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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바스티안 피체크.미하엘 초코스 지음, 한효정 옮김 / 단숨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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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2015-053

 

차단제바스티안 피체크 외 / 단숨

 

1. “도대체 어디니?” 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는 혹한의 기온만큼 냉랭했다. 피오나의 휴대전화에 연결된 이어폰은 추위 때문에 마치 자석처럼 귀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의 귀는 이미 감각을 잃어버린 지 오래여서 이어폰이 귀 안에 꽂혀있는지조차 느낄 수 없었다. “곧 집에 도착해요, 엄마시작부터 긴장감을 준다. 그녀는 집에 잘 도착했을까?

 

 

2.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죽은 이들의 모습이 익숙한 법의학자이자 검시관의 딸이 납치를 당했다. 납치자들의 매뉴얼 그대로 그는 딸을 통해 메시지를 전한다. “그가 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절 죽일 거예요. 앞으로 아빠가 하는 모든 일은 그가 하나도 빠짐없이 통제할 거예요.”

전화를 받은 아빠는 몸의 평형감각을 잃고 서 있을 힘조차 없을 지경이다.

 

 

3. 딸의 소식으로 받은 충격을 빨리 수습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여전히 높은 바위 언덕에서 차가운 얼음 바다로 뛰어든 느낌이었다. 충돌은 엄청났고,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 날뛰는 소용돌이 아래로 그를 잡아 당겼다. ‘진정해야 해. 딸아이를 돕고 싶다면 네가 먼저 침착해야 해.’

 

 

4. 그렇다면 벙커에 갇힌 딸아이는? 극심한 공포는 오히려 생각을 단순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녀 자신에 대한 가장 중요한 기억들은 고통이라는 기억에 의해 그 자리를 뺏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당한 학대는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떠오르는 어디선가 읽은 글. ‘희망이란 발에 박힌 파편과 똑같다. 결국 그걸 빼내기 전까지 영원한 고통을 안겨준다.’ 비록 지금은 희망이 고통이지만, 탈출하기 위해, 살아있기 위해 정신을 차려야 한다.

 

 

5. 스토커, 강간자, 살인자, 사이코패스가 바통을 이어받으며 스토리가 전개된다. 출판사 이름처럼 단숨에 달려가게 만든다. 독일 사이코스릴러의 제왕이라 불리는 제바스티안 피체크와 천재 법의학자라는 닉네임이 붙은 미하엘 초코스가 의기투합해서 만든 작품이다. 두 사람은 2009년 텔레비전 방송에서 우연히 만나 상대방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고, 서로 호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2010년 다시 만났다. (피가 흐르는) 스테이크 음식을 먹으며 공동으로 책을 기획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는 후문이다.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6. 세상살이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사건, 사고가 끊어지지 않는다. 그 중에서 실종 사건이 차지하는 비중도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단지 남아메리카 대륙에서만 6초에 한 사람씩 납치되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책 말미엔 등장인물을 통해 납치 위험에 노출된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GPS 송신기를 이식해주는 사업 아이디어가 펼쳐진다. 황당하지만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는 부분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예전엔 모두 황당하다는 평가를 받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빠른 템포로 전개되는 스토리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 정상과 비정상, 법의 역할과 한계, 인간 윤리 등을 생각해보는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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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짓의 재발견 두번째 이야기 -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여성 과학자들의 위대한 발견들 딴짓의 재발견 2
니콜라 비트코프스키 지음, 배영란 옮김 / 애플북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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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2015-051

 

딴짓의 재발견니콜라 비트코프스키 / 애플북스

 

1. 자연과 과학, 우주의 비밀이 한 꺼풀 씩 벗겨지던 17세기, 18세기에 중요한 발견은 어쩌면 여성에 의해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현장에 참여하길 거부당하고,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 자체를 불쾌하게까지 생각하던 시기였기도 하다. 그 기운은 이곳저곳에 여전히 남아있다.

