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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시절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03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평점 :
조지 오웰은 1922년부터 1927년까지 버마에서 제국경찰로 근무했는데, 소설은 1934년 출간된다. 이튼 스쿨을 졸업한 이듬해부터 버마에서 근무를 시작해 스물 네살 때 까지 버마에 거주한다. 첫 사회 생활을 한 셈인데 이 때 목격한 제국과 식민지의 여러 모습이 이 소설 속에 담겨 있다.
오웰은 특유의 시니컬한 태도로 인물들을 그려간다. 주인공을 제외하곤 선악의 경계가 분명한 모습이다. 식민지에 거주하는 백인들은 악의 화신일 정도다. 이들은 동양 문화와 황인종에 대해선 작품 내내 혐오를 드러내며 무시로 일관한다. 식민지인인 버마 사람들은 이들 백인들에 빌붙어 사리사욕을 채운다. 버마인들은 편히 살 길은 백인들 곁에 빌붙는 것임을 생득적으로 깨닫고 온갖 술수를 동원해 곁에 붙어 돈과 권력이라는 콩고물을 받아먹고 있다. 선한 인물로 그려지는 사람은 둘이다. 주인공인 백인 플로리와 그의 버마인 친구 베라스와미이다.
플로리는 백인임에도 불구하고 버마인과 동양 문화에 대해 비교적 호감을 갖는 사람이다. 이로 인해 같은 백인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이런 그에게 베라스와미는 말벗이 되어주며 인종을 뛰어넘는 우정을 쌓는다. 버마인 치안 판사 우포킨은 베라스와미를 눈에 가시처럼 생각하며 해치우려는 계략을 쌓는데 두 친구의 우정은 이 와중에도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다.
버마인들에게 정서적 공감과 동정심을 갖던 플로리가 식민주의자로서의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는 모습이 있다. 버마인의 반란을 진압하고 베라스와미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는 이리 말한다. "내가 경찰에게 그들(버마인)을 향해 똑바로 쏘지 말고 머리 위로 쏘라고 말한 것이 유일한 옥에 티요. 그게 정부 규칙을 위반한 모양이오. 엘리스도 그것에 약간 불만이었소. '기회가 있었는데도 왜 검둥이들에게 직접 총을 쏘지 않았어?'라고 나에게 물었소. 나는 저들에게 발포하면 군중 속에 섞여 있는 경찰이 총에 맞을 수도 있다고 말했소. 엘리스는 어쨌든 그들 또한 검둥이가 아니냐고 하더군요." 그리 버마인들을 사랑하던 플로리도 경찰을 보호해 질서를 유지할 생각 뿐이지 버마인들의 생명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다.
버마인 베라스와미는 이에 어떻게 반응할까? 본래 베라스와미는 버마인들이 이 정도의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산 것도 영국인들의 은혜 덕분이라며 감사하던 사람이다. 플로리의 어떤 모습에도 그는 실망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대화 중에 베라스와미는 이렇게 말한다. "버마인들이 스스로 무역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기계와 배를 만들고 철도와 도로를 건설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당신들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지요. 만일 영국 사람들이 이곳에 없다면 버마 정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즉시 정글을 일본에 팔아먹을 것입니다. ..... (영국) 관리들은 우리를 문명화시켜 당신들 수준까지 끌어올리죠. 이것은 자기희생의 빛나는 기록입니다."
제국주의에 의해 황폐화된 인물들의 모습을 그리는 데 이 소설이 한 역할을 인정하지만 소설의 시종 버마의 자립과 독립의 가능성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오웰의 비관주의가 식민지 경험을 한 한국 독자의 가슴마저 답답하게 한다. 난 에드워드 사이드가 했다는 이 말을 되뇌일 뿐이다. "Orwell had no great love for Indians or Blacks or Jews."(<Culture and Resistance>) 'great love'를 바라는 건 과욕이겠지만 말이다.
着語 : 이 책은 같은 역자에 의해 <제국은 없다>란 이상한 제목으로 번역된 적이 있다. 원제가 <Burmese Days>이니 직역한 <버마 시절>이 더 낫다. 열린책들에서 역자의 번역을 새로 살렸는데 열린책들의 장기이다. '고급소설 읽기'를 추구한다는 열린책들의 방향과 어울리는 행보이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