은 최근이었다. 이유는 물론
상관 살해나 베트남전쟁에 대해 회의적인 장면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마음씨 좋은 한 시골 청년이 어떻게 살인기계로 변해가고 마침내 훈련교관을 죽이고 자신까지 목숨을 끊는지 그 과정이 쭉 다루어진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이 청년의 눈모습이 변하는 것은 동료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다음이라는 점이다. 늘 약한자를 보호하라는 가르침이 있는 사회였지만 때로는 이것이 실천되지 않고 그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여준다.

장면이 바뀌어 베트남으로 이동하게 된다. 전방을 향해 헬기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하나의 범죄를 알게 된다. 헬기의 전투병은 그냥 발 아래의 논위의 농부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기관총을 날린다. 그들이 정말 적인지 아니면 그냥 양민인지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물론 주인공들은 구역질을 하면서 전쟁 자체의 목적에 회의를 가지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한국의 ‘노근리’를 보게 된다. 얼마전 경의선 복구를 위해 나온 철도기관사가 신문과 인터뷰 한 내용을 보면 자신이 몰고 안 마지막 기관차를 세운 미군이 잠시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다고 한다. 느낌이 이상해서 밖에 나와 서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미군 부대가 기차안으로 무차별 사격을 했다고 한다.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벌집이 되었을 것이다. 전쟁의 실체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전쟁의 의미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사용한 기법은 은유를 담은 대조법이다.
잠깐의 여흥거리를 위해 오토바이에 실려 몸을 팔러 온 여인이 있었다. 쫙 빠진 날씬한 몸매였지만 결국 많고 적은 달러에 자신을 내맡기는 그런 욕망풀이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정찰에 나선 분대는 스나이퍼의 예리한 솜씨에 막혀 한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한명씩 희생을 당하자 전진할 것인가 후퇴할 것인가 결정하지 못한채 본부에게 탱크를 지원부대를 보내달라고 아우성 친다.
도대체 저 너머에 얼마나 많은 적들이 있어서 우리에게 이렇게 예리한 공격을 퍼붓는가 하고 고심을 했다.
계속 전진할지 아니면 후속부대와 탱크의 지원을 받아야 할지를 놓고 서로들 한참 싸우다가 복수심에 불타 모두들 목숨을 걸고 돌격을 해보았다. 그렇게 적에게 접근해 보니 상대는 단 한명의 스나이퍼 였다. 총격을 날리자 뛰어났던 솜씨의 스나이퍼가 뒤돌아서는데 그 모습을 보니 젊은 여인이었다. 청초하고 제법 배운 듯한 그녀의 얼굴은 아직 무척이나 어려보였다. 총을 맞고 쓰러져서 최후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정말로 연민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신에게 명복을 빌기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씩씩한 미군들은 조물주 앞에서는 유한한 존재들끼리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껴간다.
앞서 값싼 욕망의 대상이었던 한 여인과 지금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하던 이 여인 둘을 놓고 비교해보자. 하나는 한없이 무시하던 존재였지만 그들의 또 다른 모습은 바로 이렇게 예리한 스나이퍼로 나타난다.
힘도 그리 없고 자원도 무기도 별로 없지만 정신력과 삶의 지혜로 거대한 제국을 어떻게 물리쳤는지를 웅변적으로 나타내주는 장면이다.

플래툰이 엄청난 흥행을 거두며 베트남 전쟁을 화두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전쟁에 찬성했던 사람이나 반대했던 사람 어느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심하게 말하면 제 멋대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했다. 진지한 고백이라는 측면에서는 큐브릭의 이 작품이 훨씬 뛰어난 성과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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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긴 영화다. 그만큼 여운도 길었고 감동도 길었다.
스토리를 아주 짤막하게 요약한다면 귀족 출신의 젊은 여자가 하류층 출신의 젊은 남자에게 눈이 맞아 매우 돈이 많은 약혼남과 가족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이라면 주제라면 무척 흔하게 보던 이야기다. 처음 시나리오를 보고 헐리우드의 영화제작자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하는 것도 얼마간 이해가 간다.
하지만 똑 같은 대상이라도 만들어내는 솜씨에 따라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감독은 여러가지 우려를 떨쳐버리고 정말 멋진 솜씨로 대작을 만들어간다.

