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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무라카미 류 지음 / 예문 / 1996년 4월
평점 :
절판
1969년, 비틀즈는 화이트앨범, 옐로 서브마린, 아일 비 로드를 발표했다. 겐은 학교에 불순한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 바람에 자택근신을 당했다. 최고퀸카인 여자애를 꼬셨다. 그 바람에 그 여자애를 좋아하던 깡패에게 당할 뻔 했다.
1988년, 난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쁘다던 고3이었다. 공부는 하는 척 했다. 학교에서 애들을 모아놓고 술을 마시다가 무섭기로 소문난 한문선생에게 들켰다. 마이클 잭슨과 듀란듀란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로버트 레드포드를 사랑했다. 날라리들을 따라가 나이트클럽에 다녔다. 담배를 피워봤지만 나에게 맞지는 않았다.
지금은 2003년, 한국의 고딩들은 탈출을 꿈꾼다(아니 꿈꾸리라고 생각한다). 꽤나 자서전적으로 보이는 소설 <69>을 쓴 날라리 무라까미 류는 50세가 넘었다. 대구에선 지하철 사고가 났다. 부시는 전쟁을 준비 중이다.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에미넴에게 욕을 먹고있다. 핸드폰에서 영화도 나온다.
1969년은 불순한 해임에 틀림없다. 이 책을 나에게 선물해준 아이가 전철 안에서 표지가 밖으로 보이게 안고앉아있는 바람에 사람들이 무지하게 힐끔거렸다는 것만 봐도, 이 해의 의도적인 불순함을 알 수 있을 게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마약냄새 폴폴 나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답게 포르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 소설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불순함’이라면, 어른들의 세계가 말하는 `불순함’에 대해서라면 역시 배신하지 않는다.
<69>의 불순한 주인공 겐은 경쾌하다. 알지도 못하는 레닌에 대해서 씨부리면서도, 학교의 주먹짱들 앞에서 쿨한 척하면서도, 속으론 겁이 나는 모양인데도 경쾌하다. 그리고 이런 아이들이 그렇듯 인기가 좋다. (입만 살은 이 놈의 귀여움이란 천사 같은 여자애를 꼬시기에도 충분한 것 같다.) 읽다보면, 아앗 이런 얘기를 소설이라고 써내다니 정말 뻔뻔한 작가야 라고 생각이 들만큼 즐겁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는 꼭 경쾌하고 즐거운 일들만 있는 건 아니다. 겐은 결국 그의 천사 마츠이한테 차이고, 나의 고2때 담임은 나를 학교의 해충 보듯 했으며, 커서 달리 하고싶은 것도 없는데도 가라니까 학교에 갔다. 오옷, 제법 불량했던 나의 1988년에 면죄부를 준 게 바로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이다’라는 무라카미 스타일의 인생관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즐겁지 않은 인생이기에 즐겁게 살도록 노력하지 않는 것은 죄인 것이다. 그러려면, 괜히 착한 척, 배가 남산만큼 나왔던 고2때 담임을 좋아하도록 노력하거나 맥도날드에 앉아서 환경문제를 토론하거나 하는 위선은 집어던져버려야 하겠다. 그냥, 싫은 건 싫은 거다. 좋은 건 좋은 거다.
그 다음 단계 무라카미 류 스타일의 복수는 그들보다도 더 즐겁게 사는 거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더 힘들고도 스트레이트한 싸움이 된다. 내 에너지를 먹어버릴 듯 갈겨드는 사람들게도 보란 듯이 즐겁게 살려면 해리 포터에게라도 도움을 청해야 할 판이다.
1969년의 겐은 커서 2003년인 지금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1969년의 겐은 그렇게 살아버리면 되었지만 우린 알고 있다. 세상은 그렇게 녹녹한 게 아니라는 것을. 그 놈, 겉보기에는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뭔가 일탈을 꿈꾸는 어른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래도 멋은 살아서 뭔가 해보고 싶은 건 많은데 잘 안 된다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를 `안’ 즐겁게 해주는 모든 것들이 덮쳐올 때마다 가끔은 괴로와하지만 탁탁 털어버리자! 하고 속으로 말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은근히 겁도 많은 놈이 어떻게 살고 있을지.
아 참, <69>에 대한 독후감을 쓰는 거였던가? 주인공 겐 스타일로 말하자면, 이 책을 읽고나서 나의 학창시절과 너무 흡사한 바람에 감명받은 나머지 항상 껴안고 다니다가 우연히 크로스백을 멘 어떤 남자애가 말을 걸어오길래 이 책에 대한 얘기로 시작해서 밤새 술을 마시다가 다음날 아침 즈음엔 사귀게 되었다, 라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고, 실은 그냥 아주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