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다른건 다 제쳐두고 다코타 패닝이 어떻게 컸는지가 궁금해서 보게 되었다. 아이엠 샘에서 대 배우 숀팬의 연기에 전혀 가리지도 않았고 그 카리스마에 눌리지도 않았던 다코타 패닝. 그렇다고 해서 미달이과의 톡 까진 애 답지 않은 애 같은 느낌도 아니었다. 할리 조엘 오스먼트만큼이나 놀라운 발견이었던 다코타 패닝은 다행스럽게도 아주 잘 크고 있었다. (외모로나 연기로나) 아이엠 샘에서 보다 스토리상에서는 분명 중요한 인물인데 출연하는 시간은 많이 줄어서 좀 아쉬웠다. 그래도 그럭저럭 볼만 했다. 하지만 다코타 패닝만 보면 만족이야 하면서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가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이 자국 이외의 나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에서는 뒷골이 땡겼다.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맥시코 시티에 사는 한 가족이 아이의 경호원을 고용한다. 그러다가 아이가 그만 납치가 되어버리고 범인은 몸값을 요구한다. 아이의 아버지는 경찰에 신고하고 몸값을 약속된 장소에 뒀으나 일이 틀어져서 몸값을 받으러간 범인의 가족이 살해당하고 열받은 범인은 아이를 죽여버린다. 다소 무뚝뚝했지만 아이를 통해 세상을 다시 살아봐야겠다는 용기를 얻은 경호원은 아이를 죽인 사람들에게 복수를 시작한다.

내용으로 보자면 뭐 한 남자의 복수극? 그쯤 될 것이다. 보는 내내 레옹을 떠 올렸을 정도로 아이와 경호원의 관계는 각별하다. 이 영화는 백인 여자아이와 그를 지키는 경호원. 즉 영웅을 흑인으로 설정해서 일면 인종편견을 타파하는듯 보인다. 하지만 배경인 멕시코 시티에 사는 맥시코 인간들은 전부 쓰레기로 묘사 해 두었다. 무식하고 가난한것도 모자라서 잔인하고 엉성하기까지 한 그들을 보면 기도차질 않았다. 흑인 영웅은 너무도 손쉽게 아이를 납치한 조직의 수뇌부까지 들어간다. 그나라 경찰들도 어쩌지 못하고 기자들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조직이지만 우리의 흑인 영웅이자 미국인에게는 누워서 떡먹기 쯤이다. 그도 그럴것이 아이의 엄마는 같은 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록 알콜중독이긴 하지만 흔쾌히 그를 고용했으니까 그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어야 한다. 딸아이의 아버지인 맥시코인은 그럭저럭 괜찮은 아빠이지만 막상 문제가 닥치니 바보처럼 아무것도 못하는 무능력자로 나온다.  결국 이 영화는 미국인은 미국인이 지키고 미국인끼리 똘똘 뭉쳐야 한다는 메세지를 강력하게 전하고 있다. 경호원의 등장으로 이 가족은 맥시코 가족에서 미국인 가족으로 새롭게 재 탄생하는 것이다. 이제 미국은 피부색이 다른건 용서를 했나보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피부색이 달라도 미국인일것.

다코타 패닝과 덴젤 워싱턴은 호흡도 잘맞고 연기도 썩 잘했다. 그래서 하마터면 이 영화가 '유괴
나빠요' 영화로 착각할뻔 했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걸 말하려는게 아니었다.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처럼 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것은 코믹스 안이건 실제 세상에서건 반드시 미국인이며 미국인일 수 밖에 더 있겠냐는 영화이다. 자국에서 일어나는 숱한 유괴사건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한수 더 떠서 경찰까지 깊숙하게 개입되어있는 썩어빠진 나라. 그 나라의 한 가운데서 우리의 외롭고 고독한 영웅 덴젤 워싱턴은 복수를 시작한다.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복수이긴 하지만 복수라고 부르기에도 뭣할 정도로 너무나 쉽다. (그렇게 잘 도와줄것 같으면 지들이 잡지 왜 저러고 있나 싶을 정도로 멕시코인 경찰간부와 여기자는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 ) 정계와 손을잡고 움직이며, 멕시코인이라면 누구나 그 존재를 알지만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조직을 미국인 혼자서 간단하게 일망타진한다.

