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제나 한날 한시에 쫄딱 망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극심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 가장 흔하게는 세계 제 3차 대전이 일어나서 핵전쟁으로 번지거나 몇년 전부터 유행한 지구와 행성의 충돌. 그리고 오래 전 부터 영화속에 등장한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인류의 멸종. 외계 존재에 의한 파괴. 그 밖에도 기계의 반란에 의한 전멸. 혹은 하나의 존재가 막강한 어둠의 파워를 가지고 지구를 집어 삼키려는 것들이 있다. 대게는 용감한 인간 몇 몇이 저 위기를 간신히 극복해서 인류를 살린다.

내가 봤던 바이러스가 지구를 어쩌고 하는 영화 중에서 가장 재밌었던 것은 12몽키즈 였고 외계의 존재가 우리를 어쩐다는 것은 화성침공이 제일이었던 것 같다. 핵전쟁에 의한 것은 그날 이후가 단연 돋보였다. 그 밖에는 전부 그저 그랬다. 그리고 이제 여기 한개를 더 추가해야 겠다. 대니 보일의 28일 후.

이 영화의 내용은 이러하다. 어느 날 사고로 병원에 누워있던 퀵서비스 맨은 사고 당시로 부터 정확하게 28일 후 에 깨어난다. 그런데 깨어나 보니 병원은 물론 영국 전체가 텅텅 비어있다. 어떻게 된 일인고 하니 이 남자가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원숭이에게서 시작된 분노 바이러스(미칠듯한 분노에 사로잡혀 미친듯이 상대를 공격함. 눈이 벌개지고 각혈을 함. 피를 통해 전염됨) 가 안간에게 옮겨가서 서로가 서로를 공격해서 죽고 죽이게 된 것이다. 남자는 감염자에게 죽음을 당할 뻔 하다가 도시에서 살아남은 남 녀 두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때부터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다. 감염이 되면 친구건 애인이건 가족이건 20초 안에 사살하지 못하면 엄청난 힘으로 공격하고 얼굴에다 피를 내뿜어서 감염자로 만든다. 이들이 안전한 곳이라 생각하고 찾아간 곳은 9명의 군인이 지키고 있는 것인데 이들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생존자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결코 생존자를 안전하게 보호 할 목적으로 방송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가 떠 올랐다. 그 책 역시 종류는 다르지만 일제히 눈이 멀어버리는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고 세상은 혼란속에 빠진다. 그리고 역시나 거기서도 강자는 존재하고 약자도 존재한다. 28일 후 에서 총 아홉명의 군인들이 방송을 하고 생존자를 찾은 이유는 바로 여자 때문이다. 그들은 여자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당장에는 성적욕구 해소를 위해 그리고 좀 더 위대한 목적으로는 인류의 재건을 위해서 방송을 듣고 찾아 올 여자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처음에 그들은 친절하게 안전을 보장하지만 곧 본색을 드러낸다. 결국 주인공은 그들을 다 사살하고 안전한 곳으로 여자 두 명을 데리고 간다. 거기에는 두 가지의 결말이 존재한다. 하나는 치명적인 중상을 입은 남자가 죽은것이고 하나는 남자가 살아난 것이다. 하지만 해피엔딩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세상 전부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아니면 섬나라인 영국 하나만 이런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비행기가 날아다니기는 하지만 무엇이 목적인지 알 수 없다. 그들은 비행기에서 보이게 하려고 천으로 커다란 글씨를 만들어 평원에 펼쳐 놓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글자는 Help가 아니라 Hello이다.

영화를 보면 바이러스의 공포 보다도 더 한 것은 혼자 살아남은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다. 온통 텅텅 빈 도시에 혼자 남아있고 가끔 감염자들이 미친듯이 공격 해 대는 곳에서 살고 있다면 심지 약한 몇몇은 충분히 자살하고도 남을 상황이다. 주인공이 만나는 사람들은 저마다 감염되지 않은 자신 이외의 인간을 만났다는 것에 감격스러워 한다.

극한 상황에서 약자일 수 있는 사람들은 평상시에도 늘 약자이다. 어른 대 아이가 그렇고 남자 대 여자가 그렇다. 암만 아닌척 해도 사실은 사실이다. 여러가지 이성을 가지고 만든 규칙이나 법들은 서로 평등하다고 외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주 평화로울때나 가능한 얘기이다. 당장 전쟁이라도 터지면 여자와 어린아이 그리고 노인들은 가장 먼저 착취의 대상이 될 것이 뻔하다. 그래서 나는 별로 남녀 평등을 부르짖지 않는다. 위기의 상황이 닥치면 언제건 뒤집어 질 수 있는 것을 얄팍한 이성의 막으로 아닌 척 한다는 것은 내가 볼때 눈가리고 아웅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와 아이 그리고 노인은 상대적 우위인 존재들에게 무조건 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뭐랄까 암만 입으로 부르짖어 봐야 너무 쉽게 무너지고 깨어질 수 있는 구호가 허망하다는 것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 등장하는 눈먼 여자들은 눈먼 남자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한다. 그녀들은 자신과 또 남자와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는 강자인 남자가 요구를 했기 때문에 죽지 않으려면 들어주는 수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28일 후 에는 여자 두 명이 9명의 군인을 상대할 뻔 한다. 그 중 한명인 흑인 여자는 감염자들을 때려 잡거나 살아 남기 위해 냉정한 면을 볼때 남자보다 백번 나은 모습을 내내 보여주지만 결국은 살기 위해 몸을 내어놓으라는 군인들의 요구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저 자기보다 어린 여자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약을 퍼 먹일 뿐이다.