 

2. 불어판 이 책의 원제를 그대로 번역하면 노벨상을 받기엔 너무 아름다운 그녀들이다. 그러나 그대로 번역을 했다면, 노벨상에 초점이 맞춰졌을 것이다. 아직 노벨상과 인연이 없는 대한민국 독자들에게 별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딴짓의 재발견이라. 책 제목을 잘 지었다.

 

3. 요즈음 DNA하면 아이들도 다 안다. 미드 수사 프로그램에서 DNA가 빠지면 그냥 수사반장이다. 영국의 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물질의 결정구조를 분석하는 결정학자 였던 이 여성은 DNA에 관한 연구를 의뢰받는다. 이 여성은 서른두 살의 로잘린드 프랭클린(1920~1958)이다. 연구 중 분자가 나선형 계단처럼 꼬여 있는 특징을 본다. 그러나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제임스 왓슨이라는 성질 급하고 부산스러운 미국인 학자가 어느 학회에서 로잘린드의 DNA의 회절 사진을 보고 난 후, 친구인 프랜시스 크릭가 함께 로잘린드보다 먼저 DNA이중나선구조를 고안해냈다. 두 사람은 로잘린드 연구팀의 비공식 연구결과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인정하긴 했지만 그들의 그 유명한 논문에 로잘린드의 이름을 따로 명시하진 않았다. 왓슨과 크릭은 1962년 노벨상을 받는다. 로잘린드는 이보다 4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이 일화를 통해 왓슨을 무조건 나쁘다고 판단하기엔 조심스럽다. 로잘린드가 너무 신중했다고 지적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로잘린드 대신에 ()과학자라면 왓슨 팀이 그렇게 입을 싹 닦고 지나갈 수 있었을까? 여성이라고 무시한 채로 마구 달리진 않았을까?

 

 

4. 이 책엔 이와 같은 사례가 즐비하다.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이 책은 여성을 중심으로 쓰인 과학사라고도 할 수 있다. 딱히 과학으로 분류할 수는 없지만, 독특한 생각과 파격적인 행동의 화제 거리도 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고 묻혀버린 뒷얘기들이 무성하다. 뉴턴의 시대에 과학에 푹 빠진 귀족 부인들이 있었다. 최초의 근대 여성의학자로 일컬어지는 다소 긴 이름의 가브리엘 에밀리 르토넬리에 드 브르퇴유(샤를레 부인이라고도 부름)는 라틴어로 쓰여진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명료한 이해를 돕는 섬세한 주석을 달았다. 시인 바이런의 딸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귀족 부인으로서의 삶과 함께 수학 연구의 길을 병행했다. 에이다는 초창기 기계설계안에 굉장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훗날 이는 컴퓨터로 발전한다.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라는 닉네임이 붙는다. ‘방사능 마녀라고 들어보셨는지? 방사 형태로 춤을 추는 자유롭고 개성적인 표현으로 유명한 현대무용가 로이 풀러는 라듐에 적신 수 미터 길이의 긴 옷자락을 내뻗으면서 관객들의 혼을 빼놓았다(방사능때문에 몽롱했을지도). 다행히 그 당시엔 방사능 측정기 가이거 카운터가 발명되기 전이었다.

 

 

5. 책 제목으로 쓰인 딴짓을 생각한다. 아프리카 초원의 누 떼는 참으로 장관이다. 수천, 수만 마리가 몰려 있는 모습을 보면 생명과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낀다. 그런데 그 누 떼 주변에 사자가 한 마리 나타나서 어흥 하고 소리치면 놀란 누 떼가 무리지어 달아난다. 선두가 길을 잘 못 들어 절벽으로 향해도 그 뒤를 계속 밀어붙이며 함께 떨어진다. 그 정신없는 무리에서 벗어난다면 살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나와 남을 해치는 일이 아닌 딴짓예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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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2시간 - 현직에서 퇴직 후를 준비하는
정기룡.김동선 지음 / 나무생각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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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2015-050

