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 시절 열린책들 세계문학 103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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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오웰은 1922년부터 1927년까지 버마에서 제국경찰로 근무했는데, 소설은 1934년 출간된다. 이튼 스쿨을 졸업한 이듬해부터 버마에서 근무를 시작해 스물 네살 때 까지 버마에 거주한다. 첫 사회 생활을 한 셈인데 이 때 목격한 제국과 식민지의 여러 모습이 이 소설 속에 담겨 있다.  

  오웰은 특유의 시니컬한 태도로 인물들을 그려간다. 주인공을 제외하곤 선악의 경계가 분명한 모습이다. 식민지에 거주하는 백인들은 악의 화신일 정도다. 이들은 동양 문화와 황인종에 대해선 작품 내내 혐오를 드러내며 무시로 일관한다. 식민지인인 버마 사람들은 이들 백인들에 빌붙어 사리사욕을 채운다. 버마인들은 편히 살 길은 백인들 곁에 빌붙는 것임을 생득적으로 깨닫고 온갖 술수를 동원해 곁에 붙어 돈과 권력이라는 콩고물을 받아먹고 있다. 선한 인물로 그려지는 사람은 둘이다. 주인공인 백인 플로리와 그의 버마인 친구 베라스와미이다.  

  플로리는 백인임에도 불구하고 버마인과 동양 문화에 대해 비교적 호감을 갖는 사람이다. 이로 인해 같은 백인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이런 그에게 베라스와미는 말벗이 되어주며 인종을 뛰어넘는 우정을 쌓는다.  버마인 치안 판사 우포킨은 베라스와미를 눈에 가시처럼 생각하며 해치우려는 계략을 쌓는데 두 친구의 우정은 이 와중에도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다.  

  버마인들에게 정서적 공감과 동정심을 갖던 플로리가 식민주의자로서의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는 모습이 있다. 버마인의 반란을 진압하고 베라스와미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는 이리 말한다. "내가 경찰에게 그들(버마인)을 향해 똑바로 쏘지 말고 머리 위로 쏘라고 말한 것이 유일한 옥에 티요. 그게 정부 규칙을 위반한 모양이오. 엘리스도 그것에 약간 불만이었소. '기회가 있었는데도 왜 검둥이들에게 직접 총을 쏘지 않았어?'라고 나에게 물었소. 나는 저들에게 발포하면 군중 속에 섞여 있는 경찰이 총에 맞을 수도 있다고 말했소. 엘리스는 어쨌든 그들 또한 검둥이가 아니냐고 하더군요." 그리 버마인들을 사랑하던 플로리도 경찰을 보호해 질서를 유지할 생각 뿐이지 버마인들의 생명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다.  

  버마인 베라스와미는 이에 어떻게 반응할까? 본래 베라스와미는 버마인들이 이 정도의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산 것도 영국인들의 은혜 덕분이라며 감사하던 사람이다. 플로리의 어떤 모습에도 그는 실망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대화 중에 베라스와미는 이렇게 말한다. "버마인들이 스스로 무역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기계와 배를 만들고 철도와 도로를 건설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당신들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지요. 만일 영국 사람들이 이곳에 없다면 버마 정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즉시 정글을 일본에 팔아먹을 것입니다. ..... (영국) 관리들은 우리를 문명화시켜 당신들 수준까지 끌어올리죠. 이것은 자기희생의 빛나는 기록입니다." 

  제국주의에 의해 황폐화된 인물들의 모습을 그리는 데 이 소설이 한 역할을 인정하지만 소설의 시종 버마의 자립과 독립의 가능성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오웰의 비관주의가 식민지 경험을 한 한국 독자의 가슴마저 답답하게 한다. 난 에드워드 사이드가 했다는 이 말을 되뇌일 뿐이다. "Orwell had no great love for Indians or Blacks or Jews."(<Culture and Resistance>) 'great love'를 바라는 건 과욕이겠지만 말이다.

着語  : 이 책은 같은 역자에 의해 <제국은 없다>란 이상한 제목으로 번역된 적이 있다. 원제가 <Burmese Days>이니 직역한 <버마 시절>이 더 낫다. 열린책들에서 역자의 번역을 새로 살렸는데 열린책들의 장기이다. '고급소설 읽기'를 추구한다는 열린책들의 방향과 어울리는 행보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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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08-04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niqyahoo@empal.com 입니다.


