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말한다, 오디세우스, 놀라움에 지친 그가
사랑 때문에 곧장 다시 울었다고. 그의 이타카가
소박하고 푸르른 걸 보고서, 예술이란 마치 이타카,
단순한 놀라움이 아닌, 영원한 푸르름의 이타카 같은 것."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시학』(1958)에서
* * *
옛날 옛적에 어느 눈먼 음유시인이 있어서, 그가 자신이 살던 시대에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고 다니며 여러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노래처럼 들려줬던 훌륭한 이야기를 오늘날의 우리들조차 온전히 다 듣고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런 일은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다. 그 시인의 음성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그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자신의 목소리에 실었던 아름다운 음율조차 이제는 더이상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때 그 시인이 불렀던 노래가 오직 그 시대 사람들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손 치더라도, 그 노래가 아직까지도 영영 사라지지 않고, 문자로 온전히 전해져 내려와 우리가 쓰는 현대어로 번역되어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지닌 온갖 상상력을 다 동원하여 그 시인의 노래를 틀림없이 제법 많이 이해할 수도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 이야기가 아예 없지는 않다. '2,800번의 여름'을 지나는 세월 동안에도 원형을 잃지 않고 온전히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는 옛 이야기가 있다면 그게 바로『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이다. 그렇게 유명하고도 훌륭한 이야기를 여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다만 그 이야기가 그토록 오래 전에 만들어졌고, 더군다나 그 이야기의 무대 조차 눈먼 음유시인이 노래했던 그 시대보다도 더욱 거슬러 올라간 까마득한 옛날이다 보니, 이 푸른 지구별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즉각적으로 확인하는 놀라운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어느새 너무나 먼 옛날의 이야기로 들릴 뿐이다. 우리는 이미 그 이야기를 온전히 다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또 진실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라도 우리 스스로가 그 이야기를 자꾸만 낯선 이야기로 되돌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책을 읽을 때보다 특별히 조금 더 노력을 기울이기만 하면 그 옛날에 노래가락처럼 아름답게 읊조리던 그 이야기를 얼마든지 끝까지 다 읽을 수도 있다. 그 책을 읽으려는 독자가 무슨 특별한 신분일 필요는 없다. 대학생이라도 좋고 평범한 월급쟁이라도 상관없다. 주부와 가게의 점원이라도 그 이야기를 읽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 옛날엔 농사를 짓던 사람들과 물고기를 잡던 어부들과 양을 치던 양치기들과 노를 젓던 선원들까지도 그 노래를 즐겨 듣고 모두들 이해했으니 말이다. 오늘날처럼 문맹이 거의 다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는 똑똑한 현대인들이 왜 그토록 보편적이었던 이야기를 두고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미리부터 무릎을 꺾고 좌절해야만 한단 말인가.
어떤 일에서든 아무도 뛰어 넘지 못한 장벽을 끝내 뛰어 넘은 사람들이 늘 있게 마련이다. 비록 눈 먼 음유시인이 쓴 옛 이야기가 아무리 어려운 옛날 그리스어로 쓰여져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책은 끊임없이 번역되고 주석이 달렸다. 샹폴레옹은 나일강에서 발견된 로제타석을 붙들고 평생을 연구한 끝에 마침내 파라오가 살던 시대에 쓰여진 이집트 상형문자까지도 해독하지 않았던가. 옛 이야기에 매혹되어 고대의 그리스어를 새로 배우고 또 그때마다 자신들이 살던 시대에 쓰던 언어로 끊임없이 바꾸어 내려온 끝에 그 이야기는 오늘날의 우리도 모두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숱한 세월 동안 이 고대의 서사시를 두고 불굴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그 작품이 지닌 가치를 더하고 새롭게 만든 무수한 작가들과 학자들과 문학작품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두고 켜켜이 쌓여온 그 '옛시인의 노래를 둘러싼 이야기'를 마치 여태껏 쭈욱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이 천역덕스럽게 술술 풀어낸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알베르토 망겔이다. 