 

퇴근 후 2시간정기룡 · 김동선 / 나무생각

 

1. 익숙하던 일상에서 벗어납니다. 고정적인 수입은 있었지만, 나를 위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지나치게 여유로운데 수입은 없습니다. 놀이동산의 그것처럼 올라가는 데는 딸그락거리며 힘이 들었지만, 내려오는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훤한 대낮에 집에 있거나 밖을 나돌아다는 것이 영 낯설기만 합니다. 누가 나에게 뭐하시는 분이세요?” 물을까봐 겁이 납니다. 집에 있으면 공연히 눈치가 보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자괴감에 자존감은 낮아져만 갑니다. 연금이라도 나오니까 그럭저럭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으나, 사람의 삶이 어찌 먹고 사는 것이 전부이겠습니까? 나는 집에만 있고, 집에만 있던 내 아내는 아침 먹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오는지 묻는 것도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아내와 하루 종일 집에 같이 있으면 나도 불편합니다. 이 상황은 은퇴 후의 어느 일상을 그려본 겁니다. 다행히 나는 아직 현직에서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감사할 일이지요.

 

 

2. 이 책 퇴근 후 2시간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퇴근 후 두 시간은 퇴직 후를 위한 골든타임이다.’ ‘퇴근 후 2시간이 퇴직 후 인생을 바꾼다.’ 퇴근 후 2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해봅시다. 여전히 근무 중(야근)? 퇴근 중? 종일 쌓인 스트레스를 동료들과 술로 푸는 중?

 

 

3. 이 책의 장점은 그저 탁상공론적인 스토리, 흔한 자기계발서적에서 제시하는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직자(대전중부경찰서장)로 정년퇴임 후 미래현장전략연구소를 설립해서 은퇴 설계와 행복한 노후에 대한 각종 강연과 자문 활동을 하고 있는 지은이 정기룡의 리얼 스토리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계발을 위해서 한시도 쉬지 않고 나아가는 모습이 멋집니다.

 

 

4. 소설 형식을 빌려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책에선 김장수라는 이름의 주인공으로 표현됩니다. 건강한 퇴직 준비를 위한 조언을 옮겨봅니다. 당신이 퇴직을 준비하고 있다면? ‘규칙적인 생활을 하라’, ‘위기 상황에 대비하라’, ‘회사 인간에서 벗어나기’, ‘호기심을 가져라’, ‘적성을 찾아라’, ‘현직에 있을 때 시작하라’, ‘준비 없이 창업하지 마라’, ‘아내와 백지장 맞들기’, ‘부부사이에도 노하우가 필요하다’, ‘가족과의 관계 리셋하기’, ‘평생직장은 없어도 평생직업은 있다등등과 나이 들어서도 일을 계속하면 좋은 점 10가지, 재취업할 때 기억해야 하는 10가지 등은 현실적으로 매우 유익한 정보라고 생각합니다.

 

 

5.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요즈음. 직장인들은 일생에 세 번의 정년을 맞는다고 합니다. 1의 정년은 타인이 정년을 결정해주는 고용 정년. 2의 정년은 자기 스스로 정하는 일의 정년. 3의 정년은 이 땅의 삶의 여정을 끝내고 떠나는 인생 정년입니다. 이 책을 40, 50대 직장인의 필독서로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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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의 나라
김나영 지음 / 네오픽션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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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2015-049

 

야수의 나라김나영 / 네오픽션

 

1. “늦은 밤 시골 논둑 사이에 비닐하우스만 홀로 불을 밝혔는데, 그 앞이 고급 외제차로 만원이다. 채 서른 가구가 살까 말까 싶은 촌구석에는 당최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로 시작한다. 용팔은 우연히 자신이 도박판에서 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도박판은 아니었다. 미장일을 공치는 날에 다른 일꾼들과 어울려 재미삼아 가끔 포커 게임을 하던 중 자신에게 도박의 재능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우친다.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도박이 본업이 된 것은.