이 영화가 결정적으로 나빴던 것은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었다. 멕시코인에게 감사한다는 자막을 보면서 난 진짜 이들이 사람을 가지고 노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너무 무식한 나머지 자기 가족들 외에는 관심도 없고 유괴같은건 소매치기처럼 쉽게 하는 인간들. 다 썩어빠졌다는걸 알지만 도려낼 용기는 커녕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인간들. 거기다 가난하고 비열한 인간들. 그런 인간들이 득시글거리는곳으로 묘사해놓고 제일 마지막에 땡큐 멕시코 시티 한마디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사고는 참 편리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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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리 2004-10-13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면서 뭔가가 불편했었는데, 그걸 이렇게 멋진 글로 표현해 주셨군요
-부리 드림-

플라시보 2004-10-13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별말씀을^^

2004-10-13 1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흰 바람벽 2004-10-15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 저 이걸 비싼 돈 주고 봤어요. ㅜㅜ..보고 나서 엄청시리 욕했죠.
하지만 평을 이렇게 멋드러지게 써 주시니 제 속이다 후련해지네요. ^^;;
ㅋㅋ 저도 레옹과 비스무레 하다 생각했는데.
것도 마지막 자막 올라가는거 보고 발끈해서 더 욕 나왔잖아요. 흐미~

플라시보 2004-10-15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돈 아깝다 정도는 아니었지만 속에서 뭔가 울컥 하긴 하더라구요. 대체 미국의 자국 우월주의는 어떤걸로도 멈출수가 없는가 하는 생각만 들더군요. 특히 자막. 정말 헉겁했습니다. 이것들이 누구 놀리나 싶었고 제가 만약 멕시코인이었다면 심한 모멸감을 느꼈을것 같아요.

마냐 2004-10-17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플라시보님 감상이 저와 비슷해서 넘 반갑고 고마운거 있죠? ^^
 

   
       
이 영화에 기대를 걸었다면 딱 하나. 그저 차승원이 웃겨주길 바란 것이다. 선생 김봉두에서 부터 차승원은 원톱으로도 관객을 불러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조금씩 보여주기 시작했고. 이번 영화 귀신이 산다의 흥행 여부에 따라 굳히기냐 다소 이른 행보였느냐가 점쳐질 수 있었더랬다. 물론 장서희라는 브라운관 스타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92년 이후 첫 등장이며, 사실 TV에서도 비교적 최근에 주연을 맡았을뿐 늘 조연급이었던 그녀에게 큰 기대를 하기는 힘들었다. 그나마 조금 안심을 하게 해 주는 요소는 신라의 달밤과 광복절 특사를 만들었던 김상진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는 것이다. 이미 배우 차승원과는 위에 언급한 두번의 영화에서 호흡을 맞췄으니 둘의 궁합을 의심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다. 차승원도 김상진도 어리버리하게 영화에 끌려가는듯한 인상을 주고 간만에 주연급으로 발돋움한 장서희는 예쁘고 귀여운척 이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내가 보기에 차승원은 그다지 연기를 잘 하는 배우는 아니다. 하지만 주위에서 좀 한다 한다 하니까 자기가 정말 잘 하는줄 아는. 그래서 연기가 지나치게 자신감있고 오바하는 부분도 좀 눈에 거슬리는 그런 배우다. 다만 여태 맡아왔던 캐릭터에서 모델출신의 말끔한 외모를 한번도 써먹지 않고 오히려 키크고 싱겁고 약간은 덜떨어진 인간을 표현해 왔다는 것에서 높은 점수를 줄만하다. 그에게는 생긴 이미지대로 가는게 가장 편했겠지만 의외성을 보여줌으로 인해 그가 여느 모델출신의 배우들보다는 조금 더 장수할것 같은 느낌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차승원의 연기를 가만히 보다가 보면 너무 자신의 감과 자신만의 계산된 연기에 빠져있다. 연기에 대한 고민은 보이되 그 깊이는 깊지 않다. 그럴것이 너무 한쪽으로만 편중된 연기를 했고 따라서 다양한 연기의 스펙트럼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영화에서 그는 그가 보여주었던 모든 장기들을 다 동원한다. 그리고 거기에다 여태 보여줬던 꺼벙한 인상을 한층 더 가중시켜서 바보스러울 정도로 망가진다. 그렇지만 그의 망가짐과 오바액션도 영화가 괜찮을때야 빛을 발하겠지만 수준 미달의 영화에서는 안타까운 몸부림 정도로만 비춰진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뭐가 문제였을까?