그가 오래 전에 쓰여진 호메로스의 작품을 이제야 비로소 새롭게 드러낸 것도 아니고, 또 그 작품을 바탕으로 삼아 불멸의 문학 작품을 새롭게 탄생시킨 것도 아닌데, 내가 이 작가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게 아니냐고 핀잔을 줄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는 정말 이 책에서 호메로스가 쓴 두 작품을 둘러싼 온갖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울 만큼 깊이있게 제대로 파고 들었다. 비록 나는 고대에 쓰던 그리스어나 라틴어는 물론 그리스 땅조차 여태 한 번도 밟아보지 못했지만 그 시인이 쓴 옛날 이야기만은 두어번 읽어 보았다. 그러니 내게는 알베르토 망겔의 이야기가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비록 그가 이야기를 너무나 깊숙한 데까지 끌고 들어가는 바람에 내게는 낯설기만 한 작가들을 그로부터 한꺼번에 너무 많이 소개받는 바람에 어리둥절할 때도 많았지만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다른 책들'을 통해 호메로스에 대한 이야기를 발견하고, 그 책 속에 담긴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마주칠 때마다 그 시인과 작품에 대해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주로 다음과 같은 책들을 통해서였다.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작품들
(3대 작가의 현존하는 작품 33편 가운데 굳이 엄격히 따로 떼어서 세어보자면 특히 16편)
헤로도토스의 『역사』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키케로의 작품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플루타르코스의『영웅전』
단테의 『신곡』
몽테뉴의 『수상록』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의 『돈키호테』
에드워드 기번의『로마제국쇠망사』
괴테의 『파우스트』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
어떤 사람들은 내가 허풍을 떨기 위해 유명한 고전들을 너무 많이 나열했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지금 내가 읽은 책들을 일일이 나열하면서까지 무슨 '헛바람'을 이 글 속에 집어넣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내가 이 글을 쓰면서 기울이는 관심은 단지 저 유명한 고전들 속에 '정말로' 호메로스의 작품들이 얼마나 다채로운 색깔로 깊숙하게 물들어 있는지를 내가 과연 얼마나 자세히 살피면서 저 책들을 읽었을까 하는 데 있을 뿐이다. 몇몇 작품들은 안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또다른 몇몇 작품들을 읽을 때 아마도 나는 숱한 대목에서 '호메로스의 그림자'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게 틀림없다.
그런데 알베르토 망겔이 쓴 책에서도 '내가 읽은 저 책들'이 조금이나마 언급되고 있을까. 물론이다. 한치의 과장도 없이 말하지만 망겔은 내가 언급한 작가와 책들을 단 하나도 빼놓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내가 기억 속에 저장해 둔 인상적인 문장들까지도 이 책 속에 그대로 옮겨 놓을 정도였다. 그런 대목을 만날 때마다 나는 너무나 반가워 어쩔 줄 몰랐다. 그런데 그런 기쁨도 잠시 뿐이었다. 왜냐하면 알베르토 망겔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이펙트'를 다루기 위해 언급해 놓은 작가와 작품들이 나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기 때문이다. 그가 이 책에서 '호메로스와 깊은 인연을 맺은 작가'로 내세운 인물들이 어찌나 끊임없이 등장하는지, 그리고 그런 유명한 작가와 작품들 가운데 내가 알지도 못하는 책들은 왜 또 그토록 많은지, 나는 그런 작가와 작품들을 발견할 때마다 적잖이 놀라고 또 적잖은 자극도 함께 받았다. 내가 방금 말한 바로 그런 작가들을 여기서 다시금 간략하게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아리스토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셰익스피어, 알렉산더 포프, 앨프리드 테니슨, 프로이트, 예이츠, 칼 융, 제임스 조이스, T.S. 엘리엇,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내 얘기는 이쯤에서 살짝 한 쪽으로 밀어 내고 여기서부터는 작가인 알베르토 망겔의 글을 직접 인용해 보고 싶다.(난 처음부터 이 작가가 쓴 놀라운 이야기들 가운데 '특별히 인상적인 몇몇 대목들'을 여기에 옮겨 놓을 생각뿐이었는데, 그건 너무 낯선 얘기일지 모른다 싶어 내 얘기를 조금이라도 집어 넣을 생각으로 글을 쓰다가 그만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물론 이제부터 이 글이 끝날 때까지 나는 그저 '입을 꾹 닫고' 필경사 노릇만 하겠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가장 먼저 인용할 대목은 '호메로스'를 우리의 코 앞까지 순식간에 끌어오는 대목부터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월든』에서 말했던 '2,800년의 여름'을 건너뛰거나 혹은 이어주는 방법 말이다. 이 책의 작가 알베르토 망겔은 이렇게 멋지게 풀어 놓았다. 마치 호메로스가 방금이라도 우리 곁을 지나쳐 가는 듯한 '멋진 시'까지 인용하면서 말이다.