배가 처녀 출항을 하다가 빙산에 부딪혀 가라앉았고 많은 사람들이 구출되지 못해 죽었다는 것은 이미 모두들 알고 있는 이야기다. 모두 다 아는 것을 생각하던 그대로 보여준다면 보는 사람도 고역이고 더더욱 만드는 사람에게도 의미 없는 행위일 것이다. 감독은 이 배를 당대 사회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상징으로 그려내었다.  
처음 배가 출항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장관이라고 느끼게 된다. 선장이 출항을 명령하자 조타수가 키를 잡고 명령이 전화를 통해 다시 기관실로 전달되고 이들의 지시를 따라 수 많은 화부들이 석탄을 집어넣자 증기기관이 움직인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배의 외부에서는 보기 어려운 많은 인간들의 움직임들을 드러낸다. 각각의 층에는 거기에 맞는 역할이 있는데 이는 인간이 조직해낸 사회와 유사한 연관성이 있다.
물론 배의 맨위에서 명령을 내리는 선장과 더운 기관실에서 석탄을 부어넣어야 하는 일꾼들과의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다. 이 배는 손님들을 위해서도 서로 다른 계층을 만들어 놓았다. 일등, 이등, 삼등이라는 엄격한 구분은 손님들의 신분과 그대로 연결되고 승무원들은 여기에 맞추어 서비스를 차별화한다. 일등석에는 봉사를 삼등석에는 통제와 감시를 하는 것이다.
당시 배가 만들어진 아일랜드에서는 많은 실업자들이 발생해 있었다. 이들을 대거 고용해서 배가 만들어졌는데 다 만들고 나서는 다시 이들을 실어다가 꿈 많은 신대륙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런 사람 중에 하나가 바로 남자주인공 도슨이었다.
배를 타기 위해 포커판에서 그가 보여준 배짱과 운은 결코 범상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여주인공은 유럽의 명문귀족 집안 출신의 규수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도전적인 성격도 얼굴에 드러난다. 그녀의 어머니와 약혼남이 함께 여행하게 되는데 그들을 위한 짐은 엄청난 분량이다.
물론 이 둘이 배안에서 머무는 공간 또한 높이와 부피면에서 엄청난 격차가 있다.