영화의 결론은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지만 그 두가지 중에서 어떤것도 희망적이지는 않다.  첫번째 버전은 남자가 죽고 여자 두 명이서 남는 것이고 두번째 버전은 남자가 죽지 않는 것이다. 왜 감독이 두 가지 결말을 준비했는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두개의 결말 다 다를것이 없으므로) 어느것도 희망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비행기가 지나가고 그들은 Hello라고 커다랗게 쓴 글자 위에서 손을 흔들지만 비행기는 그냥 지나간다. 그들은 마주보며 말한다. 이번에는 우릴 봤겠지? 봐도 그냥 지나치는 것 보다는 못봐서 지나쳤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나았겠지만 상황으로 봐서는 비행기가 다시 선회해서 그들을 구할것 같지가 않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은 단순해 지는 것 같았다. 아웅다웅 거려봐야 저런 커다란 재앙이 닥치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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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햇님의 인터넷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내사랑 싸가지는 결론부터 말 하자면 정말 봐도 그만 안봐도 그만이 아닌 꼭 봐서는 안될 영화이다. 작게는 영화비가 아까운 것에서 크게는 우리나라 영화계 전체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저따위 영화를 지키려고 스크린 쿼터가 존재하나 하는 다소 과대망상으로 까지 발전할 위험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내용을 살펴보자. 여고생 하지원이 연하에게 차이고 기분이 다소 엿같으셔서 길을 가다가 깡통을 발로 찬다. 근데 하필이면 이 깡통이 외제차를 운전하던 대학생 김재원에게 날라가고 순간 깡통을 피하려다 드리받아서 범퍼에 기스가 난다. 김재원은 범퍼 칠하는데 300만원이 든다면서 돈을 내 놓으라고 하고 하지원은 당연히 돈이 없다면서 버틴다. 도망가려던 하지원을 잡아내서 부모에게 이른다고 말 하고는 노비문서에 서명을 하게 한다. 노비 문서는 하루 일당 3만원을 기준으로 100일동안 김재원의 노비가 되어 300만원을 갚는다는 것이다. 한동안 노비로 시달림을 당하던 하지원은 어느날 범퍼 칠하는데 많아야 2만원 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고 김재원에게서 벗어난다. 하지만 벗어나는 과정에서 그동안의 억울함을 다소 오바스럽게 복수한 하지원 때문에 이번에는 역으로 김재원이 복수를 하려고 든다. 바로 하지원의 과외선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둘은 서로에게 사랑의 삐리리한 감정을 느끼고 이를 눈치챈 하지원의 엄마에게 걸려 김재원은 과외를 고만 하게 된다. 하지원은 새로운 과외 선생과 공부를 하게 되고 갑자기 돌변한 김재원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열심히 공부해서 김재원이 있는 대학의 법학과에 합격하고 감격스런 재회를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하지원의 새로운 과외 선생은 김재원이 소개시킨 사람이고 실제로는 합격했지만 합격자 명단에서 뺀 다음 실의에 빠진 하지원을 김재원이 짠 하고 나타나 위로해 주면서 합격증서를 내민다.

인터넷 소설을 가지고 말이 되니 안되니를 따지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게 영화화 된 이상 여기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가 없다. 가장 첫번째 문제는 바로 스토리가 확 튀어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문제 있는 CD를 플레이 시켰을때 2:24초 부문을 재생하다가 갑자기 4:05초 대로 확 건너뛰는것 처럼 그야말로 풀쩍 점프를 해 버린다. 처음에는 서로 원수같던 두 사람은 갑자기 연애 감정을 느낀다. 하지원의 경우는 김재원에게 걸려 온갖 막노동과 시달림을 견디다가 김재원이 사기 친 것을 (범퍼 칠하는 값이 300만원이라고 한 것) 알게 된 이후 막가파식 복수를 한다. 그리고 모든게 끝났다고 손 털려는 순간 과외선생이 되어서 나타난다. 과외 선생이 되어서도 김재원은 하지원을 괴롭히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 툭하면 발로 머리 때리고 거의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한다. 그런데 갑자기 하지원이 김재원을 좋아한다. 이유는 해변에 놀러 한번 데려가 주고 번지점프 같이 해 준것 때문이다. 그 두가지 이유로 철천지 원수처럼 여긴 김재원에게 울고 불고 꿇어앉아 빌 정도로 사랑해 버린다. 아무리 사랑이 그냥 퍽 하고 오는 것이라고 하지만 원수와 저 두가지 일을 했다고 해서 사랑하게 되는 여고생이 있다면 그건 기적이다. 이 기적 이외에 또 한가지 기적은 바로 하지원이 대학을 가게 되는 과정이다. 더이상 뭐라 입도 대기 싫은 돌대가리 하지원은 김재원이 입학한 명문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몇 달 바짝 공부한다. 그리고는 댐시 명문대학 법학과에 입학을 한다. 우리나라 입시 교육이 암만 지랄스럽지만 몇 달 공부한다고 초등학교 수준의 영어도 못하던 애가 대학을 그것도 법학과를 들어 갈 수는 없다. 차라리 알고보니 하지원이 천재였더라 하는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김재원. 그는 영화상으로 볼때는 잘생기고 돈 많고 거기다 명문대까지 다니는 멀쩡한 대학생이다. 그런 그가 자기 차에 깡통을 던진 하지원을 노예로 만드는 것 까지는 억지로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되어버리는 것에는 정말 할 말이 없다. 계속 발로 차며 구박을 하다가 번지점프대에서 하지원이 떨어지자 몸바쳐 그애를 구하는 장면은 정말 예술이다. 첨에는 아무 생각이 없던 김재원은 어느날 문득 하지원을 죽도록 사랑하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하지원을 대학가게 만들려고 헤어지자고 하고 과외선생을 붙여주고 자기학교 수재들을 모아 하지원을 위한 예상문제 출제반을 만든다. 그런다음 하지원이 대학에 떨어진 것 처럼 하기 위해 총장을 설득 합격자 명단에서 빼 버린다. 그래놓고는 구리구리한 기분으로 서 있는 하지원에게 실은 너 합격하셨지롱 하면서 합격증을 내어 놓는다.