여담이지만 알라딘의 바뀐 로고는 후져보여요-- 한겨레 신문도 예전 녹색바탕의

모양이 좋고 지금의 시꺼먼 글자는 답답하고 별로지만, 최악까지는 아닌데 말이죠 쩝

파고세운닥나무 2010-08-04 14:16   좋아요 0 | URL
이메일로 파일 보냈습니다.

친구 말로는 곰으로 보시려면 코덱인가를 받아야 한다네요. 아까 보니 곰홈페이지 들어가면 쉽게 받을 수 있더군요.

저도 새 알라딘의 로고가 촌스럽다는 생각입니다. 색깔도 그렇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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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 Munich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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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뮌헨>은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벌어졌던 한 테러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검은 9월단’이라는 팔레스타인 테러단이 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선수단을 인질로 잡다 살해한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 테러에 간여한 11명의 팔레스타인 지도자를 목표로 삼고 테러단을 조직한다. 테러는 또 다른 테러를 낳고 조직원들마저 테러에 의해 죽어가는 모습을 영화는 보여준다.

  스필버그가 만드는 역사물을 좋아한다. 역사가 자기인정과 자기부정간의 싸움이라면 스필버그는 그 다툼의 모습을 꽤 또렷하게 보여준다. 스필버그는 유대인이다. <뮌헨>을 두고 감독이 '유대인 편에 섰'다며 무어라 하지만, 영화를 보고 유대인들도 불쾌해 했다고 한다. 스필버그는 영화 개봉을 앞두고 “나는 이 주제를 건드릴 때부터 친구를 잃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는데 그가 말한 친구는 유대인을 두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스필버그가 누구의 편인지는 자신만이 아는 일일테고, 난 영화를 보며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잠깐 생각해 봤다.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원들과 함께 한 주인공 아브너는 자신이 이스라엘 테러리스트임을 숨기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왜 유대인과 그토록 싸우냐는 아브너의 질문에 청년은 이렇게 대답한다. "고향은 우리의 전부니까.(Home is everything.)" 이 단출한 이유 하나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싸우는 이유의 전부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족들을 떠올리는 듯 부엌 식기자재 상점 앞에 혼자 선 주인공 아브너에게 다가간 정보원 루이는 말한다. "많은 대가를 치렀지만 집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지." 아브너는 테러의 임무를 감당하는 중에 태어난 딸아이와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아브너는 운이 좋은 편인데, 고향이 전부라던 팔레스타인 청년을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유대인 감독의 눈을 빌어 '뮌헨 사건'을 봤으니 이젠 팔레스타인 사람의 눈을  빌려보자. 영화는 2005년에 개봉했다. 2003년에 세상을 뜬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 영화를 보았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스필버그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영화의 사건과 사이드의 삶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 유대인 테러 조직이 제거 목표로 삼은 11인 가운데는 사이드의 친척이 있다. 시인이기도 한 카말 나시르(Kamal Nasir)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던 중 레바논에서 이스라엘 특공대에 의해 사살된다. 이 소식을 접한 사이드는 아카데미의 평온한 삶을 버리고 1977년 팔레스타인 민족회의에 가입한다.   

  사이드에게 있어 집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영국령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습니다. 열세 살 때인 1948년에 유엔이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자, 팔레스타인인이었던 우리 가족은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카이로로 피난을 가야만 했습니다.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박탈당한 채 망명길에 올랐다는 점에서 저는 이스마엘과도 같았지요. 그 때 우리 집을 접수해 살았던 사람은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였습니다. 내 집을 빼앗은 사람이 <나와 너>라는 책의 저자라는 사실은 그 후 오랫동안 저를 괴롭혔습니다." 집과 고향을 빼앗겨 괴로웠던 사이드는 또 다른 망명인 아도르노로부터 위안을 얻는다.

 아도르노는 <미니마 모랄리아(Minima Moralia)>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기 집에서 편히 쉬지 않는 것이 도덕의 일부가 된다." 도덕적으로 살려 떠난 망명이 아니지만, 사이드와 아도르노는 이 말에 어느 정도 편히 쉬었을 듯 하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어찌 해결할 것인가? 영화의 흠이라면 미국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 못함이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당사자를 떠나 미국이 쥐고 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영화에선 미국이 꽤 공정한 중재자로 그려진다. 팔레스타인 지도자를 암살하려는 테러범을 미국인 요원들이 막아서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사랑하지만, 부시 정부에는 비판적"이라던 스필버그가 좀 더 미국을 비판해 주었으면 했는데 아쉽다. 그래도 썩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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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 2010-07-29 0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뻔한 내용으로 풀 줄 알았는데, 의외의 울림을 가져왔던 영화 같아요. 정말 의외의 행보!