여기까지 있는 배와 등장인물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도입부를 마친 감독은 서서히 주제를 드러낸다. 영화가 대상으로 삼는 시기는 첫번째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얼마전이다. 한편에서 근대화를 통한 평등과 자유에 대한 욕구가 활발히 일어났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귀족들을 비롯한 기득권층의 특권고수 노력도 만만치 않았다. 1830년대에 쓰여진 스탕달의 <적과 흑>을 보아도 귀족들과 신생 부르주아들의 밀고 당기는 갈등들이 많이 드러난다.
이렇게 두 계급은 서로를 경멸하거나 무시하려 들면서도 상대방을 종종 인정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미국의 신흥 부르주아들은 손에 잡히는 부로 자기 만족을 하면서도 항상 가슴 한구석에는 유럽사회의 귀족들이 누리고 있는 지위를 부러워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거금을 들여 엄청난 규모의 미술품으로 집안을 가득 채우는 것으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흉내를 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미술관이 뉴욕의 프릭 컬렉션이나 카네기의 휴이트 하우스다.
미술품 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역시 혈연일 것이다. 그래서 거액을 들여 명문귀족들과 결혼을 해서 혈통 좋은 가문으로 격을 높이려는 야심찬 시도를 했다. 당시 미국사회의 밴더빌트 (그 이름을 딴 대학이 아직도 명문의 대열에 있다)를 비롯한 몇몇 도둑 재벌들이 아주 야비한 수단으로 번 돈을 그렇게 고상한 목적을 위해 소비하였다.
여주인공의 가족은 유럽의 이름있는 귀족 집안이지만 경제적으로는 거의 파탄에 이르기 일보 직전이었다. 반면 여주인공의 약혼남은 미국에서 철강산업으로 큰 부를 거머쥔 신흥 부르주아다.
영화의 여주인공과 약혼남은 그렇게 맺어지려는 관계였고 정략결혼을 마무리짓기 위해 이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가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결혼의 한쪽 파트너인 여주인공은 자신이 스스로 진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놓여진 복잡한 사회관계에 눌려 사는 것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배 뒤편으로 가 막 물위에 뛰어들어 세상을 하직해볼까 하는 순간 누군가가 나서서 막아준다. 물론 남자주인공의 등장이다.
이 소년은 아까 배표를 구하기 위해 과감한 배팅을 하는 결단력과 기회 포착력을 보여주었다. 이제 관객은 그가 한 소녀의 삶에 대한 회의를 불식시키기 위한 논리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저쪽을 선택하지 않게 만드는 언변도 갖추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둘 사이에는 무척 깊은 벽이 있다. 3등석 손님의 목숨을 건 행위도 처음에는 강도로 오해 받았고 조금 뒤에는 기껏해야 지폐 몇 장으로 처리될 정도였다. 잠시 시비가 있다가 그는 1등석의 저녁식사까지 초대 받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엔젤이 하나 등장한다. 장사를 통해 새롭게 졸부가 된 남편을 둔덕에 1등석에 올라탄 부인이었는데 주변의 전통 귀족분들은 결코 그녀를 동류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출신이 귀족적이지 못해서 천박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무척 뚱뚱한 모습의 그녀에게 우리는 교양을 별로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남자주인공을 여러모로 위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미는 발견하게 된다.
어쨌든 이런 구도속의 남녀 주인공이라면 당연히 온갖 난관을 뚫고 서로에게 접근하게 된다. 물론 처음 둘 사이를 가로막은 것은 나뉘어진 층과 마찬가지로 서로의 내면에 담긴 거리감이다. 도슨은 여주인공이 비록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변화를 추구했음에도 여전히 마음 속을 굳게 차지하고 있는 허영에 대해서 야유를 보인다. 한발씩 가까워지던 두 사람은 3등실 손님들의 정말 자유로운 춤무대에 와서는 거의 하나가 된다. 마지막 단계는 물론 짧지만 아름다운(?) 사랑 나눔이다.
약혼자와 그의 보디가드가 총을 들고 쫓아오는 상황은 어떻게든 피했지만 이제 배 자체가 빙산에 부딪히는 대형사고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결국 모든 문제는 사람이다. 밤에 무리하게도 질주해서 신문의 1면을 장식하려던 선주와 선장의 오만함은 이 때가 빙산이 내려오는 시기라는 것을 너무 쉽게 무시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정말로 비참했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구명보트도 제대로 없는 상황에서 바다로 내던지게 된 것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인간의 오만에 대한 비판과 속물근성에 대한 야유를 가득 담은 메시지들이 서서히 모습을 내보인다.
가라앉는 배 위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은 정말 다양하다. 선장은 모든 책임을 지고 그대로 배위에서 운명을 같이한다. 선주는 자본주답게 조심스럽게 구조보트 위에 몸을 숨긴다. 아직 모든 돈을 다 잃은 것은 아니니까 그도 이 위기만 넘기면 된다. 선원들이 경보신호를 전하는 방식도 아직 계급간의 차이점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다. 아직 상황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던 1등석 손님들은 여전히 파티를 즐기고 그녀의 하인들에게 주문을 하고 있다. 이때도 여전히 3등석 손님들에게는 밖으로 나와 구명보트를 탈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배밑창에 남아있던 어린아이와 그녀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또 하나의 슬픔을 느끼게 된다. 말이 안통하는 관계로 제대로 경고를 듣지도 못했고 물건을 챙기느라 미처 대피하지 못했던 두 사람은 정말 자신에게 선의를 베풀려던 도슨의 노력을 거부하였고 결국 물살에 휩싸이고 만다. 말 못하고 기록에도 없던 무수한 민초들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난파선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의 모습도 솔직하게 그려진다. 선원들이 배려해주어서 구명보트에 타고 있었지만 바다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하러 가자는 목소리에 대해 아무도 동조하지 않는다. 평소에 그들이 소리 높여 주장하던 혈통과 행동의 고상함 절도 있고 우아하던 예절들도 그들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자연의 위력 앞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전혀 인간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도 구명보트에 자리가 충분해서 다음 차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여자나 노약자를 배려했다고 하지만 자기 것이 없다는 현실을 깨닫자 갖은 수단을 발휘해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한다. 이들에 비해서 항상 출신이 천하다고 경멸당하던 뚱뚱하고 우아하지 못하던 평민 출신의 여인만이 참된 의미의 ‘바람직한’ 인간성을 보일 따름이다.