어렸을때 부터 남의집살이에 이골이 난 박필기(차승원)는 아버지가 죽기전에 유원으로 '내 집을 사라'라는 말을 지키기 위해 뼈빠지게 노력을 한 결과 드디어 바다가 보이는 멋진 주택을 장만하게 된다. 전망도 좋고 최고급 마감재를 써서 고급스러운 집이지만 주인이 갑자기 이민을 가는 바람에라는 이유로 몹시 수상쩍게 싼 가격에 구입한 생에 최초의 내집. 하지만 역시 싼데는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는 그 집에 귀신이 산다는 것이었다. 이사 첫날부터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던 집. 집에 살고 있던 귀신 연화(장서희)는 차승원을 내보내기 위해 별의별 해괴한 짓을 다 벌인다. 그러다 어느날 차승원은 벼락을 맞게 되고 그 이후로 귀신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필기는 연화를 보게 되고 그때부터 둘의 아웅다웅 동거가 시작된다. 여기까지가 대략적인 스토리인데 이대로만 나갔으면 괜찮았을 것을 감독은 여기다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다. 차승원이 귀신을 보게 되는데 그 주변에는 귀신을 볼 수 있는 장항선이 등장하고 그는 무슨 도인이라도 되는마냥 차승원에게 이것저것 알려주고 지시를 한다. 단지 집에 귀신이 산다는 것에서 귀신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 그로인해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온갖 귀신들을 다 보게되고 일일이 간섭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 영화의 가장 큰 실수는 귀신 연화의 캐릭터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귀신 연화를 맡은 장서희는 오로지 이쁘고 귀엽게 보이는것 이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물론 감독이 여태 봐왔던 머리풀고 으흐흐흐흐 하던 귀신이 아닌 예쁘고 깜찍한 귀신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지만 영 와닿지가 않는다. 거기까지는 용서를 한다고 하더라도 귀신 연화가 지닌 사연으로 넘어가면서 얘기는 갑자기 사랑과 영혼류의 러브스토리로 빠져 버린다. 고스터 바스터즈와 식스센스 그리고 사랑과 영혼의 짬뽕이 바로 본 영화인 것이다.

