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이 뭡니까?
노력은 항상 그 필요성에 비례한다
- 아담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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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좀 강하게 주장해 보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서평'은 그야말로 '서평꾼'이 대체로 '직업적인 필요'에 의거해서 쓰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부 전문 블로거들이 인터넷 공간에 '거의 프로에 가까운 솜씨로' 쓰는 글들도 어쩌면 '서평'이라고 부르는 게 맞지 싶고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책을 읽고 나서 쓰는 글'은 그게 리뷰든 페이퍼든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이든 또다른 어떤 형식의 글이든 상관없이 대체로 '책에 대한 감상문' 즉 '독후감'을 쓰는 경향으로 자연스레 흐르게 마련이라고 봅니다.
요즘 알라딘 서재에서 블로거들이 쓰는 ('페이퍼'가 아닌) '리뷰' 또한 예전에는 꽤나 오랫동안 '서평'이 주류였다고 기억됩니다. 그래서 글의 구성요소나 스타일이나 분량들이 쳔편일률까지는 아니었더라도 대체로 '어떤 범주'를 크게 벗어나는 일이 없었던 듯하고요. 저 또한 알라딘에 들어온 초창기(대략 2003년 ∼ 2008년? 또는 2010년?) 여러 해 동안에는 철저히 '서평'만 썼더랬습니다. 소위 서평꾼도 아니면서 서평꾼이 되려고 노력했었던 셈이지요. 그러다가 '페이퍼'가 점차 활성화되면서 저도 언제부턴가 용기를 내어 '페이퍼'를 쓰기 시작했더랬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알라딘의 분위기 또한 점점 더 '서평'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알게 모르게 어느새 '페이퍼'와 '리뷰'의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독후감'이 대세를 점하게 되더군요.(이건 제 판단입니다.)
잠행성 정상 상태, 풍경 기억 상실
불규칙한 변동으로 인해 느리게 진행되고 있는 변화가 잘 드러나지 않는 현상을 정치학자들은 '잠행성 정상 상태(creeping normalcy)'라고 부른다. 경제 문제, 교육 문제, 교통 체증 문제, 혹은 그 어떤 문제가 매우 천천히 악화되고 있을 경우 한 해의 평균 수준이 그 전 해에 비해 아주 약간 낮아졌다는 사실을 깨닫기 힘들며, 따라서 미세하지만 한 사람이 정상(normalcy)이라고 생각하는 기준도 매년 조금씩 변동하게 된다. 이와 같은 변화는 사람들이 깨닫는 순간까지 수십 년간 계속 진행되어 어느 순간 몇십 년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상태였으며, 현재 정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태가 사실은 악화된 상태임을 알게 되고는 갑자기 놀라게 되는 것이다.
'잠행성 정상 상태'와 관련 있는 또 다른 용어는 '풍경 기억 상실(landscape amnesia)'이다. 이는 변화가 매년 매우 느리게 진행됨으로써 50년 전의 풍경이 지금과는 얼마나 달랐는지 깨닫지 못하는 현상을 말한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몬태나 빙하 및 설원의 용해 현상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 재레드 다이아몬드, 『문명의 붕괴』중에서
저도 과거에 '서평'만 쓰던 시절에는 '리뷰'를 쓸 때 다음의 '네 가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 글을 썼던 기억이 납니다.
1. 전반적으로 무엇에 관한 책인가?
2. 무엇을, 어떻게 자세히 다루고 있는가?
3. 전반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볼 때 그 글은 맞는 이야기인가?
4. 의의는 무엇인가?
최소한 서평을 쓰자면 '서평의 기본'은 반드시 글에 담겨야 한다고 여겼거든요.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에서 배운 걸 실천하려는 의미도 있었고요.