예전에 타이타닉의 침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모든 사람들이 엄청난 위기 속에서도 절도 있게 행동해서 노약자를 먼저 구명보트에 태웠고 바다에 빠져 자신들이 추워 죽을 처지에 놓여있었어도 결코 구명보트에 타서 전체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영화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나서 이 이야기와 비교해보자. 사실과 인식, 그리고 인식이 변해서 만들어진 신화와는 엄청난 격차가 있는 것이다. 원래 인간은 이기적이고 욕망에 충실할 뿐이다. 가끔 스스로의 욕망을 극복한 척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고상하다고 밖으로 내세웠을 따름이다.

원래 노블리즈 오블리제라는 말은 용감한 사람들이 그만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배에서도 몇몇은 그런 용감함을 보낸다. 배를 지휘했던 선장, 만든 사람 노귀족들은 전통적인 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어차피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게 된다.
정말 감독이 보이고 싶어했던 것은 몇몇 용감한 귀족들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체면이고 인간성이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다수의 귀족들이었다. 이들의 몰염치한 행태들을 통해 카메론은 가라앉는 배와 함께 위선과 고집으로 가득찬 한 시대의 소멸을 드러내려고 한다.
경멸의 대상이 되는 그런 존재들이 행세하려고 하는 사회에 대한 야유를 담고 있다. 혈통 자체만으로 대접을 받으려는 그런 시대는 이런식으로 끝나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그런 흐름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정말로 남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들은 오히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지 않겠냐 하는 것을 다시 드러내려고 한다. 도슨과 여주인공이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서로를 위해 여러 차례 보여주었던 헌신이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고 움직이는 원동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모여살았던 사회는 결코 평등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분야는 역시 예술이다. 1700년대 후반을 살았던 하이든은 늘 하인의 복장으로 하인의 신분에서 귀족의 식사시간을 위해 연주를 해야만 했다. 모짜르트는 그런 꼬락서니가 싫어서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독립의 길을 걸으려 했다. 그래서 정말로 고생스럽게 살았다. 하지만 벌써 베토벤의 시대에 와서는 후원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거꾸로 후원자들에게 큰 소리를 칠 정도로 입장이 변하게 되었다. 귀족들의 초상화를 번듯한 모습으로 그려주면서 밥벌이를 해야 했던 예술가들이 이제 자기 식대로 자기가 본대로 사람을 그리려고 했다. 농부를 대상으로 했던 밀레는 공산주의자로 취급되었고 감자먹는 사람이나 창녀까지도 그렸던 고흐는 전혀 이해되지 못했다.
당연히 수입은 형편없었지만 그들은 결코 고집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인상파라고 불리우는 일군의 화가들의 작품에서 받게되는 감동은 이런 도전과 노력의 산물이다.

타이타닉은 결국 그러한 거대한 전환점을 드러내기 위한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한 그것이 주인공 도슨이 화가로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중간에 보면 그림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을 차별하면 안되겠다라는 메시지를 담는다고 해도 주인공이 정말로 지위도 없고 재능도 없고 성격도 않좋다면 그건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설정하는 것이 도슨이 신분이 주는 제약만 빼고는 모든 점에서 훌륭하다는 것이다. 우선 처음 단계에 용기와 재치를 보여주었다. 다음으로는 화가로서 너무나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이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를 알아보는 여주인 또한 그림에 대한 너무나 훌륭한 안목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앞부분에서 여주인공의 미술 소장품들로 피카소, 모네 등의 걸작들이 나오는 것이다. 이들은 미술에 큰 관심이 없는 관객들도 알만한 작품들인데 대부분 주요 박물관에 걸려있는 것들이다. 정말로 여주인공이 이런 안목이 있었다면 그녀는 빈손에서 출발했어도 그림 거래만으로 정말 대단한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건 감독의 트릭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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