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 스포일러 만땅입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분들은 읽지 않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엄마와 아들이 있다. 아들은 시쳇말로 좀 모자란다. 생긴건 예쁘장하지만 그 나이에 여자 한번 안아보지 못했을 정도로 멍청하고 바보스러운 아들이다. 엄마는 읍내 약재상에서 일을 한다. 그리고 틈틈이 야매로 침을 놓아서 생계에 보탠다. 이들의 삶은 궁핍 그 자체이다. 바보 아들은 일을 할 수 없으며 엄마의 벌이 또한 대단치않다. 엄마는 아들이라면 끔찍하다. 아들이 다칠것 같으면 작두로 자기 손을 썰어도, 거기서 나온 피가 자기 피라는 것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이다. 저 정도면 정말이지 모성애라는 것의 정점에 엄마는 가 있는것만 같다.
하지만 엄마가 아들을 그렇게나 끔찍하게 여기는 것은 죄의식 때문이다. 엄마는 아주 힘들었을때 아들에게 농약을 먹였다. 그리고 아마 정황상 아들은 그때부터 조금 바보가 되지 않았나 싶다. 김혜자는 고백한다. 마음이 약해서 더 강한 농약을 먹이지 못했다고. 그래서 이틀동안 설사하고 죽다 살아났다고.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말한다. 그때 이후로 좋다는건 다 구해다 먹였는데... 아마 이 다음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반푼이가 되어버렸다는 것이겠지.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아들은 이 일을 기억한다. 다섯살때 일이고 그 날 이후로 바보가 되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건 마치 말아톤의 초원이가 엄마에게 '그때 초원이 손 놨지' 라고 기억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이들은 간혹 무척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생을 뒤바꿔놓을 수 있는 큰 사건을 기억해서 어른들을 놀라게 한다.
어느 날 이 바보 아들이 살인을 했다고 한다. 기껏 지 이름 석자를 쓴 골프공 하나가 증거물이라고 한다. 엄마는 인정할 수 없다. 아들은 풀벌레 한마리도 못 죽이는 위인이다. 그런데 살인을 했다니. 엄마는 아들 대신 아들의 무제를 자신이 직접 증명해내기로 결심한다. 그 과정에서 엄마는 죽은 여자아이의 비밀을 알게 되고, 어쩌면 아들이 아닌 그 여자아이의 비밀의 남자들 중 누군가가 살인을 했을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엄마는 아들에게 기억을 해 보라고 한다. 그때 혹시 누군가를 보지 않았냐고. 드디어 아들은 기억을 해 낸다. 엄마는 그를 찾아간다. 하지만 거기서 엄마가 들은 얘기는 아들이 살인을 했다는 사실이다.
엄마는 바보 아들을 위해서 살인을 한다. 아들이 살인을 한 이유는 엄마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바보라고 하면 참지 말라는 것. 아들은 엄마가 시킨대로 한것 뿐이었다. 엄마가 살인을 하고 난 이후 형사가 찾아온다. 진범을 잡았다면서. 그런데 가서 보니 아들보다 대여섯배쯤은 더 모자라 보인다. 그녀는 묻는다. '엄마는? 엄마는 있니?' 그러면서 목놓아 운다. 그 아이에게도 자신과 같은 엄마가 있어야 살인죄를 뒤집어쓰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들과 엄마는 이제 비밀을 공유한 사이가 된다. 표면적으로 아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엄마가 살인당시 흘린 결정적 증거를 되돌려준다. 엄마는 짐짓 아무일도 없는듯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쉽지 않다. 그래서 자신만 아는 침자리에 침을 놓고 미친듯이 춤을 춘다. 아니 어쩌면 엄마는 정말로 미쳐버린건지도 모른다. 미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 엄청난 비밀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폭력의 승계 혹은 폭력의 최후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가난은 하나의 폭력이었다. 그 폭력은 엄마로 하여금 아들에게 농약을 먹이고 자신도 죽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엄마에 비해 아들이 약자였으므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들에게만 돌아갔다. 농약 때문에 바보가 된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은 또 다시 자신보다 더 약자인 여자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하필 아들이 죽인 여자아이 역시 그 동네에서 가장 약자의 입장이다. 늙은 할머니와 단 둘이 살며 친척들은 나몰라라 한다. 여자아이는 생계를 위해 할 수 없이 몸을 판다. 돈을 받고 더러는 쌀도 받으면서. 여자아이의 핸드폰이 담긴 쌀독은 그래서 끔찍하다. 엄마는 아들을 위해 또 다시 폭력을 행사한다. 이번에는 아들의 비밀을 알고 있는 힘없는 노인이다. 그리고 그 폭력은 다시 아들보다 더 모자라는 남자에게로 이어진다. 이제 이 사건의 최후 피해자는 누구일까?
흔히 약자는 착하다고 생각한다. 표면적으로는 맞다. 약자는 늘 강자에게 당하니까. 하지만 약자도 살기 위해 또다시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그것은 당연하지만 그 약자보다 훨씬 더 약자에게 돌아간다. 영화에서 엄마와 아들은 모두 사회적 약자이다. 엄마는 아들의 친구에게조차 이용을 당해야 할 만큼 약자이다. 하지만 엄마와 아들은 그래도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보다 훨씬 약자에게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한다.
엄마는 아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떤 행동을 해도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다 용서받을 수 있을까? 나 자신, 내 아이. 내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끔찍한일도 다 정당화 될 수 있는 문제일까? 피해는 돌고 돈다. 그래서 마침내 사회적으로 제일 약자에게 최종전달이 된다. 그리고 그 약자는 살기 위해 또 다른 피해자를 찾을 것이다. 자기보다 훨씬 약한 존재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에게 돌아온 폭력과 피해를 해소한다. 지금 내가 행하는 하나의 폭력은 결코 끝이 나질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정답일 것이다. 그것은 형태를 다르게 해서 혹은 진화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마치 운동의 법칙과도 같다. 폭력을 행사하고 누군가가 피해를 입으면 그 곳에서 모든게 끝난다고 생각하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폭력의 흐름을 추적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폭력이 돌고 돌아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그 길에 어떤 힘없는 이들이 그 폭력으로 인해 쓰러지거나 혹은 자신도 폭력을 행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는지.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서 조금 덜 세련되어 보이긴 하지만 주제 의식은 가장 뚜렷한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