그런데 '페이퍼'가 차츰 활성화되면서부터 '리뷰'를 쓰는 일이 점점 힘겹게 느껴지기 시작하더군요. 정작 '서평'을 쓰기 위해서는 '정해진 틀'에 대충이라도 맞춰야 하는데 그게 싫어지기 시작한 거지요. 더군다나 글에 쏟아 넣고 싶은 온갖 재료들을 '억지로' 빼는 일도 참기 어려웠고요. 그래서 차츰 '페이퍼' 위주로 글을 쓰면서 '책의 생김새'를 비롯한 온갖 '다양한 이미지'들을 넣을 수 있게 되고, 심지어 '음악'과 '미술'까지도 넣을 수 있으니 정말 좋더군요.
어느덧 알라딘 블로거들이 올리는 페이퍼나 리뷰는 '과거의 잣대'로만 재단하기에는 너무나 힘들 정도로 빠르게 변모하고 진화하는 듯합니다. '북플' 서비스도 그런 경향을 심화시킨 요인 가운데 하나인 듯하구요. 이런 변화와 경향들을 무시하고 굳이 다시 옛날 스타일로 되돌아가서 '서평' 다운 '서평'을 써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그 점이 제일 궁금합니다. 서평꾼이라면 서평을 써야 되겠지요. 서평가를 지향하시는 분들도 서평을 열심히 쓸 필요가 있겠지요. 혹은 '서평'이 아니면 '리뷰'도 아니라고 여기는 분들도 계속 '서평' 형식으로 글을 쓸 테지요. 그러나 '영혼이 자유로운' 수많은 일반 블로거들까지 굳이 '서평가'를 흉내내어 그런 형식과 내용에 걸맞는 '서평'을 쓸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한가지만 더 언급하자면, '리뷰'나 '페이퍼'에 '인용문'이 많냐 적으냐 하는 건 '서평'을 쓸 때 제기될 만한 문제이지 '독후감'이나 '책에 대한 자유로운 글'을 쓸 땐 전혀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 스스로는 글을 쓸 때 '인용문'을 최대한 많이 집어 넣기 위해서 일부러 애를 쓰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제 판단으로는, 제가 쓰는 글보다는 '인용문'이 훨씬 더 강렬하게 독자들에게 와닿는 경우가 많을 지도 모르고, 제가 쓰는 허접한 글보다는 제가 다루는 책 속에 담긴 '빛나는 문장들'을 독자분들이 꼭 한번 눈여겨 봐주십사 하는 마음 또한 쉽게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심지어 다른 분들이 쓴 글 속에서도 가급적 '인용문'이 많은 글을 일부러 더 열심히 찾아서 읽는 편입니다. 그런 글들을 읽으면 '아하, 그 책 속에는 저런 빛나는 문장들이 실려 있구나' 하는 걸 단번에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누구든지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책이나 읽어 보지 못한 책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기 마련인데, 그 책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려고 하면 '책 속 문장들'을 직접 내 눈으로 살피는 일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심지어 '인용문'이 거의 없는 글들은 아예 지나치기도 합니다. 어떤 책에 대해서 '소감'을 밝히는 글이라면 그 책 속에 담긴 가장 명백한 실체라고 할 수 있는 '책 속 문장들'은 얼마쯤 보여주는 게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책 속에 담긴 절묘한 문장들을 조금도 보여주지 않은 채 혼자서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어봐야 도무지 '납득'이 안 될 경우도 있거든요. 인용할 게 아무리 없더라도 '단 한 줄' 정도는 인용할 수도 있지 싶은데, 오로지 자기 자신의 느낌과 주장만 장황하게 늘어놓은 글은 아예 읽기조차 싫어질 때도 있더라구요. 뭐, 각자의 스타일이 있겠지요. 두서없는 글이 자꾸만 길어지네요. 그럼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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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yrus 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속 여러 구절들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제 고약한 버릇이 또다시 발동된 셈이지요. 님의 용기있는 '문제 제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원인과 결과의 혼동
한 사람은 부유하고 그 이웃은 가난한 것은 외출할 때 한 사람은 마차를 타고 그 이웃은 걸어다니기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은 부유하기 때문에 마차를 탈 수 있고 그의 이웃은 가난하기 때문에 걸어다니는 것이다.
