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은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벌어졌던 한 테러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검은 9월단’이라는 팔레스타인 테러단이 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선수단을 인질로 잡다 살해한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 테러에 간여한 11명의 팔레스타인 지도자를 목표로 삼고 테러단을 조직한다. 테러는 또 다른 테러를 낳고 조직원들마저 테러에 의해 죽어가는 모습을 영화는 보여준다.
스필버그가 만드는 역사물을 좋아한다. 역사가 자기인정과 자기부정간의 싸움이라면 스필버그는 그 다툼의 모습을 꽤 또렷하게 보여준다. 스필버그는 유대인이다. <뮌헨>을 두고 감독이 '유대인 편에 섰'다며 무어라 하지만, 영화를 보고 유대인들도 불쾌해 했다고 한다. 스필버그는 영화 개봉을 앞두고 “나는 이 주제를 건드릴 때부터 친구를 잃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는데 그가 말한 친구는 유대인을 두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스필버그가 누구의 편인지는 자신만이 아는 일일테고, 난 영화를 보며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잠깐 생각해 봤다.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원들과 함께 한 주인공 아브너는 자신이 이스라엘 테러리스트임을 숨기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왜 유대인과 그토록 싸우냐는 아브너의 질문에 청년은 이렇게 대답한다. "고향은 우리의 전부니까.(Home is everything.)" 이 단출한 이유 하나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싸우는 이유의 전부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족들을 떠올리는 듯 부엌 식기자재 상점 앞에 혼자 선 주인공 아브너에게 다가간 정보원 루이는 말한다. "많은 대가를 치렀지만 집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지." 아브너는 테러의 임무를 감당하는 중에 태어난 딸아이와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아브너는 운이 좋은 편인데, 고향이 전부라던 팔레스타인 청년을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유대인 감독의 눈을 빌어 '뮌헨 사건'을 봤으니 이젠 팔레스타인 사람의 눈을 빌려보자. 영화는 2005년에 개봉했다. 2003년에 세상을 뜬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 영화를 보았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스필버그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영화의 사건과 사이드의 삶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 유대인 테러 조직이 제거 목표로 삼은 11인 가운데는 사이드의 친척이 있다. 시인이기도 한 카말 나시르(Kamal Nasir)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던 중 레바논에서 이스라엘 특공대에 의해 사살된다. 이 소식을 접한 사이드는 아카데미의 평온한 삶을 버리고 1977년 팔레스타인 민족회의에 가입한다.
사이드에게 있어 집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영국령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습니다. 열세 살 때인 1948년에 유엔이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자, 팔레스타인인이었던 우리 가족은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카이로로 피난을 가야만 했습니다.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박탈당한 채 망명길에 올랐다는 점에서 저는 이스마엘과도 같았지요. 그 때 우리 집을 접수해 살았던 사람은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였습니다. 내 집을 빼앗은 사람이 <나와 너>라는 책의 저자라는 사실은 그 후 오랫동안 저를 괴롭혔습니다." 집과 고향을 빼앗겨 괴로웠던 사이드는 또 다른 망명인 아도르노로부터 위안을 얻는다.
아도르노는 <미니마 모랄리아(Minima Moralia)>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기 집에서 편히 쉬지 않는 것이 도덕의 일부가 된다." 도덕적으로 살려 떠난 망명이 아니지만, 사이드와 아도르노는 이 말에 어느 정도 편히 쉬었을 듯 하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어찌 해결할 것인가? 영화의 흠이라면 미국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 못함이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당사자를 떠나 미국이 쥐고 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영화에선 미국이 꽤 공정한 중재자로 그려진다. 팔레스타인 지도자를 암살하려는 테러범을 미국인 요원들이 막아서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사랑하지만, 부시 정부에는 비판적"이라던 스필버그가 좀 더 미국을 비판해 주었으면 했는데 아쉽다. 그래도 썩 좋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