차승원이야 원래 코믹 연기를 어느정도 하기 때문에 조금만 참는다면 그다지 크게 거슬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연화를 맡은 장서희는 여태 조연만 맡아서 예쁘고 귀엽게 나오지 못한것에 대한 한풀이를 하러 나온것 같다. 아역배우 출신이라서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하는지 비교적 감은 잘 잡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인어아가씨의 아리영에서 100보 정도는 뒷걸음질 치는 연기를 보여준다. 인터뷰때마다 조연일랑 주연일때랑 조명이 다르더라 (주인공들이 다 이쁘고 멋지게 나오는건 조명탓도 크다.) 메이컵하는 시간이 다르더라 협찬받는 옷이 다르더라 하면서 노래 노래를 부르더니만 정말 맺힌게 많았나보다. 거기다 어떤 씬에서도 귀엽게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은 정말이지 안타까움을 더할 뿐이었다. 물론 미스코리아 출신의 손태영 (박필기의 애인)에 비하면 연기를 아주 잘 하는 거지만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손태영은 대략 국어책을 줄줄 읽어주신다. 대사처리도 안되는 사람이 어떻게 연기자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는지 신통방통할 정도로 그녀는 성의없는 연기를 보인다. 내가 그녀라면. 그래서 연기로 밥먹고 살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어디가서 연기지도라도 받겠구만 그녀는 '난 대신에 미스코리아잖아요. 미스코리아가 이쁘면 됐지 연기까지 잘 해야 할 필요 있나요?' 라는 생각을 가진것 같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차승원 혼자 연기 안되는 여배우와 이쁜척 외에는 관심없는 여배우를 끌고 가느라 고군분투한다. 안그래도 오바성이 짙은 그가 남들의 부족한 면까지 채우려니 더더욱 오바를 하는 수 밖에. 그래서 이 영화에서의 차승원의 연기는 상당히 불편하다. 웃긴 웃겠는데 자연스러운 폭소라기 보다는 노력에 대한 안쓰러움에 짓는 쓴웃음 같다.

소재 자체는 상당히 신선하고 재밌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영화는 전체적인 큰 맥락을 잡지 못하고 있어서 중구난방이다. 끝부분으로 가면 감동까지 주려고 한다. 왜 감독들은 한가지 장르에 만족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래서 스릴러와 코믹과 로맨스와 감동을 한 영화에 쑤셔박으려고 할까? 정말로 잘 만든 스토리가 아니라면 두어가지 장르의 혼합도 힘든판국에 뭘 믿고들 그러는지 모르겠다. 제발 한 우물만 좀 팠으면 좋겠다. 말장난의 조합으로 있지도 않은 새로운 영화장르를 만들어가면서 이것과 저것의 짬뽕을 시도하는 짓은 이제 고만좀 하자. 얘매율은 좋게 출발했던 영화가 입소문을 타면서 관객이 줄어든다는건 결국 영화가 재미없다는 소리니까 말이다.

P.S) 보고나니 마냐님이 감사용을 보라고 할때 그냥 그걸 볼것을 하는 후회가 물밀듯 밀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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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09-23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마지막 말씀이 안타깝습니다. 더 말렸어야 하는건데 말임다.
울 옆지기가 김상진표 영화, 꽤나 좋아햇는데, 이번엔 계속 엄청 투덜거리더라구요...

플라시보 2004-09-23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말려도 말 안들은게 저인걸요 뭘^^ (이노무 똥고집을 고쳐야 할텐데. 하하) 님의 부군께서도 저 영화 별로였나보군요. 저도 김상진표 영화 싫어하는 편은 아닌데 귀신이 산다는 좀 그렇더라구요.^^

sweetrain 2004-09-24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도저도 아닌 잡탕 찌개같더라구요. 차라리 한가지만 넣고 푹 고아 내놓는게 더 낫겠다 싶을 만큼..무슨 영화가 깔끔한 맛이 없어요.

플라시보 2004-09-26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그죠 단비님. 그냥 코메디로만 나갔어도 그럭저럭 반타작은 했을것을...쯪쯪.

마태우스 2004-09-26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영화평을 이제야 읽었습니다. 저도 <감사용>을 볼 것을 하고 후회를 합니다만, 추석 연휴 때 봐야할 영화 다섯편 중 감사용도, 그리고 이 영화도 들어 있었지요. 님의 영화평을 미리 읽었다면 가뿐하게 리스트에서 이걸 삭제했을텐데 아쉽네요.

플라시보 2004-09-26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이 영화 정말이지 극장에서 보기 좀 아까운 영화였던것 같습니다.
 