분업을 야기하는 원리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자비심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자애심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말하지 않고 그들 자신에게 유리함을 말한다. 거지 이외에는 아무도 전적으로 동포들의 자비심에만 의지해서 살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거지조차도 전적으로 타인의 자비심에 의지하지는 않는다.
버릇을 고칠 만한 용기
하인의 수를 대폭 줄이거나 식탁의 음식차림을 매우 호화로운 것에서 매우 검소한 것으로 바꾸는 일, 호화로운 마차를 만들어 놓고는 타지 않는 것은 주변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길 없는 변화이며, 이전의 나쁜 행동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변화이다. 그러므로 한때 이러한 종류의 지출에 빠져들만큼 불행했던 사람들은, 파멸·파산으로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는, 그런 버릇을 고칠 만한 용기를 내지 못한다.
상인들의 궤변
어떠한 나라에서든 대다수의 국민들로서는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가장 싸게 파는 사람들로부터 사는 것이 가장 이익이 되며 실제 그러함에 틀림없다. 이 명제는 너무나 명백해서 그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상인·제조업자들의 사리(私利)에서 나온 궤변이 인류의 상식을 혼동시키지 않았던들, 그 명제는 결코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점에서 그들의 이익은 국민 대다수의 이익과 정반대이다. 주민들이 자기들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동업조합원의 이익이 되듯이, 국내시장의 독점권을 확보하는 것이 상인과 제조업자에게 이익이 된다. 따라서 잉글랜드나 대부분 유럽 나라에서는 외국상인에 의해 수입되는 대부분의 재화에 특별관세가 부과된다. 또 자기 나라의 제품과 경쟁할 수 있는 모든 외국제품에 높은 관세와 금지조치가 부과된다. 무역수지가 자국에 불리하다고 생각되는 나라, 즉 국민적 반감이 가장 격렬히 타오르는 나라로부터 수입되는 거의 모든 종류의 상품에 대해 특별제한을 가한다.
상인들의 허풍
나는 공공이익을 위해 사업한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사실 상인들 사이에 이러한 허풍은 일반적인 것도 아니며, 그런 허풍을 떨지 않게 하는 데는 몇 마디 말이면 충분하다.
우둔하고 황당한 사람의 수중에 있을 때
자기의 자본을 국내산업의 어느 분야에 투자하면 좋은지, 그리고 어느 산업분야의 생산물이 가장 큰 가치를 가지는지에 대해, 각 개인은 자신의 현지 상황에 근거해서 어떠한 정치가나 입법자보다 훨씬 더 잘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민간인들에게 그들의 자본을 어떻게 사용하라고 지시하려는 정치가는 스스로 불필요한 수고를 할 뿐만 아니라, 어떤 한 개인에게 안심하고 위임할 수 없으며 어떤 위원회나 참의원에게도 안심하고 위임할 수 없는 권력을, 또한 자신만이 이와 같은 권력을 행사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우둔하고 황당한 사람의 수중에 있을 때 가장 위험해지는 그런 권력을, 자신이 멋대로 휘두르려는 것이다.
노력은 항상 그 필요성에 비례한다
어떤 직업에서도 그 직업을 수행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노력은 그 노력을 해야 할 필요성에 항상 비례한다. 이 필요성이 가장 큰 것은 자기 직업에서 받는 보수가 그들이 획득하기를 기대하는 재산 또는 일반수입이나 생활수단의 유일한 원천인 사람들의 경우이다. (중략) 어떤 특정 직업에서의 성공으로 달성할 수 있는 위대한 목표는 물론 특별한 의지(spirit)와 야심(ambition)을 가진 소수 사람들로 하여금 열심히 노력하도록 분발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최대의 노력을 끌어내는 데 반드시 위대한 목표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비천한 직업에서도 경쟁과 대항의식이 남보다 성적이 뛰어나는 것을 야심의 목표로 하여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도록 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이에 반해, 목적이 위대하긴 하나 노력해야 할 필요성이 별로 절실하지 않은 경우에는 크게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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