길을 내려가는 호메로스에게
러디어드 키플링은 현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우리가 과거에 관해 알고 있는 바를 반추해볼 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이와 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이 유용하다고 믿었다. 즉 로마제국의 장점과 단점에서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제국을 비판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중세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지금의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리 시대에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배우는 것, 호라티우스와 셰익스피어에서 현대 작가의 기술을 위한 모델을 발견하는 것이 유용하다는 것이다. 호메로스에 대한 그의 초상은 이 점을 아주 선명하게 예시해준다.
호메로스가 자신의 꽃 피어나는 리라를 두드릴 때
그는 들었지, 사람들이 육지와 바다에서 노래하는 것을.
그리고 그가 생각했던 것을 그는 요구할 수 있었고,
그는 다가가 그것을 취했어-나와 똑같이!
시장의 소녀들과 어부들,
양치기들과 선원들 역시,
그들은 들었지, 오래된 노래가 다시 점점 크게 울리는 것을.
하지만 그것을 조용하게 놔두었어-당신들과 똑같이!
그들은 알았지, 그가 훔쳤음을. 그는 알았지, 그들이 알고 있었음을.
그들은 말하지 않았고,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어,
하지만 윙크를 보냈지, 길을 내려가는 호메로스에게,
그리고 그도 윙크를 보냈어-우리와 똑같이!*
* Rudyard Kipling, "When 'Omer Smote 'Is Bloomin' Lyre' in The Seven Seas, 1896
(270∼271쪽)
이렇게 멋진 시를 쓴 러디어드 키플링을 스웨덴 한림원이 그냥 바라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1907년에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긴 스웨덴 한림원이 덧붙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그의 대표작은 물론 『정글북』인데 나는 아직도 그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다. 초딩때 이후로는. 그래서 앞서 내가 말한 바로 그 '자극'을 여기서도 받았다.)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작가로 그의 관찰력과 독창적인 상상력, 기발한 착상, 이야기를 이끄는 비범한 재능을 높이 사 노벨 문학상을 수여함"
여기서부터는 제임스 조이스의 난해하기로 아주 유명한 소설인 『율리시스』에 관한 이야기이다.(나는 이 책을 예전에 사 두고도 여태껏 읽을 엄두를 못 냈다. 그런데 이번에 그 소설을 읽고 싶은 '강렬한 자극'을 확실히 받았다.)
시대는 바야흐로
조이스는 그곳에 들어가는 것 이상을 원했다. 그는 출발부터 아일랜드의 배경 위에서 아일랜드의 재료로 그것을 새롭게 세우기를 소망했다. 1905년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한 편의 에세이를 썼는데, 조이스는 트리에스테에 있을 때 그 책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예이츠는 그 에세이에서 시대는 바야흐로 새로운 작가가 『오디세이아』의 고대 세계를 다시 방문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몽상적인 지혜를 가지고 말했다. "나는 우리가 어떻게 서술할 것인지 처음부터 다시 배우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매혹적인 섬들 사이를 떠돌던 한 노인의 모습을, 마침내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그가 천천히 분노의 감정을 추스르고 축적시켜나가는 행태를, 한 여신이 야반도주하는 모습을, 화살들이 날아가는 광경을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아주 새로운 것들로 만드는 일은 ······ 신성한 상상력의 분위기를 나타내는 징표나 상징이 될 것이다." 예이츠의 촉구 그리고 비코 안에서 조이스는 그의 직감에 대한 확신을 발견했다. 문헌학상의 동시성이 그의 자신감을 지지해주었다. 『오디세이아』는 칼립소의 섬 오기기아에 있는 오디세우스와 함께 시작된다. 조이스는 오래 전에 플루타르코스가 아일랜드에 붙인 이름이 '오기기아'임을 발견했다. 비록 조이스가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기초로, 그 뒤에 자신의 『율리시스(Ulysses)』를 올려놓은 것은 "일종의 변덕"일 뿐이라고 1937년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에게 말했고, 또한 『율리시스』·에 대해 호메로스식 대응을 준비하면서 스튜어트 길버트와 함께 했던 공동 작업은 "끔찍한 실수"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 『율리시스』에 계속 등장하면서도 그저 '갈색 우비를 입은 사나이'로만 묘사될 뿐 결코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 불가사의한 캐릭터가 사실은 자기 작품의 페이지 속에 도사리고 있는 조이스 자신일 수 있음을 시사한 적이 있다. 그보다는 차라리 그 인물이 자신의 작품들이 개작되는 것을 감독하려고 온 호메로스라고 하는 편이 더 낫다.(274∼275쪽)