올 하반기에 내가 가장 기대한 영화가 있다면 장예모 감독의 연인. 바로 이 영화였다. 얼마나 기대를 했는가 하면 개봉 첫날이었던 8일날 일이 많아서 이 영화를 못보게 되자 마음이 다 쓰릴 지경이었다. 내가 원래 장예모 감독의 팬이었던 것은 아니다. 연인의 전작 영웅 때문에 나는 장예모 감독을 좋아하게 되었다. 국두나 귀주이야기 붉은 수수밭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내 입맛은 아니었더랬다. 영웅을 너무나 재미있게 봤던 나는 당시 극장에서만 그 영화를 3번 봤고 비디오로도 2번을 봤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너무너무 학수고대하며 기다렸었다. 허나 결론을 미리 말 하자면 이 영화 코메디였다.

전작 영웅의 경우도 스토리가 아주 훌륭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충분하게 납득이 가는 스토리에 무엇보다도 비주얼이 뛰어났었다. 인물들의 감정과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분배한 색의 향연들. 그리고 같은 사건이었지만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확연하게 달라지는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은 모두 최고의 찬사를 받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의 경우. 지나친 비주얼의 강조로 인해 오히려 영화가 우스꽝스러워져 버렸다. 거기다 스토리는 비주얼을 도저히 따라잡지 못해서 겉돌기만 했고 뒷쪽으로 갈수록 관객들은 폭소를 터트리거나 야유를 보낼 정도로 이야기가 한심해져만 갔다.

내가 생각하기에 멋진 액션이란 무릇 그에 응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주인공이 아무리 똥폼을 잡고 멋드러지게 싸운다고 해도 대체 왜 싸우는지를 모르면 액션이 멋질수록 비주얼이 화려할수록 우스꽝스럽게만 보일 뿐이다. 연인은 스토리가 따라주지 않으면 아무리 근사한 화면과 그림엽서같은 구도를 쓴다고 해도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올 상반기.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가 있었다면 하반기에는 바로 이 영화 '연인' 이 있다.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 하고자 했던것은 사랑이었다. 그런데 대체 그들이 왜 사랑하게 되었는가에 관한 설명이 전혀 없다. 더구나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새롭게 싹트는 사랑은 관객들로 하여금 '저 인간들이 왜 서로 사랑하고 난리지?' 라는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나중에는 하다가 안되니까 스토리 뒤집기를 시도하지만 그걸로 이미 틀어진 영화의 감정선을 이끌어내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반전이랍시고 엎어친 스토리들은 관객의 실소만 자아낼 뿐 영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한다. 심지어 막판에는 감독이 노망이 났거나 지가 찍고싶은대로 마구 찍은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엄하기 짝이 없는 눈밭 위에서의 결투씬. 그리고 거기서 죽은줄로만 알았는데 느닷없이 살아나는 장지이는 이 영화의 장르가 코메디라고 온몸으로 외치는듯 했다.

각자 배우로써 입지가 탄탄한 세 명의 배우.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서로 작당이라도 한것처럼 평이한 연기를 한다. 장지이의 경우 나는 아직 그 배우가 주인공을 맡아서 스토리를 이끌어갈 만한 힘이나 카리스마는 없다고 생각한다. 전작 영웅에서 장만옥이 보여줬던 연기와 비교를 하자면 그야말로 낙제점수이다. 물론 무희로 나오는 그녀가 춤을 추는 장면이라던가 맹인 연기는 칭찬을 해줄만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녀는 무용을 전공했기 때문에 춤을 잘 추는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고 맹인 연기도 그다지 눈에 띌만큼 훌륭했던것은 아니다. 거기다 반전의 키워드를 쥐고 있는 그녀인데 표정 연기가 영 심심하다. 모든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만큼 좀 더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를 써야 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금성무. 극중에서 감정의 변화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역을 맡았다. 사랑때문에 모든걸 희생할 수 있는 남자로 나오는데 관객들은 보는 내내 금성무의 감정선을 따라잡지 못한다. 물론 극중에서 그는 끊임없이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강조를 하니 관객들이 그 영혼을 이해하지 못하는게 당연하다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셋 중 가장 오래 연기생활을 한 유덕화. 유덕화가 맡은 캐릭터는 배신을 하기도 하고 또 배신을 당하기도 하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특히 배신을 당했을때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껴서 모든걸 다 망가뜨리려고 하는 역활인데 두 배우보다 조금 낫기는 하지만 그의 연기생활을 돌이켜 볼때 그다지 자랑스러운 작품이 되지는 않을것 같다. 무엇보다 유덕화의 경우는 연기를 못해서라기 보다 도저히 극중 인물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떻게 연기를 해야하는지 몰라 우왕좌왕 하는게 너무 눈에 두드러졌다. 나머지 두 배우들은 그냥 이해를 못해도 연기를 하면 그만 이라는 식이었지만 그나마 연기를 좀 오래한 유덕화는 인물을 이해하고 몰입하려고 하는 눈치였는데 그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들의 연기력에 문제가 있었다기 보다 스토리와 캐릭터의 설정 자체에 문제가 있지 않았나 싶다. 마치 여러명의 작가가 모여서 한 사람의 인물을 창조한것 처럼 인물들은 일관성도 없다. 그리고 그 부족한 일관성을 '알고 보니 그는 이런 사람이었던 것' 으로 때우려고 한다. 