이 소설을 쓴 이햇님은 보나마나 고등학생이나 중학생임이 뻔하다. 아니면 그렇게 말도 안되게 대학에 떡 하니 붙어버리는 상황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김재원의 친구가 총장 아들이라서 김재원이 총장에게 하지원이 합격했지만 명단에서 빼 달라는 부탁 따위가 먹혀들어간단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대학을 안 가본 사람만이 해 볼 수 있는 생각이다. 그래 좋다. 이햇님은 그렇다 치고 영화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들은 뭘 했는지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각색하거나 말 되게 고치면 살인나나 보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10대를 대상으로 기획되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나 유치하고 저렇게나 말이 안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바보같은 여자라도 부자에 잘생긴 남자를 만나 그 남자의 마음만 얻으면 암만 돌대가리지만 그 남자의 도움으로 대학도 갈 수 있으며 혼자서는 도저히 꿈 도 못꿀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이걸 보려는 10대가 있으면 차라리 우뢰매를 보는게 훨씬 좋을거라 충고 해 주고 싶다. 비록 나는 미쳐서 봤지만 저걸 볼 멀쩡한 20-30대가 없다는 가정하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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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1-20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다가 감동해서 저도 모르게 추천을... 영화는 별게 없지만, 감상문은 정말 재미있네요. 그러고보면 좋은 감상문을 위해서는 저런 영화도 필요가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근데 제 말이 말이 됩니까?

플라시보 2004-01-20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 저 허접한 글에 감동을 먹으셨다니 송구스럽습니다. 제 바램은 한 사람이라도 이 글을 보고 내사랑 싸가지를 극장가서 돈 씩이나 주고 팝콘과 콜라 씩이나 삼켜가며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건 딱 설때 TV에서 해 주면 엄마가 들여보내주는 실패한 전(제삿상에 놓기엔 뭐하나 내 입에 들어가기에는 황송스런)이나 먹으며 볼 영화입니다. 단 다른 채널에 모두 저것보다 더욱 더 지랄같은 명절특집으로 연예인들이 한복 입고 나와서 병신같은 게임을 한다는 가정하에 말입니다. 정말이지 영화 보고나서 감독 찾아가 멱살이라도 확 잡고 내 돈 내놔 하고 싶었습니다.

mannerist 2004-01-21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주고 저 영화 보는 사람보다 백만배 한심한게 영화 제작자 아닐지요. 중학생이니 그런 어이없는생각 한다손 치더라고 그걸 그대로 대본 만드는 인간들은 판단력이 있는 화상들인지...

푸핫, "더욱 더 지랄같은 명절특집~" 최곱니다. ㅎㅎ. 그것과 비슷한 급이거나 더 한심한 프로로 엄한 외국인들 한복 입혀놓고 가요 부르게 하는 프로가 있겠지요. TV매니아인 제 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동남아쪽이었나 아프리카쪽이었나, 몇년 연속으로 설날/추석 외국인 노래자랑에 방송국만 바꿔서 출연했던 외국인이 있다고 합니다. 나올때마다 다 '이런 데 처음이라'운운했다더군요. ㅋㅋㅋ...

연우주 2004-01-21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출발 비디오 같은 곳에서 나오는 화면만 보고 결코 볼만한 영화가 못 된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明卵 2004-01-22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싫어하는 유치뽕짝장르 영화입니다. 아는 동생이(중1) 진짜 재밌다고 난리를 치길래 그러냐... 그 참 재밌겠다. 하면서 속으로 이 기집애가 날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도 열광적으로 말해서 인터넷으로 예고편을 찾아보는 성의까지 보여줬지만 역시 제가 소화하기에 무리가 있음을 통감했었죠. 이렇게 플라시보님 감상을 읽으니 미소년이 반나체로 날아다닌다는 피터팬을 보는 것이 차라리 행복해질 것임을 더욱 더 확실히 믿지 않을 수 없군요.

플라시보 2004-01-23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연보라빛 우주님. 저도 출발비디오 여행을 보았으나 저 영화는 예고편정도도 보질 못했었습니다. 그럼 마음이 아무리 심란하고 정신이 혼미하여도 저걸 보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스포일러가 있네 마네 하면서 영화 소개하는 프로들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이럴땐 정말 커다란 도움이 되는 고마운(?)프로그램이란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명란님 모르긴 해도 피터팬이 아마 몇백배는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mannerist님. 연예인이 나와서 바보같은 게임 하는 것 보다 더 지랄스런게 외국인 장기자랑 맞습니다. 그리고 인체의 신비를 보여주는 서커스 따위도 있구요^^(저는 동물이건 사람이건 서커스 하는걸 너무너무 싫어합니다. 저걸 하기 위해 얼마나 퍼 맞았을까 하는 생각밖에는 안들어서요)

Arch 2004-02-05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나 퍼맞았을까. 가히 입을 찢어지게 만드는 발상이군요. 웃겼다구요.

플라시보 2004-02-05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장국영의 작품 패왕별희 중에서 그런 장면이 나오죠. 경극을 배우는 두 아이들이 도망쳐서 길거리에서 묘기인가 뭔가 하는 애들을 보면서 웁니다. 그러면서 나누는 대화가 '대체 얼마나 맞아야 저렇게 되는걸까?' 하면서 두 사내아이가 계속 눈물을 훔치죠. 그걸 보기 전에는 말 못하는 짐승들의 묘기만 보면서 했던 생각인데 사람들이 쑈를 해도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영화는 어떻게 보면 김희선이라는 여배우 때문에 실패 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만 아니었다면 사람들은 이 영화를 더 많이 보았을 것이고, 이 영화가 썩 잘 만들어진 멜로물임을 알게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그녀는 김희선답지 않은 연기력(?)을 보여줬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녀가 나오는 그렇고 그런 트랜디한 드라마같은 선입견을 주었다. 그녀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을 것 같다.

