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고의 작품을 영화로 만들기는 쉽지 않다. 깊이 있는 사색에서 나온 통찰을 소설이 아니고 영화로 보여주는 것은 범상한 감독에게는 무리한 일이다.
그래도 앤서니 퀸 주연의 작품은 수작이라고 평할 만 하다.

영화의 남자주인공은 꼽추다. 어머니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자신에게 주어진 종치는 일만 하고있다. 성당의 종탑에서 내려다보면 세상의 사물들은 조그맣게 보인다. 그 거리만큼 이상으로 그와 세상과의 사이에는 깊은 강이 흐르고 있다. 아무도 그에게 다가오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세상속으로 다가가고 싶다. 적어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욕망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가 주인님인 신부의 명령에 의해 에스메랄다라는 미모의 집시여인을 납치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덕분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여주인공 역할인 이 여인은 매혹적인 춤을 추며 여러 남자들의 유혹이 담긴 시선을 받는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분명 미덕이 있다. 거지들에게 붙들려 죽을 뻔한 3류 시인을 살리기 위해 ‘위장’ 결혼도 해준다. 작은 욕망에 쉽게 분노하는 하류세계 속에서 그녀는 하나의 아름다운 꽃이고 나아가 성녀의 수준으로 대우받는다. 그녀는 거지속에 같이 머무르지만 분명 다르고 그런 다름이 서로를 구별 짓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고 포용해서 한 단계를 높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꼽추는 에스메랄다의 호의에 의해 한결 가벼운 처벌을 받았고 이를 감사하며 한걸음 나아가 죄에 대해서까지 포용하고 베푸는 그녀에 대해 감히 애정까지 품게 된다. 그가 세상으로부터 받게 된 첫번째 호의였기에 이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애정은 그만큼 맹목적일 만큼 절대적이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애정이 머무르는 것은 잘생기고 멋진 수비대장이었다. 그는 이미 귀족 처녀를 약혼자로 두었지만 프랑스 남자답게 풍류를 즐겨보려고 시도한다. 둘이 은밀히 만나 서로를 떠보다가 사랑을 맺으려하는 순간에 날카로운 칼로 누군가가 수비대장을 찔러 버린다. 이 사건의 범인으로 에스메랄다가 잡혀서 마녀로 몰려 사형을 선고 받게 된다. 고문에 의한 자백유도를 최선의 수단으로 여겼던 당대의 우울한 풍경을 보여주며 교회와 권력의 우매함을 드러낸다.

에스메랄다가 위기에 빠졌는데 누가 구하러 나설 것인가?
그녀는 짧은 기간이지만 자신이 마음을 주었던 수비대장이 나서주기를 바라지만 그는 진실을 밝히는 것을 비롯해서 아무것도 도와주기를 거부한다. 그냥 될대로 되도록 놓아둔채 파리를 빠져나가 버린다. 꼽추의 신부는 이 대목에서 이중적인 자세를 보이며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아예 존재조차 없애버리려 한다.
그의 약혼녀와 그 어머니들이 잠시 보여진다. 이들에게는 결코 남을 이해하려는 배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냥 저런 것들과는 접촉하고 싶지도 않을 뿐이다.
이들을 모습을 차례대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지배계급들의 무책임, 위선, 허위의식들 이다. 겉으로는 뻐기고 자기들만 고귀한 척 나서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요모양 요꼴로 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그럼 누가 나서야 하냐면 역시 주인공인 꼽추밖에 없을 것이다.
위기에 빠진 여인을 구하기 위해 그는 두 가지 미덕을 보인다. 하나는 용기다. 창칼을 치켜든 군병들 사이로 뛰어들어 여인을 낚아채는 것은 보통 사람이 발휘하기 어려운 용기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혜다. 성당이 가지고 있는 불가침 특권을 교묘하게 활용해 안전한 보호처로 만들어가는 작업 또한 보통 사람을 넘어서는 지혜를 보여준다.

영화의 앞부분이 보여주었던 조화롭고 질서 있던 사회를 제대로 보니 이렇게 뒤집어지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가장 무시 받던 꼽추 보다도 용기도 없고 지혜도 없는 모순덩어리의 인간들로 꽉 찬 세상을 보며 위고는 답답함을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꼽추에게는 사랑의 메아리가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에스메랄다는 달아나려고 하고 거지들이 몰려온다. 꼽추와 거지의 대결은 어쩌면 안타까운 행동이다. 에스메랄다를 구한다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각기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지만 결과는 서로간의 충돌이다.
이들의 뒤에 권력이 움직인다. 왕의 명령에 따라 궁수들과 창검병으로 이루어진 군대는 빠르게 움직여 거지들을 해치운다. 한점의 고려도 없이 그들의 화살은 거지들의 가슴에 꽂이고 창검은 살을 베인다. 바로 이 것이 중세 사회였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결정과 시행에 대해 단 한 순간의 주저함도 없다. 하층민의 목숨이란 그저 그런 것일 뿐이다. 이런 비참한 모습은 단지 중세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1800년대 후반까지도 프랑스 사회에서는 주기적으로 민중들의 봉기가 있었고 몇번의 성공을 제외하고는 이런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위고의 말년에 있었던 파리코뮨의 봉기와 실패도 영화의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위고는 과거를 그려나가면서 현재를 제대로 보게하도록 만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영화 속의 에스메랄다는 그 화살 중 하나를 맞고 숨을 거둔다.
허무한 죽음 뒤에서 꼽추는 자신에게 군림하던 신부를 멀리 던져버리고 에스메랄다의 시체 옆에 가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 그리고 세상 이편에서 이루어지지 못했던 사랑은 저편에서는 이루어진 듯 보인다.

영화속에서 벌어진 일들의 기록자는 누구일까? 당연히 시인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둘러본다. 그리고 열심히 기록하지만 그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보전해야만 하기 때문에 자신의 명목상 아내이며 목숨의 은인인 에스메랄다를 구하러가는 행렬에는 유감스럽지만 동참할 수 없다는 자세를 보인다.

늘 세상을 위해 발언하고 변화를 위해 더욱 노력하고 싶었던 위고였지만 항상 스스로에게 부족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런 아쉬운 점을 반영시킨 인물이 바로 여기의 시인이 아니었을까? 조금 더 나아가면 세상의 모든 지식인들이 보이는 말과 삶이 일치하지 못하는 이중적인 자세를 비판한다고도 보여진다.

이 소설을 텍스트로 사용해서 최근에 디즈니에서 나온 영화도 있다. 하지만 이건 졸작이다. 최근의 헐리우드 영화에서 비극적인 결말로 마무리되는 작품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원작에서 슬프게 죽어야 했던 인어공주를 살려내는 솜씨야 나도 동감하며 어물쩍 넘어갔지만 그건 동화고 <노틀담의 꼽추>의 주인공들의 역할을 제멋대로 바꾼 것은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운 행위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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