 

 

2. 잃기도 하고 따기도 하는 것이 도박판의 흐름이다. 어차피 우리네 살아가는 삶이 그렇다. 그런데 그 노름 바닥은 한 번 빠지면 좀체 벗어나기 힘들다. 용팔은 얼떨결에 하우스까지 가서 전 재산을 다 잃는다. 그러는 와중에 사람을 알게 되고, 역시 얼떨결에 아이를 떠맡게 된다. 아직 총각이다. 그런데 애부터 생겼다. 물론 남의 애지만.

 

 

3. 오사장과 그의 딸 선영이 스토리는 더 안타깝다. 도박으로 가정이 풍비박산이다. 그 후 뭉친다. 용팔과 떠맡은 아들 재휘와 불운의 가정에서 남은 선영이 합세한다. 그렇게 스토리의 중심이 잡힌다. 큰 도박판은 돈 다음에 목숨이 오간다. 그네들의 눈빛과 마음빛깔은 여느 사람들과 확연히 다르다. 그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애틋하게 일어나는 감정도 있다.

 

 

4. 소설의 템포가 빠르다. 카드 게임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한 번도 카드를 만져 본 적이 없는 독자도 그 분위기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긴박감 뒤에 이어지는 반전이 카타르시스다.

 

 

5. “이 글을 준비하면서 카지노를 답사하고, 딜러를 인터뷰하고, 전직 불법 도박장 사장과 은밀히 통화했던 그 경험들, 그 잠시 잠깐 엿본 신세계를 독자 여러분도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잠깐의 여행을 하듯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좋은 글은 서재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작가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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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멀어도 마음만은
류수훙 글.그림, 이영아 옮김 / 소수출판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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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2015-048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류수훙 / 소수

  

 

오늘은 중국 소설을 한 편 읽었습니다. 작가의 이름은 류수훙. 척박한 환경에서 시작했지만, 긴 고난 끝에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하는 감성적인 느낌이 짙은 소설입니다. 작가는 1970년생이군요. 현재 40대 중반. 아마도 이 작가 또래들이 향후 중국 문단을 이끌어갈 것이라 생각이듭니다. 이 작가 역시 중국에서 꽤 유명세를 타고 있군요. 책도 출간하지만, 요즘 분위기에 걸맞게 인터넷(유명 문학 사이트)에 글과 회화 작품을 많이 올리고 있구요.

 

 

소설의 제목은 한국의 60년대쯤에 유행했던 영화 제목 같군요.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

터미널 밖에는 농업용 삼륜차가 죽 늘어서 있었는데, 버스 대용이었다. 귀향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가려면 오 자오씩 내고 이런 발동기 삼륜차를 타면 되었다. 쑨궈민은 이 삼륜차를 타고 터미널까지 왔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쑨궈민은 글깨나 읽은 무지렁이로 소개됩니다. 초등학교도 겨우 졸업하는 마을 분위기와 다르게 쑨궈민은 중학교까지 졸업한 덕분에 마을에서 제법 대우를 받습니다. 마을사람들이 대놓고 무시하지 못하는 정도긴 합니다만.

 

 

소설의 시기는 중국의 문혁(문화혁명)이 지나가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은 듯합니다. 모든 것이 어수선할 때지요. 그나마 먹고 살만한 사람들은 공무원이나 사업을 해서 큰돈을 거머쥔 사람들뿐이죠. 무지렁이 농민들은 하늘만 바라보고 삽니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무대는 쑨덴푸라는 자연부락입니다. 특이한 것은 이 마을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 구걸하는 전통이랍니다. 전통치곤 참 그렇군요. 구걸의 연혁이 그리 짧지 않다보니 걸인촌이니, 유랑집단이니, 유랑촌이니 하는 별명도 있구요. 그러나 이들은 구걸을 수치스러워하지도 않는군요. 오히려 당당합니다. 그 탓을 주원장(朱元璋 1328~1398)에게 돌리고 있습디다. 중국 명나라의 태조인 주원장은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탁발승이 되어 구걸을 다녔답니다. 주원장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찾아봐야겠습니다.

