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통문명 - 고통 없는 문명
모리오카 마사히로 지음, 조성윤.이창익 옮김 / 모멘토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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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없는 문명’이라하는 ‘무통문명’은 무엇인가?

이 책의 지은이 모리오카 마사히로는 도쿄대학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 윤리학박사. 현재 오사카 부립대학 종합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한다. 생명학, 철학, 과학론 등으로 인문학의 연구 틀을 넓히고 새로운 인간학인 ‘생명학’을 제창하여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상가중 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저자는 책머리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금 우리의 현대사회는 ‘무통문명’이라는 병리(病理)에 삼켜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덧붙여서..‘끝없는 쾌락속의 불안, 기쁨을 잃은 반복, 출구 없는 미로 속임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후회 없이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이 책을 드리고 싶다.’ 라고 적고 있다.


지은이가 ‘무통문명(無痛文明)’이라는 말을 처음 떠올리게 된 것은, 어떤 간호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라고 한다.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근무하는 그 간호사는 의식이 또렷하진 않지만, 죽은 것도 아닌 그저 ‘편안하게 잠자는’ 상태의 환자를 돌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결국 현대문명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지은이는 다시 질문한다. 현대문명이란 중환자실에서 편안하게 잠자는 인간을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 활기차게 일하고 즐겁게 노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단지 편안하게 잠자는 인간들을 도시라는 이름의 중환자실 속에서 조직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그와 같은 함정을 만든 것일까. 왜 문명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간 것일까.


지은이는 인간들이 문명을 끌고 온 것은 욕망 때문이었다고 한다. 욕망 중에서도 ‘신체의 욕망’이다. 이를 다섯 가지 측면에서 나누어 생각한다.

1) 쾌락을 찾고 고통을 피한다.

2) 현상유지와 안정을 추구한다.

3) 틈새가 보이면 확대 증식한다.

4)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5) 인생, 생명, 자연을 관리한다.

인간은 신체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고, 욕망을 꽃피우기 위한 장치를 만들어냈다. 그 때 인간은 바깥세계와 인간 자신을 조절하기 위해 ‘콘트롤(Control 이성’을 사용했다. 콘트롤 이성이란 미리 예상된 틀 속에 일들의 운행방식을 담아두는 지혜와 기술을 생산하는 능력이다. 인간은 자연환경과 인간자신을 관리하기 위한 이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이성을 신체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다.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인간 안팎의 자연을 인간이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이성’의 역할을 지적하고, 이것을 ‘도구적 이성’이라고 불렀다.


무통문명을 설명하기 위해서 지은이는 ‘생명의 기쁨’을 설명하고 있다.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나는 어떤 조직에서 일을 하므로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이 안정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지금 일을 그만둘 수 없다. 지금의 일이 가져다주는 수입과 안정을 지키고 싶은 것은 ‘신체의 욕망’이다. 그런데 일을 계속하면서 발생하는 여러 모순이 자신의 안팎에서 축적되면, 나는 점차 어찌할 수 없는 불안이나 초조함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을 얼버무리기 위해 일의 양을 늘리거나, 술에 빠지거나, 혼외정사를 하거나, 자해행위를 반복한다. 일시적으로 괴로움이 사라져도 또 엄습한다. 일이 가져다주는 수입과 안정을 확보한 채, 거기서 비롯되는 괴로움을 얼버무리기 위한 선택을 끊임없이 준비하는 것이 고통 없는 문명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생명의 기쁨은 내가 얻으려 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데, 나는 그 기쁨의 정의와 범위를 어디에다 두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잘산다는 것’이 꼭 평수 넓은 아파트에 고급 외제 승용차, 온갖 가전 신제품등은 물론 소위 호화로운 삶이 행복의 정의로까지 간다면 ‘살다 가는 삶’ 이외에 무엇이 남겠는가? 그래도 이 땅에 살다갔으면 무언가 향내 나는 흔적이라도 남기고 떠나 가야하지 않겠는가? 즉, 생명의 기쁨에 대한 정의조차도 내가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내가 얻고자하면 얻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편 무통문명론에서의 ‘고통(痛)’과 ‘무통화’라는 단어가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짚어본다. “‘고통’에는 육체와 정신의 아픔이 다 들어있다. 많은 글에서 ‘고통’이란 단어는 그런 의미에서 사용된다. 한 인간에게 무엇이 아픔과 고통이 되는가는 다른 사람이 외부에서 정의할 수 없다. 무엇이 아프고 괴로운지를 결정하는 권한을 갖는 사람은 아픔과 고통을 겪는 당사자뿐이다.(...) ‘무통화’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확실히 비판해야 하는 무통화다. 그것은 예방적 무통화와 눈가림구조를 이용하여 고통에서 계속 도망치는 무통화다. 나는 그런 무통화와 싸우는 것을 의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무통문명’하에서의 인간적인 소통은 어떤 양상을 띠게 될까?

“무통문명에서는 현재 자신의 쾌적한 틀을 유지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서로 그것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한다. 그러므로 만약 서로의 조건이 맞지 않을 때는 부분적으로 관계를 조정한다. 물론 각자의 쾌적한 틀은 손대지 않아야 한다. 그래도 안될 경우는 상대방과의 관계를 청산한다. 지금의 쾌적한 틀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기분 좋은 자극만을 골라 서로 제공하려는 사랑의 관계. 이에 반해서 지은이는 ‘조건 없는 사랑’을 그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를 무통문명에선 가능하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정념(情念)이라고 이름 붙인다. 이 정념이야말로 무통문명 하에서 지금의 쾌적한 틀을 일격에 부수어 버릴지도 모를 파괴력을 지닌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무통문명과의 싸움. 그것은 ‘신체의 욕망’과 싸우는 일이다. 신체의 욕망은 우리들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따라서 무통문명과의 싸움은 우리들 내부에 존재하는 ‘신체의 욕망’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욕망에서 출발하여 사회의 무통문명을 추진하는 연쇄(連鎖)를 도중에서 단절시키는 것만을 목표로 해야 한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내면이 바뀌는 것만으로는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무통화 장치’의 해제가 필요하다.

무통화장치란 나의 외부와 내부에 존재하며, 우리들의 신체의 욕망을 계속해서 ‘무통격류’로 끌어들이는 ‘장치’이다. 이것을 ‘장치’라고 부르는 것은 외부의 영향으로 간단히 파괴되지 않는 안정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고, 스스로 내부에 인간을 끌어들임으로써 자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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