라와 자귀모에서의 김희선. 또 그 밖에 그녀가 출연한 수 많은 드라마에서의 연기를 보자면 김희선은 연기력이라고 할 만한 그 무엇도 갖추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예쁠 뿐이다. 예쁜 얼굴 하나로 책 읽듯 대사를 하며 오랜시간 잘도 버틴 배우가 바로 그녀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그 당연한 판단에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 정말로 연기를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좋은 작품을 만나지 못한 것일까? 그도 저도 아니면 관객과 시청자들이 원하는 그녀의 모습은 연기력이 아닌 그저 예쁜 얼굴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머리빈 바비인형 같아 보였던 것일까?

니(김희선)와 준하(주진모)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리고 옥탑방 고양이로 동거가 화두에 오르기 이전. 그들은 영화 속에서 서로 동거를 하고 있다. 옥탑방보다 조금 더 넓고 마당도 있는 집에서 말이다. 와니는 애니메이터이고 준하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다. 와니는 준하를 사랑하고 있지만 그녀에게는 첫사랑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그들에게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형벌마저 내려진 상태이다. 그녀의 첫 사랑이 의붓 동생 (조승우)이기 때문이다. 차 안에서 와니는 운전을 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동생과 함께 유학을 가겠다고, 동생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다.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가로수를 들이받는 사고를 낸다. 그 후 동생은 유학을 가고 엄마는 시골 이모네 집에 가서 살며 와니는 원래 자신들이 살던 집에서 준하와 함께 동거를 하며 살고 있다. 다들 그 사실로 부터 떠났지만 와니는 그 집을 지킴으로서 매일 그 사실을 마주하고 사는 것이다.

기까지 얘기하고 나면 슬프고 구차하며 질질 짜는 멜로드라마랑 뭐가 다르냐고 생각하겠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저 조금 어두워 졌을 뿐. 와니는 자신의 일도 열심히 하고 새로운 사랑도 한다. 다만 동생을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분명 동생도 자신을 사랑했음을 알고 있다. 어느 한 사람도 와니를 비난하지 않는다. 와니의 엄마도 와니와 동생의 오랜 친구였던(와니에게는 후배였던) 여자아이도 그냥 그들의 사랑에 대해 '하늘이 무섭지 않으냐' 따위의 추궁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써 와니와 동생의 사랑은 원색적이거나 통속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 분명 통속적인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마치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속 인물들이 통속적이지만 눈요깃거리를 위해서 과장하지 않기 때문에 통속적으로 보이지 않는것과 마찬가지 이다. 와니와 동생은 서로 사랑했었고 지금은 그냥 다 뭍어두고 있다. 거기에는 눈물도 질투도 원망도 없다. 다만 지나간 사실만이 있을 뿐이다.

약 준하가 이 사실 때문에 질투를 하거나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그리고 와니가 죄책감에 시달리며 엄마 앞에서 고개도 못 든다거나 매일 아빠의 무덤에 찾아가 사죄라도 했더라면 이 영화는 분명 내가 좋아할 만한 성질의 영화는 아니다. 그들이 울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울 수가 있었다. 꼭 와니와 동생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아서도 아니고 준하와 와니의 사랑이 아름다워서도 아니었다. 그냥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하고 씩씩하게(발랄하거나 깜찍하진 않다.)잘 사는 와니가 너무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와니는 어떻게 보면 자신의 슬픔을 이용해서 한없이 가련하고 처량한 희생양으로 둔갑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슬프지만 담담한것. 그게 와니의 매력이었고 나를 울게 한 힘이었다.

의 동거는 옥탑방의 그것처럼 알콩달콩 하거나 늘 사건이 하나씩뻥뻥 터지지는 않는다. 시장에서 장을 보며 딸기를 사려다가 너무 비싸서 포기하고 마는 와니의 뒷모습을 본 준하는 딸기를 사려고 한다. 여기있는 딸기 다 주세요 하지만 준하가 가진 돈은 별로 없다. 그래도 준하는 웃으며 딸기를 사고 와니와 함께 맛있게 먹는다. 둘의 사이가 조금 서먹해져서 떨어져 있는 동안 와니는 늘 준하가 자기 배에 얼굴을 올렸기 때문에 그 무게감이 그리워서 벼개를 배 위에 올리고 잔다. 와니와 준하는 예쁘게 살지 않는다. 그냥 우리처럼 산다. 일을 하고 장을 보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상이 전혀 영화같지가 않다. 물론 그 안에 지지고 볶고 싸우는, 조금 넌더리나는 현실은 거세되어 있지만 그 정도는 충분하게 봐 줄만하다. 절대로 현실같지 않게 아름답고 고귀한 하루 하루를 사는 영화속 주인공이 넘처 흐르는 세상이니까 말이다.