아까 위에도 언급했었지만 영화에서 훌륭한 비주얼은 좋은 스토리를 만나야 빛이 난다. 영화는 개판인데 볼꺼리만 화려하다고 해서 우리는 그 영화에 결코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전작 영웅이 훌륭했던것은 그 화려하고 멋진 볼거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극중 배우들의 좋은 연기와 괜찮은 스토리가 관객들로 하여금 멋지다라는 찬사를 불러 일으킨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 연인은 엄청나게 겉멋이 든 감독이 꼴에 본건 많아가지고 만든 영화처럼 한심하기 짝이없다. 택도 없는 스토리를 아무리 멋진 앵글로 잡은들 뭣하겠는가. 영화는 비주얼이 전부가 아닌것을. 극장을 나오면서 어떤 관객이 명대사를 날렸다.

'장예모 감독 쪽팔리지도 않냐? 저런걸 해외까지 개봉하게.' 

참. 금성무는 여기서 활을 무지하게 잘 쏘는데 반지의 제왕의 레골라스 이래로 최고의 활솜씨를 보여준다. 근데 그게 멋지다기 보다는 좀 웃긴다. 어느 정도껏 잘 해야지 너무 잘 해버리면 웃길수도 있다는걸 나는 이 영화를 통해서 배웠다. (실은 레골라스 정도의 활 솜씨도 너무 훌륭한나머지 충분하게 웃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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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9-10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디게 보고 싶었는디~~

mannerist 2004-09-10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성격묘사나 상황을 대를 통해 전달하는 방식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오죽 능력 없으면 말에 의존할까. 싶어서요. 그런 의미에서 자기 입으로 '난 바람과도 같다'읆어대는걸 보니 인물 묘사에선 콘티부터 잘못 짠 거 같더이다. 그냥 신경 끄고 화면하고 소리만 뮤직비디오 보듯 즐겼습니다. 초반에 북두드리고 춤추는 거랑 대나무 숲에서 난리치는것만으로도 조조 2000원 본전은 뽑은 듯 싶더군요. 장이모는 방식이 달라져서, 이제 '인생'을 뛰어넘는 작품 찍긴 글렀단 생각이. -_-

치니 2004-09-10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금성무를 지극히 편애하는 지라, 이영화 무조건 예매해두었습니다만...
플라시보님의 글을 읽고 나니, 어째 좀 시간과 돈이 아까울거 같은...디비디로 볼걸 그랬나.-_-

플라시보 2004-09-10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weetmagic님. 아마 비디오로 보시는게 좋으실것 같네요.^^

mannerist님. 이미 보셨군요.^^ 금성무가 계속 자기 입으로 자기는 바람과도 같은 사람이라고 하는게 좀 깨긴 했었죠. 흐흐.