 

 

걸인촌 분위기와 다르게 쑨궈민은 구걸을 싫어합니다. 정당하지 못한 일이라고 간주합니다. 건강한 생각이지요. 성실하게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벌어먹고 싶어 합니다. 농사도 곧잘 짓지만 수르나이(태평소와 유사한, 원뿔 모양의 관악기)도 잘 부는 재주꾼입니다. 그럭저럭 먹고 살만한데 이 부부에겐 걱정이 있습니다. 결혼 후 몇 해가 지났는데도 아이가 안 생기는 겁니다. 아이를 생산 못해서 망나니 마을 친구와 마을 사람들이 업신여기는 것이 싫어서 아내 배에 광주리를 엎어주고 거짓 임신을 꾸밉니다. 그러나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를수록 광주리는 큰 것으로 바꿀 수 있지만 진짜 아이가 문제군요. 비밀리에 아이를 구하러 다닙니다. 아이를 팔고 사는 일, 중국에선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한 20~30년 전쯤으로 추측되니 현재보다 더 했겠지요.

 

 

 

그 때부터 쑨궈민과 그의 아내 쑤구이펀의 삶은 예측불허의 회오리바람 같은 일상으로 들어갑니다. 있는 고생, 없는 고생 참 많이 겪는군요. 그래도 이 부부의 특징이 있습니다. 미련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우직하고 성실한 쑨궈민, 남편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 그의 아내 쑤구이펀. 쑨궈민의 믿음은 단순하면서도 올곧습니다. “입때까지 살면서 태양이 하루라도 뜨지 않은 걸 본 적 있어? 하늘이 무너진 적 있어? 농작물이 자라지 않은 적 있어? 사람이 음식을 먹지 않고 사람을 먹은 적 있어?”

 

 

 

중국 전국을 돌면서 생활하던 중 식구가 늘었습니다. 부부 외에 다섯 아이가 생겼습니다. 아이를 못 낳아 소쿠리로 가짜 임신배를 만들어야 할 정도였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돈을 제법 벌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 쑤구이펀이 남편에게 부탁합니다. 친정 식구들에게 돈을 좀 빌려줬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돌덩이 같은 쑨궈민은 단칼에 자릅니다. “안 돼”. 나도 뭐 이런 친구가 있나? 혼자서 번 돈도 아니건만..괘씸하다 생각했지요.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은 쑤구이펀은 자살 소동을 벌입니다. 한 숨 돌리며 깨어나긴 했지만요. 쑨궈민이 고향집을 눈앞에 두고 그의 식구들에게 전하는 한 마디에, ‘그래 그래야지, 잘 생각했어.’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작가가 이 소설을 구상한 것은 어느 날 새벽 무렵이었다고 합니다. 전날 독일 영화 한 편을 보았는데, 죽음을 앞둔 어머니에게 충격을 줄까 염려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소식을 감추려고 동분서주하는 가족을 다룬 영화였다고 합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 뜻은 충분히 전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마치 중국사회의 치부를 들어내는, 또 한 편의 불편한 진실을 담은 책이 아닌가 생각도 들긴 하더군요. 지금도 심심찮게 인터넷 토픽 뉴스로 보게 되는 중국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어둠과 밝음이 공존하며 돌아가는 큰 회전문 같은 것이 중국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이 소설의 중심은 어떤 상황에서든 좌절하지 말자. 위를 보자. 관점을 바꿔보자등등의 소박하지만 움켜쥐기 쉽지 않은 말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참 따뜻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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