께 사는 것에 대한 환상도 심어주지 않고 첫사랑의 기억에 언제나 짖눌려사는 비현실도 보여주지 않는 와니와 준하는 그래서 이쁜 영화이다. 다분히 여성적인 영화이지만 남성 관객들도 충분하게 만족시킬 만하다고 생각되는 보기 드문 멜로이다.(총과 피가 등장하지 않는 영화는 보지 않는 사람은 예외) 그럼에도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고 또 아무도 이 영화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 참 슬프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이 영화를 추천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누구 나오는 영화냐고 묻고 김희선이라고 말하면 돌아오는 눈빛은 너무 뻔하지만 어쩔 수 없다. 비록 김희선이 이 영화 이후에 찍은 화성으로 간 사나이에서 또다시 이쁘지만 뻣뻣한 마네킹같은 연기로 돌아가버렸지만 나는 와니와 준하에서의 그녀만 기억하고 싶다. 여배우가 그것도 정말 예쁜 여배우가 화면에서 예쁘기를 포기했을때 얼마나 더 예뻐 보이는지를 그녀가 알았으면 좋겠다. 물론 사람들이 원하는 것만 보여주고 그 이미지로 먹고 사는것이 여배우지만 그녀가 연기를 하면서 조금 더 오랜 생명력을 가지고 싶다면 이제 더이상 예쁜 얼굴만 우려먹어서는 안된다. 아무리 그녀가 현대 의학의 힘을 빌려 그 아름다움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나이가 들면 더 이상 예뻐도 대접을 받기가 힘들다. 보톡스로 땡겨 어색한 웃음이나 짓는 과거 아름다웠던 여배우에 관해 냉담한 관객들을 보면 알 수가 있다. 그에 비해 주름은 좀 생겼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그 연기력과 카리스마 하나로 영화를 압도하는 여배우는 아직까지 관객들의 박수를 받고 있다.

영화는 꼭 순정만화 같다. 와니의 직업이 애니메이터 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첫 장면에서 애니메이션이 나오기도 하지만(참 한국적인 애니메이션이다.) 와니와 준하의 사는 모습이랄지 그들의 모양이 눈만 큰 여자가 등장하는 순정만화가 아닌 한혜연의 사실적인 순정 만화를 떠 올리게 한다.  나는 아직도 가끔 이 영화를 보면서 운다. 파이란이나 반딧불의 묘를 보고 흘리는 눈물보다는 훨씬 덜 짜고 가벼운 눈물이지만 가끔 그런 눈물도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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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zizi 2004-01-18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쥔공의 어릴적을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에 늠후 감동먹고, 꼼꼼한 아트디렉션에 감탄한(아는 총각이 했습니다만) 영화입니다. 조금 약한 스토리라인과 표정 5개 가지고 1시간 반 동안 연기하는 기미선만 아니었어도 컬트영화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는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왜 이 영화라고 생각하시는지, 는 알겠군요. 플라시보님의 그 부분이 맘에 와닿습니다.

Smila 2004-01-18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지옹님의 '늠후'를 만나게 되니 늠후늠후 반갑네요.ㅎㅎㅎ 전 이 영화를 반강제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탄 비행기에서 이 영화를 틀어주었으니 시작은 강제적이었지만, 자지 않고 끝까지 보았으니 결국 자발적인 관람을 한거지요. 기미선만 빼면 전체적으로 느낌이 좋은 영화였어요. 전 이 영화에서 조승우의 매력을 처음 발견했습니다.

찌리릿 2004-01-18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디오가게에 들어가서 빌려볼까하다다가 웬지 빌려지지않았던 영화. 이번에 함 빌려봐야겠네요.
이 영화의 포스터를 참 좋아했었는데.. 포스터를 바탕화면에 깔아놓고 보면서도 김희선이 아닌 다른 배우였으면 했습니다. 하지만... 포스터의 컬러만큼은 너무너무 좋네요. 응용해봐야지.. 욕심이 생기는 컬러네요.
숨은 영화 골라주셔서 고맙습니다. ^^

플라시보 2004-01-18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들 김희선을 싫어하시는군요. 물론 저도 싫어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별로 싫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생긴게 만화같아서 잘 어울린다는 생각마저 들던데..흐흐.

나방 2004-01-18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이영화 기대않고 봤는데 꽤 재밌게 봤답니다. 둘이 사는집의 탐나는 마룻바닥이 생각나는군요. 여름이 너무 그리워요. 겨울은 혹독하게 춥고 길고 밉고, 달콤한 초여름 늦여름만 마냥 생각해요.

플라시보 2004-01-19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집 좋죠? 보통 영화에 나오는 집 처럼 마냥 근사하지도 않고 딱 사람 사는 집 처럼(그리하야 탐나는 마룻바닥도 있는 것이겠구요^^) 저는 마당이 있어서 호수로 물주고 그런것에 관한 동경이 무척 강합니다. 아기때 부터 늘 아파트에서만 살아서요. 언젠가는 마당있는 집을 사고야 말껍니다.^^ 저도 겨울은 싫어라하고 봄부터 초여름까지를 너무 좋아합니다. 따시자나요^^
 

언젠가 한번은 꼭 쓰고 싶었다. 파이란을 보면서 얼마나 슬프고 또 얼마나 좋았었는지를 말이다.
사진속의 두 남녀는 부부이다. 하지만 그들은 딱 한번 만났을 뿐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아내인 여자는 죽는다. 그녀의 이름은 파이란 이었다.

우리의 주인공 강재씨. 할줄 아는것도 없으면서 졸라 맘까지 약한 3류 깡패. 친구는 보스가 되었지만 맘도 약하고 쌈도 잘 못하는 강재는 그의 똘마니가 되어서 산다. 미성년자에게 불법 비디오를 대여해 주고 구류를 살다가 나와서도 친구인 보스에게 '씨발 강재야 제발 정신좀 차리고 살자'란 소리를 들을 위인밖에 못 되는 인간이다. 한마디로 누구의 남편이 되기는 커녕 누군가의 아는 사람이 되기에도 쪽팔리는 인물이다. 이런 그가 저렇게 고운 여자와 결혼 할 수 있었던 것은 위장 결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여자 파이란. 엄마가 죽으면서 남겨준. 한국에 있다는 이모집 주소한장 달랑 들고 왔지만 이미 이모는 한국을 떠나고 없다. 어차피 모국인 중국으로 돌아가도 살길이 막막한 파이란은 위장결혼을 해서 한국에 남기로 한다. 위장 결혼을 하고나서 술집에 팔릴뻔한 위기를 용케 넘긴 파이란은 세탁소에서 일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병에 걸린다. 치료만 하면 나을 수 있었던 병이었지만 그녀는 끝내 죽었다. 그녀에게 돈을 받는 브로커가 아프다고 좀 봐 달라고 말한 그녀에게 '니가 돈을 안내면 나도 아파'하면서 발가락 무좀에 약이나 처 바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죽고. 강재는 그녀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그녀가 살았던 세탁소로 간다. 10기통짜리 엔진달린 배한척을 약속받고 친구 대신 살인죄를 덮어쓰겠다고 하고서 말이다.