치니님. 이미 예매를 해 두셨다니 어쩔 수 없네요. 근데 한가지 주의할점은 금성무 쌍거풀 수술한거 아세요? 그 예쁘던 눈이 상당히 느끼해져버렸어요. 그래서 슬펐어요.

비로그인 2004-09-11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아쉽군요. 저도 장예모 감독 참 좋아하는데.

유덕화처럼 남성적인 선의 얼굴이 맘에 드네요, 전

비로그인 2004-09-11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금성무가 좋아서 보고 싶었던 영화였는뎅..

마냐 2004-09-12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이 영화, 목이 빠져라 기다렸는데...엊저녁. 뭔 영화를 볼까, 옆지기랑 고민하다가, 그냥 영화나들이를 포기했슴다. 문제는 바로 이 영화..옆지기 주변에서 하두 꽝이라고들 해서, 영 안내키더군요. 그런데, 플라시보님이 확실하게 쾅쾅...
근데, 어쩌죠, 님의 글을 읽다보니...얼마나 허접한지 더 궁금해지니..ㅋㅋㅋ

치니 2004-09-12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봤습니다.
흑, 결과는 디비디로도 안 보면 좋았을 영화였다는...
짭, 쌍커풀이었군요, 뭔가 좀 느끼해진 이유가... 음 그래도 아직은 멋져요. 헤헷.

아라비스 2004-09-12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정말 웃기더군요.^^ 장예모같은 감독이 왜 이런 작품을 만들었나 궁금할 지경이었어요. 정말 노망이 들었나... 할 정도로. 님의 멋진 영화평에 오타가 있네요. 첫문장에서 영웅이 아니라 연인이요...^^

LAYLA 2004-09-12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래도 재미있게 봤어요 :-) 의상부터 무척 화려해서 ...^^
처음에 술집나오는 장면이랑 대나무숲 무협장면이 좋았아요
아쉬운건 역시 너무도 빈약한 줄거리. 반전도 반전이라 하기엔 좀...
저는 또 유덕화 보러간건데 유덕화 정말 쪼금만 나오고 ; _ ; (장즈이는 정말 예쁘게 나오더군요) 배우들의 연기는 별로 볼게 없고....뒷부분에 유덕화가 눈물 글썽이며 장즈이에게 3일만에 딴 남자와 사랑에 빠지냐고 따지는 장면은 좋았어요 ㅠ_ㅠ
영화가 갈수록 이상해져서...마지막 결투신이 최강 웃겼습니다.
음 그래도 영화관에서 볼만하다고 생각하는데..^^

어항에사는고래 2004-09-19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상과 사운드에 장예모가 신경쓰다보니 다른 것들 챙길 여유가 안되었나봐요.
저두 영화보는 내내 향신료 빠진 카레를 먹는 느낌이었거든요.
 


본 슈프리머시는 알다시피 본 아이덴티티의 속편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냥 본 아이덴티티에서 맷 데이먼이 암살요원인데 기억을 잃었더라 이외에는 정말 까맣게 기억이 나질 않았다. 등장하는 인물들도 맷 데이먼을 제외하고는 전편에서 봤었는지 안봤었는지 영 아리까리했다. 그래서 내가 본 아이덴티티를 언제 봤는지 찾아봤다. (무섭게도 나는 그런걸 다 기록해둔다.) 2002년 10월 18일. 어제가 2004년 9월 1일이었으니 이거 속편치고는 너무 늦장을 부려주셨다. 반지나 메트릭스도 1년 정도 텀을 뒀을 뿐인데 말이다. 따라서 기억이 안난건 내 탓이 아니다. 2년이나 본 아이덴티티를 기억해 주길 바란 본 슈프리머시의 잘못이다.

솔직하게 말 해서 스토리는 그저 그랬다. 별로 설명하고 자시고 할 것이 없다. 기억을 잃은 전직 킬러 맷 데이먼은 인디아의 한 해변 마을에서 어떤 여자와 조용히 살고자 한다. 그렇지만 전에 그를 데리고 있었던 정보기관과 그와 일이 얽혀있는 악당들이 그를 가만두질 않는다. 그래서 그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또 도망을 다니고 사람을 죽이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옛 일들을 다 기억해 내고 누명도 벗게 되며 오랜세월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실체를 잘못 알고 있었던 사람에게 찾아가서 사죄까지 한다.