다재다능한 인물의 일생 중 열여덟 시간을 다룰 것
조이스는 버젠에게 자신이 『오디세이아』에 기반을 둔 책을 하나 쓰고 있으며, '다재다능한 인물'의 일생 중 열여덟 시간을 다룰 것이라고 말했다. 조이스는 그런 사람이 단 한 번도 묘사된 적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스도, 햄릿, 파우스트 모두 삶의 완전한 경험이 결핍되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여성과 함께 살아보지 못한 독신자로, 햄릿을 아들이었을 뿐 남편이나 아버지가 되어보지 못한 총각으로, 파우스트는 젊지도 늙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집이나 가족도 없이 '언제나 그를 자기 옆구리나 발꿈치에 매달고 다니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저지당하는 한심한 자로 내몰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목록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라에르테스에게는 아들이고, 텔레마코스에게는 아버지이며, 페넬로페에게는 남편이고, 칼립소에게는 연인이며, 트로이아를 포위한 그리스 전사들에게는 전우이고, 이타카의 백성들에게는 왕이었다. 그는 많은 고난을 당하지만, 지혜와 용기로 모든 것들을 이겨냈다. 더 나아가 조이스는 버젠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켰다. 오디세우스가 전쟁터에서는 용감한 전사이며 끝까지 전투를 지켜보기로 결심했지만, 전쟁에 참여하기 전에는 나귀와 황소를 함께 멍에로 묶어놓고 밭을 갈면서 미친 척하며 병역을 기피하려고 노력했던 협잡꾼이라는 사실 말이다.(276∼277쪽)
오디세우스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가장 복잡한 인물들 중 하나
오디세우스는 사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가장 복잡한 인물들 중 하나이다. 『일리아스』에서 그는 신중하고 합리적인 전사이다. 또한 유능한 외교관이었기에 아가멤논의 화해 요청을 아킬레우스에게 전할 수 있었으며, 수사(修辭)의 달인이라 청중을 더욱 놀라게 하려면 언제 침묵해야 하는지도 아는 사람이었다. 프리아모스의 오랜 조언자였던 안테노르는 오디세우스가 다중 앞에서 말할 때, 처음에는 뻣뻣이 선 채 눈을 땅에 고정시킨 뒤 연설을 터뜨린다고 서술한다.
그대는 말했을 것이오, 무뚝뚝하고 틀림없이 생각 없는 자일 거라고.
그러나 그가 우렁찬 목소리로 가슴속에서부터 토해내면서
겨울철에 휘날리는 눈보라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하자,
그다음에는 오디세우스에게 논쟁을 걸지 못했지요, 그 누구도!
(277∼278쪽)
이쯤에서 그림 한 장을 끼워넣고 싶다. 오뒷세우스가 '유능한 외교관'으로 활약할 당시의 모습이다. 비록 그림의 주인공은 『일리아스』의 주인공인 아킬레우스이지만 말이다.(☞ 트로이아 전쟁과 헬레네의 행방을 둘러싼 이야기)
<아가멤논의 사절단을 맞는 아킬레우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19세기
베르길리우스는 오디세우스를 무정한 약탈자이자 '범죄의 달인', 말하자면 그리스의 모리아티로 묘사했다. 오디세우스는 이 세 번째 인격성을 입고서 유럽 문학에 들어왔다. 단테는 오디세우스를 그의 동료인 디오메데스와 싸잡아 비난한 뒤 지옥의 여덟 번째 계로 보내버렸다. 이곳에는 사기 행위의 조언자들과, 다른 자들에게 도적질하라고 부추기는 영적인 도적들이 영원히 타오르는 화염 속에 봉인된 채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내부에서부터 그들을 태워버렸던 탐욕스러운 열정이 이제는 외부에서부터 그들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이 혀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탐욕에 불타오르게 했다면, 이제는 불꽃의 혀들이 그들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단테가 직관적으로 오디세우스로 하여금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을 완수하도록 만든 곳이다. ······ 테이레시아스는 오디세우스에게 말한다. 만약 그가 특정한 조건들을 만족시킨다면 이타카에 도착하는 것은 물론, 그의 아내에게 구혼하는 자들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면서 집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그의 운명이 아니라는 말도 덧붙인다. 또한 오디세우스는 "한 번 더 멀리 나가려는" 충동을 느낄 것이며, 마지막이자 치명적인 여행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단테가 묘사한 오디세우스의 마지막 모험은 단테가 그때까지 썼던 모든 시구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워서 영어로 번역할 수 없을 정도이다.(279∼280쪽)
활기차고 감동적인 개작본
6세기가 더 지난 뒤, 앨프리드 테니슨 경은 활기차고 감동적인 개작본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테가 이룬 성취에 충실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작품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노년은 아직 그 영광과 노고를 간직하고 있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닫는다. 그러나 끝나기 전에 무엇인가가 있다.