결혼식 서류를 주고 받을때 딱 한번 만났을 뿐인 이들. 이들은 서로 말을 걸어 본 적도 없고 손을 한번 잡아보지도 못한. 그냥 필요에 의한 위장 결혼을 한 사이일 뿐이다. 한사람은 이 땅에 남을 수 있는 결혼 증서가 필요했고 한 사람은 돈이 필요했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 계약을 했고 별 이변이 없는 한 사는동안 한번도 마주칠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파이란이 결핵으로 죽어버리자 이들은 서로 만나야 했다. 실제로 마주하고 앉을수는 없어도 강재는 그녀의 과거를 쫒아서 그녀를 만나야 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펑펑 울었었다. 누군들 이 영화를 보고 울지 않겠냐 만은 나는 파이란이 죽었다는 사실 보다 그녀가 혼자 세탁소 방에 있을 때 부터 울기 시작했다. 틀면 녹물만 나오는 수도꼭지를 보고 울때 나도 울었고 한번도 보지 못할 남자를 위해 칫솔 하나를 더 사면서 설레어 하는 그녀를 보면서 울었다. 그녀의 사랑이 너무 불쌍했기 때문이었다.      

강재씨도 참 불쌍한 인생이었지만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운 이유는 순전히 파이란 때문이었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엄한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혼자 살면서 파이란 같은 기분을 느꼈다고 믿는다. 아무것도 의지할 곳 없이 혼자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 버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사랑이라도 있어야 살 수 있었다. 매일 보는 사이 자기도 모르게 좋아져 버린, 돈을 받고 자신과 결혼해준 사진으로만 남아있는 남자라도 사랑해야만 살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나도 한때는 그랬었던것 같다. 사는게 힘들어서 뭐라도 좋아하고 아끼고 하는 기쁨이라도 있어야 이 시간을 견딜 수 있겠구나 싶었던 시간. 나는 물론 사람이 아닌 다른걸 선택했지만(뭔지는 쪽팔려 말을 못하겠다.) 그걸 붙잡고 말도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었다. 

파이란은 참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주인공들은 시간속에서 서로 엇갈리지만 감독은 그 엇갈림을 교묘하게 연결 해 놓아서 마치 관객들은 그들이 서로 한 공간에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얼굴도 한번 못 보고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파이란은 사진 한장으로 또 강재는 그녀의 편지 한통으로 서로를 좋아하고 또 끝내는 바닷가에서 오열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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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la 2004-01-15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사실 강재씨땜에 괴로왔고 강재씨땜에 울었고 강재씨땜에 이 영화를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파이란이 왜 강재씨를 좋아했지는 이해가 잘 안되더라구요. 플라시보님 글을 보니 제가 생각 못한 부분이 있었네요.

김토끼 2004-01-15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열하는 장면에서 저는 눈물 쏟았습니다. 별로 안 슬프다고 생각했는데 담배 불도 제대로 못 붙이는 강재를 볼 때.왈칵-!하더라구요.그리고 눈물 보이는 건 창피했으니까 영화는 영화다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통 먹히지 않는 부분이었어요.

Smila 2004-01-15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담화님이 저하고 같은 방법을 쓰시는군요. 눈물 나올때 '영화는 영화다'라고 생각하는거.

찌리릿 2004-01-16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이란.. 참 좋은 영화, 잘 만든 영화인 것 같습니다. 저는 개봉하고 한참 뒤인 작년에 비디오로 봤었는데.. 왜 이렇게 늦게 보게 되었을까.. 아쉬움까지 들었습니다.
영화의 전체분위기는 절제되면서도 지루하지 않았고, 최민식의 감정과잉인듯하면서도 열정적인 적나라함, 그리고 그냥 눈물 나게 하는 장백지의 여백이 있는 연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뜯어보면 치사하고 추접다... 그 속에서.. 양심도 느끼고 감성적일 때도 있고, 눈물도 흘리는 거 아닐까...
그런데.. 문제는.. 파이란처럼 처절하게도 힘없이, 곱게 사는 사람들이 영화 밖에 정말로 있다는 것...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슬픔은 여기에서 나온다. 파이런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그 사실 그대로의 그 자체가...
나나 강재나 강재 똘마니, 비디오가게 문닫아놓고 그짓이나 하는 양아치, 구멍가게에 고리대금 이자나 뜯는 양아치들, 무좀 난 직업소개소 소장, 세탁소 할머니의 일상 시간 속에 파이란은 어떤 의미가 있어왔나...
이런 쓸데없는 생각에 영화 보면서 더 슬펐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ㅠ.ㅠ

Arch 2004-02-05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석하게도 전... 책보다는 영화에 대해 더 할말이 많은지 조금씩 끄적이게 되네요. 애석하게도 전 파이란을 보면서 울지 않았습니다. 애석하다함은 다른 분들처럼 둘의 사랑에 안타까워하고, 감정이입이 되어서 영화에 빠지지 못했다는뜻일 수도 있겠네요. 차라리 신파를 지칭했다면 파이란을 어여삐 봐줬겠지만 세련된 영상과 절제된 연기를 가지고 사기치는것 같아서 보는내내 맘이 불편하더군요. 원작에는 파이란이 술집호스트로 나와서 둘이 느끼는 사랑의 감정에 절박한 개연성을 붙여주던데 영화에선 왜 파이란이 것도 빚이많은 파이란이 시골 세탁소에서 일하는지. 갑자기 왜 죽는지. 치료는 왜 안 받았는지 두리뭉실하게 건너띄고 있습니다. 오로지 강재의 뒤늦은 순애보를 보여주려는듯이
어느 잡지의 평처럼 영화 자체가 청순가련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요원한 희망을 이러저러한 눈속임으로 보여주는듯 싶더군요. 그런면에서 눈물이 안 나왔구요. 몰입을 할 수 있을때 가장 행복할진대...