파고세운닥나무 2010-07-29 15:14   좋아요 0 | URL
균형감도 있다는 생각도 아울러 들었구요. 울림이 있었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마교 사전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8
한소공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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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차오 사전(馬橋詞典)>은 중국현대문학사에서 꽤 중요한 작품이다. 소설은 1996년에 발표되는데, 작가는 80년대 중반부터 '뿌리찾기(尋根) 문학'을 주장한다. 뿌리란 민간과 민중의 전통이란 의미겠다. '죽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던 중국이다. 10년간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휩쓸고 간 중국이다. 80년대 중반에서야 작가들은 어느 정도 정치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문학적 실험을 해갈 수 있었다. 몰래, 몰래 읽어오던 세계 문학으로부터 받았던 자극들이 소설의 갱신을 부추기기도 했다.  특히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이 영향을 미치는데, 마르케스 등이 보여준 마술적 리얼리즘은 표현은 새롭되 소재는 민족의 것을 취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케 한다.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보여준 동양적 소재의 소설도 깊은 영향을 끼친다. 작가 위화는 자전적인 글에서 가와바타의 소설을 젊은 날 탐독했다는 얘기를 한다. 장이머우의 영화 <붉은 수수밭>의 원작인 <붉은 수수 가족(紅高梁家族)>(모옌)도 뿌리찾기 문학 계열로 분류한다.  

  소설의 배경인 마차오는 초나라의 굴원이 유배된 후 투신한 멱라강 주변에 위치한 곳이다. 벽촌이라 인근 마을과의 교류도 흔치 않다. 소설의 화자는 문혁 시기에 이 곳으로 와 지식청년으로 일한다. 화자의 눈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은 기이하기만 하다. 행색 뿐 아니라, 독특한 말들이 귀에 박힌다. 예컨대 이런 경우다. '깨어나다(醒)'는 이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어리석다는 뜻이다. 이 마을에서 투신한 굴원은 <어부사(漁父辭)>에 이런 글을 남긴다. "중인(衆人)이 모두 취해 있는 가운데 나 홀로 깨어있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굴원을 보면 깨어있음이 어리석은 게 되고, 취함이 오히려 지혜로운 게 된다.  

  삶(生)과 관련한 말들도 특이한데, 남자 서른 여섯살과 여자 서른 둘을 이들은 만생(滿生)이라 부른다. 살 만큼 살았다는 뜻이다. 여기서 더 나이를 먹으면 천생(賤生)이 된다. 가장 고귀한 삶은 귀생(貴生)이라 하는데, 여자 열여섯, 남자 열여덟 이전을 말한다. 이후의 삶은 일과 결혼으로 고되니 이때까지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이다.  

  이런 말들을 마차오 사람들의 현실주의나 이기주의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고통스런 중국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그리 박대할 일도 아니다. 국가와 관은 언제나 그들을 괴롭히는 존재였고, 그들은 그 와중에도 태어나 결혼하고 아이 낳고 죽어갔다. 변덕스런 관에 맞서는 변치 않는 그들의 지혜가 말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한샤오궁은 근대 중국의 첫 소설인 <광인일기(狂人日記)>로부터 시작되는 비판정신과 마술적 리얼리즘의 기법을 혼합해 재미 속에 날카로운 비판을 숨긴 소설을 보여준다. 희로애락이 섞인 마차오 사람들의 말들을 새기며 나도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시간을 가졌다.

  

                      韓少功(1953-)