고귀한 어떤 일이 여전히 완수될 수 있으니,
신과 투쟁했던 사람들은 흉한 것이 아니다.
빛은 반석들로부터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긴 하루가 저물어간다. 느린 달이 솟아오른다. 깊은
신음이 수많은 목소리와 함께 맴돌고. 오라, 내 친구들이여,
더 새로운 세상을 찾기에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니다.
밀어버려라, 그리고 질서 정연하게 자리 잡고 앉아서 쳐라
울려 퍼지는 밭고랑들을, 일몰 너머로 그리고
서쪽 모든 별들이 몸을 담그는 저 욕조들 너머로
돛을 펼치려는 나의 계획은 내가 죽을 때까지 유보되어 있으니,
해협들이 우리를 휩쓸어 침몰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던 위대한 아킬레우스를 볼 수도 있다.
비록 많은 것들을 거두어갔지만, 많은 것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지금은 그 옛날 땅과 하늘을 움직였던
그 힘은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가 지금 있는 그대로이다.
영웅적인 심장들의 한가지로 똑같은 기질,
시간과 운명에 의해 약해졌지만, 투쟁하고, 탐색하고,
찾으며,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의지 안에서만은 강하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에 고전에 빠져 있던 테니슨은 단테에게 비난받은 왕을 자신의 호메로스적 원천으로 되돌려 보낸다. 오디세우스는 '여행에서 벗어나 쉬지 못하고 있었는데', 선량함에 비해 너무 영악한 부랑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다시 영웅으로서의 정체성을 담당해야만 한다. 자신의 길었던 여행을 요약하는 오디세우스는 스스로를 '아무도 안'이라고 소개했던 귀향 병사에서, 집으로 와서도 다시 한 번 더 항해를 떠나려고 열망하는 왕으로 돌아온 과정을 요약하면서 "나는 하나의 이름이 되어 버렸다"라고 말한다. 페루의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요사는 이렇게 썼다. "오디세우스가 상징(또는 대표)해왔던 수많은 것들 중에 변함없는 것 하나가 서양의 문학 안에 있다. 한계를 제거하며 '가능한 것'에 종속되는 대신, 모든 논리에 반하여 불가능한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인간들이 가지는 매력이 바로 그것이다."(280∼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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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인용글에 대해서는 '번역'에 대한 아쉬움이 좀 크다. 앨프리드 테니슨의 시 <율리시스>는 다른 책에서 봤던 번역이 훨씬 더 좋았던 듯하다. <율리시스>의 다른 대목을 인용한 글도 본 적이 있는데, 나는 아직까지도 테니슨의 시집 한 권 산 적이 없다. 이런 데서도 '자극'을 받는다. (☞ T.S. 엘리엇의『황무지』와 사랑 받았던 여자 시뷜라)
이제 마지막 말을 할 차례입니다.
내가 늘 암송해왔던 테니슨의《율리시스》의 마지막 시행들보다 더 나은 말을 내가 고를 수 있을까요:
가자 친구여, 새 세계를 찾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
배를 띄우고, 줄 맞춰 앉아, 힘차게 노를 젓자
뱃머리가 물살을 가른다; 나의 목적을 위해
황혼과 서쪽 하늘의 별들의 바다를 너머, 내가 죽을 때까지
노를 저어라.