플라시보 2004-02-05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둘의 사랑 때문에 울었다기 보다 그냥 혼자 한국에서 살아가는 파이란을 보고 울었습니다. 칫솔 하나 사고 기뻐하는 모습. 수돗물을 틀었는데 녹물만 나오고.. 정작 그 전에는 술집에 팔리지 않으려고 혀까지 깨물며 연기를 했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녹물만 나오는 수도꼭지를 보며 우는 것이 슬펐더랬습니다. 어떤 영화는 남들이 다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고 또 남들이 다 울지 않아도 혼자서 울 수도 있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또 그때의 자신의 상황에 따라서 울수도 울지 않을수도 있을꺼구요^^
 

랑이 변하니? 하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응 변하더라 하고 대답할 것이다. 여기 한 남자가 묻는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여자는 아무 대답이 없다. 그리고 이미 사랑은 변해 버렸다. 어쩌면 사랑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자와 여자는 일로 만난다. 남자는 음향기사이고 여자는 라디오 방송국에 PD겸 DJ이다. 남자는 엄마가 없고 아버지와 할머니 고모와 함께 낡은 한옥집에 산다. 여자는 이혼을 했고 혼자 작은 아파트에서 산다. 그들은 어쩌다 라면을 함께 먹고 싶어 진다. 그리고 서로를 좋아하게 되고 함께 잠을 자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연인이 된다. 그러다 어느날 여자가 변한다. 남자는 여자를 잊는게 너무나도 괴롭지만 어쩔 수 없다. 그의 할머니 말처럼 지나간 버스와 여자는 잡지 않는 것이니까. 아니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니까... 고통스럽던 시간이 흐르고 남자의 상처가 아물었을때 여자는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 다시 만날까? 하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그녀가 할머니 주라고 선물한 화분을 돌려준다. 할머니가 이미 죽어서 화분을 받을 수 없듯이 남자의 마음속에 여자에 대한 사랑은 이미 죽었다. 눈감고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아팠는지를 기억 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랑을 다시 시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영화를 개봉했을때 나는 혼자 봤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참 잔인한 얘기를 예쁘게도 화면에 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소리를 따기 위해 다니는 대나무 숲과 바닷가 그리고 눈 내리는 절은 고즈넉하고 아름답지만 함께 하는 그들의 시간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시궁창같은 도시의 삼류들만 모여 있는 곳에서도 사랑이 아름다울 수 있듯이 반대로 그렇게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도 사랑은 이기적이고 잔인하고 슬프고 추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볼 당시 나는 꾀 여러권의 영화잡지를 구독하고 있었으므로 봄날은 간다에 관한 수많은 평을 보았다. 하지만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평론가들의 평을 기억하기에는 내 머리가 지나치게 나쁘거나 아니면 내가 느낀 감정들이 너무 강해서 일 것이다.


 

 

 

 

 

 

 

 

 

 

 

 

군가는 여자가 남자를 버린 이유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라고 하고 누구는 새로운 사랑이 생겨서 라고도 했다. 하지만 내가 볼때는 처음부터 사랑은 없었다. 그냥 남자의 일방적인 짝사랑만 있었을 뿐이다. 여자를 반하게 하기에 그는 너무 감정적이고 약한 남자였다. 적어도 그 여자를 반하게 할 남자는 항상 선그라스를 쓰는 것멋 정도라도 갖추어야 했었는지도 모른다. 여자에게 남자는 그냥 잠시 만난 사람이다. 같이 라면을 먹고 같이 잠을 자고 같이 일을 하고. 그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이기심은 어느날 불쑥 일하는데 찾아가서 그를 흔들어 놓기도 하고 그러다 어느날 한달만 떨어져서 지내보자고 한다. 그러다 남자가 그녀를 찾아가고 술을 마시고 괴로워하고 울자 여자는 헤어지자고 한다. 그녀 집 앞에서 밤새 차에서 잠을 잔 그에게 그녀가 남긴 말은 우리 헤어지자 이다.

가 했던 사랑들은 전부 똑같지 않았다. 그가 나를 더 사랑하거나 내가 그를 더 사랑하거나. 나를 더 사랑한 그들은 나에게 매달렸고 그러면 그럴수록 하찮게 느껴지고 귀찮아 지더니 이내 잔인하게 버리도록 했다. 전화기 너머로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걸레를 빨았고 먼길을 우산도 없이 찾아온 사람에게 문도 열어주지 않고 다시 비를 맞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게 했다. 이미 모든게 끝나서 무의미한 나에게 왜 그러는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일종의 괴롭힘 밖에는 되질 않았다. 그런 기억들을 까맣게 잊고 나는 다시 사랑을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매달리는 쪽이 된다. 나의 어떤 행동과 어떤 말에도 무덤덤한 그를 견딜수가 없었다.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발 옆에만 있어 달라고 구걸하는 나에게 그들은 예전의 나처럼 잔인했다. 숨을 쉬는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그들은 멀쩡하게 회사를 다니고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며 놀았다. 그런 기억이 힘들어지면 남는건 하나다. 마음의 문을 닫는것. 그래서 다시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지 않는 것. 사랑하는 기쁨도 없겠지만 매달리고 잊어야 하는 일련의 구차한 과정도 존재하지 않는 것.