着語 : 책의 이름을 <마교 사전>이라 했는데, 마교는 지명이니 '마차오'라고 표기하는 게 맞겠다. 작가 이름도 '한샤오궁'으로 쓰는 게 맞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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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07-26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즈음 닥나무님 덕분에 제 문학적 영토가 점점 넓어지는 기분입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7-26 22:1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중국현대문학은 제 전공인데, 번역물이 너무 적습니다. 한국에선 중국의 인기 작가라 할 만한 사람도 없지만 루쉰과 위화 정도를 제외하곤 전작품이 번역된 경우도 없구요.
중국문학에 대한 인상은 저 역시 재미 없고, 촌스럽다는 생각이었어요. 체제도 다르구요. 그런데 문학은 어딜 가나 인간의 얘기잖아요? 위 리뷰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도 마차오 사람들 같은 시대를 보냈고, 해서 공감할 부분이 있는거구요.
중국현대문학 읽어보실 계획이라 하셨는데, 저도 같이 공부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미지 2010-07-26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닥나무님 서평을 읽고 옛날에 신주처럼 모시던 굴원시집을 찾았더니 없습니다...^^ 저도 닥나무님처럼 잃어버린(아니, 저의 경우 내다버린) 기억을 찾아 헌책방순례를 시작해야 하려나 봅니다. 좋은 데 추천 좀 해주시지요..
중국어 표기 관련 여쭤보고 싶은게 있습니다.
꼭 원음대로 표기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한자문화권에서 살았고, 마오쩌둥보다 모택동이 표기와 전달에서 더 쉽습니다. 그런 실용적 문제도 있겠지만, 애초에 한글이란 것이 중국말과 한국말의 차이를 인식하고 그 차이에 충실한 일종의 지역어로서 만들어진 것일텐데요, 우리가 한자를 한글식으로 전용해 온 역사에는 꽤 흥미로운 측면이 많이 있거든요... 통일보다 병용은 어떨까요? 하나에 대해 다른 하나가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밝히는 과정 자체가 어쩌면 문화사적으로 꽤 중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한문 표기에서는요. 고유명사는 좀 달라지나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7-26 23:10   좋아요 0 | URL
고유명사는 통상 1911년 신해혁명을 기점으로 그 이전은 한글한자음으로, 이후는 현대중국어 발음으로 표기합니다. 신해혁명을 중국 근대의 출발로 보기 때문이구요. 기점을 달리잡는 시각도 많구요. 그런데 이 기점이 좀 불편한 게 지명은 그렇다 쳐도, 인명 같은 경우는 사람의 삶이 장시간인데 어디를 기준으로 할 지 어려워지지요. 그리고 긴 기간을 다루는 문학사 같은 경우는 같은 지명을 달리 표기해야 할 경우도 생기니 하나로 통일해서 표기하기도 하구요. 다시 말씀 드리지만 원칙은 아니고 통상 이런 방식으로 표기합니다.
말씀하신 한글과 한문의 문제는 새겨들을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마오쩌둥을 예로 드셨는데, 리영희 선생은 루쉰이 아닌 노신으로 표기하는 게 맞다고 줄곧 주장하시구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한문문화권에서 문화로만 중국을 대하던 시절이 있었죠. 지금은 좀 다르다고 봐요. 이전보단 중국과 중국어, 중국 문화가 실용적 의미를 더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중국어 발음 표기도 유용하다는 생각이구요. 李白을 이백이라 하지 않고, 리빠이라 표기하는 건 문제구요. 여담인데 이백의 시대엔 이백이 자신의 시를 읊는 소리와 우리가 현재 그의 시를 한글한자음으로 읊는 소리가 거의 비슷할 거라고 합니다. 재밌는 게 우리는 한자의 원 발음을 많이 유지하고 있는데 현대 중국인들은 상당히 다른 발음을 하고 있는거죠. 어학 수업에서 들은 얘기에요^^
쓸만한 답변이 되었는지요?

미지 2010-07-27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거 재밌는 얘긴걸요... 생각에 또다른 방향이 덧붙네요... 그, 저는 이백이나 두보 시를 한글한자음으로 읽으면서 이걸 그 리드미컬한 중국어로 읊으면 맛이 또 다르겠다는, 더 멋질 거라는 일종의 환상을 갖고 있었던 듯한데요. 한글이 탁월한 발음 기호인 것은 분명한가 보군요.

이것도 여담이지만, 저는 의미와 소리 사이의 차이를 우리가 언어, 문화적으로 계속 유지하면 더 재밌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시대착오적이긴 합니다만..

파고세운닥나무 2010-07-27 13:27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의견은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네요.
시대착오적이진 않구요^^

루쉰P 2010-11-0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뒤지다 보니 제가 읽고 싶은 서적들이 나오는군요. 하기사 루쉰 선생 보다는 노신 선생이라고 하는 것이 더 강렬하고 확 와 닿거든요.^^ 저도 표기명을 바꿔야 할 듯 합니다. 괜히 루쉰이라고 했네요. 닥나무님의 말씀을 들으니 굳이 루쉰이라고 표기를 하지 않아도 될 듯한데요. 더 와 닿는 표현으로 쓰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아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1-08 19:18   좋아요 0 | URL
닉네임을 바꾸셨군요?
장단이 있을 듯 합니다. 옳다 그르다의 문제는 아닌듯도 하구요.
 