파도가 우리를 삼킬 수도 있으리라:
행복의 섬을 만날 수도 있으리라,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아킬레스를 만날 수도 있으리라.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고, 많은 사람이 남았지만; 우리에게 비록
땅과 하늘을 움직이던 예전의 강인함은 이제 없지만;
그것이 바로 지금의 우리지만;
시간과 운명에 의해 약해졌으나, 강인한 의지의,
영웅적인 용사의 침착함으로,
노력하고, 구하며, 찾고, 포기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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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병희 선생님이 번역한 『오뒷세이아』에는 이 때의 오뒷세우스의 이름을 '아무도 아니'라고 번역해 놓았다. 이 대목은 정말 재미있기도 하고 '의미심장하기도' 하다. (제9권 오뒷세우스의 이야기들_퀴클롭스 이야기) 강대진이 쓴 『그리스 로마 서사시』를 읽어 보면 오뒷세우스가 스스로 자신을 '아무도 아니'로 명명한 그 일이 얼마나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일부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폴뤼페모스를 속인 '아무도 아니' 이야기
이 이야기에 쓰인 '아무 것도 아닌 자' 속임수는 그냥 속임수라기보다는, 완전히 무장해제된 채 동굴 속에 갇힌 영웅의 무력감과 자괴감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아폴로도로스에 따르면 제우스도 튀폰과의 싸움에서 비슷한 사태를 겪은 적이 있다. ······ 또 다른 해석으로는 오뒷세우스의 일련의 모험은 자기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인데, 그 시작점이 바로 여기라는 것이다. 그는 아무 것도 아닌 상태에서 시작해서 한 나라의 왕으로 자신을 회복해간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 트릭은 짐 자무시 감독이 <데드맨>이란 영화에서 사용한 적이 있다. 악당들에게 잡힌 주인공 윌리엄 블레이크가 누구와 함께 왔냐는 질문에 "노바디Nobody와 함께"라고 답하는 데, 악당들은 동행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지만, 사실 이 '노바디'는 그와 동행하던 인디언의 이름이었다. 잠시 후 방심한 악당들은 이 노바디의 화살에 쓰러지게 된다. 하지만 이 트릭 역시 그냥 속임수는 아니다. 그와 동행하는 '노바디'는 사실상 그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죽은 사람deadman이고,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니 말이다. 주인공이 쏘는 총에 유명한 총잡이들이 모두 쓰러지는 반면, 그들의 총알은 노상 빗나가는 것도 그가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사건이 그의 모험 초기에 놓여서, 앞으로 있을 그의 성격 변화에 하나의 기준점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오뒷세이아>의 모험들을 설명하는 이론 중 하나가 '성장 소설Bildungsroman' 이론이다. 주인공이 여러 모험을 겪으면서 점차 성숙한 인간으로 변해 간다는 것인데, 이 해석에 가장 잘 맞는 것이 바로 이 폴뤼페모스 사건이다. 그 사건 전에 오뒷세우스는 매우 호기심이 많고 무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그는 점차 조심성 있는 사람으로 변해가, 나중에는 심지어 아테네 여신에게까지 신분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학습되고 획득된 조심성은 적들이 우글거리는 집에서 그를 구해주게 될 것이다.(66∼67쪽)
- 강대진, 『그리스 로마 서사시』
오뒷세우스가 폴뤼페모스의 눈을 찌르는 장면을 보여주는 술잔(기원전 550년경)
(에우리피데스 지음 / 천병희 옮김,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에서 인용)
가장 오랫동안 알려져온 것은 가장 많이 고려된 것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호메로스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 아니며, 다시 만든 이야기도 아니고, 모방한 작품이라고 할 수도 없다. 새뮤얼 존슨 박사는 1765년에 쓴 저작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 체계의 완벽함은 곧 드러났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인간 지성의 공통된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덧붙여 말한다면, 국가와 민족이 변하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간 지성은 호메로스가 이야기한 사건들의 순서를 바꾸고, 그가 만든 등장인물들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며, 그의 감성을 돌려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저술들에 대해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존경은, 지나간 시대의 우월한 지혜에 대한 경솔한 신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에 대한 우울한 확신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정받았으며, 또 의심할 수 없는 입장들의 결론이다. 즉 가장 오랫동안 알려져온 것은 가장 많이 고려된 것이고, 가장 많이 고려된 것은 가장 많이 이해된 것이라는 말이다.(289∼287쪽)
이렇게 길게 쓴 내 이야기의 결론은 무엇일까. 결국 '책을 잡고 글을 읽으세'이다. 이왕이면『일리아스』와『오뒷세이아』를 곧바로 펼쳐 읽는게 가장 좋겠지만 그게 어려우면 우선 알베르토 망겔의 책으로부터 친절한 안내를 받아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_ 눈으로만 읽는 독서)
이 책을 읽고 또 이런 글까지 쓰고 나니 고전은 정말 '평생 동안 캐내야 하는 광산 같은 것'이라고 말했던 클리프턴 패디먼의 말을 다시금 절감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자극'을 받았던 여러 '고전'들도 이제부터 찾아 읽어야 하고, 또 눈먼 음유시인이 쓴 옛 이야기도 가끔씩 다시 펼쳐 읽어야 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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