자가 다른 남자와 콘도로 놀러가는 것을 본 남자는 유치하게도 여자의 초록색 차를 긁어 버린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남자는 미쳤을지도 모른다. 마음을 전달할 수 없다면, 나처럼 아프게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차라도 긁어야 하는 것. 사랑은 가끔 이기적이기도 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나를 즈려밟고 고이 가시옵소서 하는건 인간이 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이다.

랑이 똑같지 않으니 어느 한쪽은 기울게 되어 있다. 결국은 더 많이 좋아한 사람이 더 많이 상처를 받는다는 공식은 불행하게도 사실이다. 하지만 저걸 머리로 안다고 해서 마음까지 따라가지는 않는다. 뻔하게 보이면서도 어쩔 수 없으니까 사랑을 하고 매달리는 것이겠지.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는 다시 남자를 찾는다. 그리고 이미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주라고 화분을 선물한다. 남자는 내내 말없이 그냥 웃기만 한다. 서로 돌아서서 가려는데 여자는 다시 뛰어간다. '우리 다시 만날까?' 남자는 대답대신 화분을 준다. 아직 그녀에 대한 사랑의 기억을 완전히 잊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자기 상처에 소금을 뿌려가며 조금씩 단련 시켰다. 그래서 이제는 아물었고 흉터는 남았지만 아프지는 않다. 그는 여자를 다시 만나지 않는다. 그냥 그냥 만났던 여자가 아니므로 아문 상처를 가진채 다시 그 여자를 스쳐가는 사람으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조금이라도 자신이 치열하게 사랑했던 지난날에 대한 예의로 그냥 두었을지도 모른다. 많이 사랑하던 사람이 친구로 지내자고 했을때 내가 거절한 것 처럼 말이다. 친구로라도 옆에 두고 싶은 욕심이 그 남자처럼 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을만큼 가슴을 쾅쾅 때렸지만 나는 결국은 거절했다. 그건 의미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만나는 것은 또 다른 고통만 안겨 줄 뿐이니까 말이다. 

목이 왜 봄날은 간다 인가 한번 생각 해 보았다. 봄날은 정말 짧다. 여름처럼 강렬하지도 겨울처럼 혹독하지도 않다. 하지만 아주 짧은 그 순간동안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어 버린다. 흑백에서 다시 컬러로 세상이 바뀌고 옷이 얇아지고 햇볕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사랑도 비슷한게 아닐까 싶다. 잠깐 세상은 컬러로 바뀌고 내가 나 스스로에게 씌웠던 두터운 가면도 벗게 하고 그로인해 마음이 따뜻해 지지만 결국은 가는 것이다. 봄날은 여름을 향해 가듯이 사랑도 이별을 향해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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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너머 2004-01-11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이 변하니?'라는 질문에 나는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아니,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변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사람,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사랑이라는 건 감정의 한 표현입니다. 동일한 감정이라도 그걸 스스로 사랑이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고, 그 감정을 그냥 지나가는 감정으로 규정하면 그냥 그렇게 흘러가버리는 거죠. 그리고 그 규정(표현)이 감정의 내용에 영향을 미칩니다. 같은 호감도 사랑이라 불리면서 정말 '사랑'이라는게 되는거고, 반대의 경우는 한없이 가벼워지는 거죠. 이영애와 유지태의 차이는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많은 연애의 아픔은 이 간격에서 비롯되는거죠. 더 많이 좋아하냐, 적게 좋아하냐는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양'의 문제는 상황과 조건,시간과 추억이 쌓여가면서 계속 바뀝니다. 처음엔 남자가 더 좋아했다가, 후엔 여자가 더 좋아하는 경우도 많고, 반대의 경우도 종종 있죠. 하지만 이 차이는 '질'의 문제입니다. 결국 문제는 '나'와 '그녀'에게 달린게 아닌가 합니다. 감정의 양이 중요한게 아니라 '사랑'에 대한 코드를 어떻게 서로 '통'하는가 이죠. 이영애 역시 자신에게 충실한 여자였지만, 유지태와는 그 코드가 맞지 않은게 아닌가 합니다. 결국 마지막에 이영애의 손을 (흔히 보통의 남자들이 미련을 못버리고 그렇듯이) 유지태가 잡았더라도 오히려 더 큰 상처만 받고 끝나게 될 것이 뻔한거죠. 써놓고보니 어쭙잖은 개똥철학이네요...--; 어쨌든 '봄날은 간다'...너무 재미있게 본 영화였습니다. 그때 함께 봤던 사람은 지금 어딨는지 모르겠지만...덕분에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네요. DVD로라도 다시 빌려봐야겠습니다. ^^

mannerist 2004-01-12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봤던 영화평 중 가장 설득력있던건 노희경 작가의 '그들이 헤어졌다... 다행이다.'였어요. 사랑이 변한다는걸,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는 걸 아는 은수는 상우의 순수가 힘겨웠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었죠.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한다는거,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질 수 밖에 없다는데 동감입니다. 그 기울어짐 때문에 누구나 한 번쯤 쓴 맛을 볼 수 밖에 없다는 것도.

두 가지 길이 있지 않을까요. (사랑으로 인해) 어느 순간은 지극한 행복을, 만족을 누리지만 반대로 지독한 절망에 고통에 빠지기 쉬운 기복 심한 삶, 아예 적당히 마음을 닫아 감당못할 행복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좌절적인 암담함도 누리지 않는 삶. 평균이야 둘이 똑같겠지만 어느게 더 나을까요. 작년 꽤나 심하게 고민했던 물음인데. 당분간 제 답은 "후자"입니다. 뭐 다시 눈에 뭐가 씌이면 전자로 돌아갈 확률이 적지 않지만요. 글 잘 보았습니다.^_^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