<마을이 학교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마을이 학교다 - 함께 돌보고 배우는 교육공동체 박원순의 희망 찾기 2
박원순 지음 / 검둥소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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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아름다운 가게'를 가는 일이다. 내가 가는 곳은 주로 헌책을 취급하는 곳인데, 지닌 책을 기증하기도 하고 책 구경도 한다. 기증하는 책에 비할 때 사오는 책이 많아 집안의 책은 점점 늘어만 간다. 아름다운 가게를 드나들며 설립자인 박원순이란 사람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마을이 학교다>와 함께 출간된 <아름다운 세상의 조건>에서 저자는 자신이 시민운동가가 된 이유를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아주 가난한 농촌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평생 농사를 지어 우리들을 공부시켰습니다. 그야말로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집안이었죠. ...... 저는 한때 일류학교를 나오고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검사를 했습니다. 변호사를 개업한 뒤 제법 돈도 벌었고 집도 샀습니다. 탄탄대로가 열려 있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닫고 보니 그 길은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내 집을 키워가고 좋은 자동차를 타고 별장을 사고 은행에 두둑한 통장을 두는 것은 하나의 탐욕의 길이었습니다. 그것보다는 가난하고 억울하고 약한 사람들과 함께 그들을 부축하고 그들을 돕는 것이 훨씬 보람있고 재미있는 길이었습니다."  

  박원순을 생각할 때면 늘 조영래 변호사가 겹친다. 두 분은 막역한 사이이기도 한데, '망원동 수재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을 함께 변론하며 조영래 변호사의 마지막 10년을 동행했다. 조영래 변호사에 대한 추모글('그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에서 저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5공의 엄혹한 군사독재정권과 민주화의 이행기라는 시대 상황은 조영래를 전설적 인물로 만들었다." 만약 역사의 신이 존재해 학비가 없어 중학교 시절부터 친구들을 가르치며 그 돈으로 학교를 다니던 조영래를 '법을 아는 전태일'로 사용했다면, 이젠 그의 후배 박원순을 역사의 신이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을이 학교다>는 박원순의 발품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교육의 대안과 미래를 꿈꾸는 교사, 학생, 활동가들을 만나고 얻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다. 교육에 정말 희망이 있는 걸까? 이 질문은 한국 현대 사회에서 던질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이다.  

  "이랑이 고랑 되고, 고랑이 이랑 된다"란 속담이 있다. 교육을 고리로 한 신분 이동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고랑은 앞으로도 고랑일 뿐이고, 이랑은 대대로 이랑일 뿐이다. 조영래, 박원순 변호사 모두 고랑에서 나 이랑이 된 격이다. 이들의 삶이 가치 있는 건, 애써 얻은 이랑의 삶을 마다하고 고랑의 삶들과 함께 하고 스스로 고랑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마을이 학교다>는 교육의 희망을 일구려 고랑의 삶을 마다하지 않는 교사, 활동가들과 그 안에서 자라나는 학생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책을 덮으며 이들 학교에선 조영래, 박원순 같은 이들이 다시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겐 이 책이 희망의 역할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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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헨드릭스의 책읽기 #15] 박원순의 낙관주의, 그리고 마을과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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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이 학교다 - 박원순 지음/검둥소 2010/05/24 - [헨드릭스의 책읽기] - 탈주, 코뮨 혹은 마을 그리고 약간의 공허함 2010/03/20 - [생각하기/가져온 글들] - 근대의 장례식을 누가 치를 것인가? 2009/04/14 - [헨드릭스의 책읽기] - 그래, 다시 마을이다! - 조한혜정, , 또 하나의 문화, 2007 2009/04/21 - [헨드릭스의 책읽기] - 놀아봐야 놀 줄 알지 - 마쓰모토 하지메, <가난뱅이의..
 
 
반딧불이 2010-07-23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분들을 알게 될 때마다 까닭없이 마음이 따뜻해져요. 역사의 신은 거들떠도 안보는 저 같은 존재는 대체 어디에 소용이 닿으려는지...씁쓸해지도 하면서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7-23 20:50   좋아요 0 | URL
무더위에 잘 지내시는지요? 시절이 수상해서 조영래 변호사를 더욱 떠올리게 됩니다. 박원순 선생님도 어려운 일에 부닥치면 "조영래 선배가 살아있다면 지금 어떻게 했을까?" 묻는다고 해요. 이젠 박원순 선생님께 물어봐야 할 차례도 된 것 같구요.
저는 올해 서른에 접어 들었습니다. 저도 제가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책을 통해서 좋은 분들 알아갈 때마다 '반딧불이'님처럼 따뜻한 마음 간직하려 한답니다. 그리 되려 조금씩 노력도 해보구요.
건강 하시구요.

미지 2010-07-27 0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조건 희망을 만듭시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7-27 14:22   좋아요 0 | URL
그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