2년이나 지나서 등장한 맷 데이먼은 우선 살이 많이 빠졌다. 재능있는 리플리씨때만 해도 얼굴에 살이 좀 있어서 살짜쿵 멍청해 보일때가 있었는데 이젠 얼굴선 어디에서도 그런면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초반부에 좀 긴 반바지 입고 해변을 뛸때는 다리가 짧아보이는 것이 흠이지만 그 이후로는 계속 긴 코트 차림이라 상관없다. 아무튼 약간 느끼해 보이던 애단호크가 가타카에서 살을 쫙 빼고 나왔을때처럼 맷 데이먼의 체중 변화도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자동차 추격씬이다. 카레이서들이 뽑은 가장 잘 된 추격씬이라나? 아무튼 나는 기술적인 면은 잘 모르겠고 다만 편집이 정말 예술이었다는 것 만은 자신있게 말 할수 있다. 어찌나 빠르고 긴장감있게 편집을 잘 했는지. 정말 편집자에게 가위손이라는 호칭을 붙여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꽤나 긴 시간동안 자동차 추격이 이어지는데 카메라도 다각도에서 화면을 잡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별다른 트릭이나 특수효과 없이 (이를테면 자동차들이 서로 처박아서 뻥뻥 터지는) 도 상당히 스펙타클한 장면을 잡아내어 영화사에 남을 자동차 추격씬인것 같다. (물론 나는 트리니티가 역방향으로 오도바이를 몰던 매트릭스3를 최고의 자동차 추격씬으로 꼽는다만은) 영화의 제일 처음 맷 데이먼이 쫒길때 악당이 우리의 차 뉴 EF소나타를 타고 있어서 겁나게 반가웠다. 다만 맷 데이먼이 그에게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서 여자친구에게 '옷차림도 이상하고 차도 이상해' 라고 말하는게 좀 아쉬웠다. 내가 보기에는 행동만 수상쩍을 뿐 별로 안 이상하던데..

영화의 스토리는 상당히 밋밋하게 나가 버린다. 음모고 뭐고 간에 관객이 처음부터 다 알고 들어가도록 한다. 그럴것 같으면 장면장면이 기대에 부흥을 해야 하는데 솔직하게 말 하자면 자동차 추격씬을 빼고는 별로 집중이 안될만큼 지루했다. 너무 뻔한 스토리라고나 할까? 이미 기억상실증에 걸린 전직 특수요원들의 얘기는 신물이 나도록 영화에서 우려 먹었다. 그런데 이 영화. 무슨 배짱인지 전혀 새롭지 않은. 오히려 가장 구태의연한 방법을 선택한다. 감독이 영화를 아주 클래식하게 만들고 싶었나보다. 아무튼 자동차 추격씬을 빼면 그저 그런 영화였다. 그나마 고질라의 동원참치처럼 예기치않게 등장한 뉴 EF소나타가 쬐끔 반가웠던게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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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4-09-02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아일합운빈현님. 네 저도 봤어요. 헤드윅이 한국 여성들과 밴드를 만들어서 클럽은 아닌것 같고 암튼 많이 조용해보이는 곳에서 노래하고 연주하는 모습. 약간 우스꽝스럽게 나오긴 했지만 그나마 멀쩡하게 나온 모습인것 같아요^^

nugool 2004-09-02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제 본 영화시군요. 정말이지 요샌 헐리웃 영화를 보면 감흥이 없어요. 너무 익숙해져 버렸나봐요. 그들식의 영화..

플라시보 2004-09-02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어제 본 영화입니다. 님 말씀처럼 요즘의 헐리우드 영화는 점점 더 시시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안일한건지 우리의 눈이 높은건지..^^ 오늘은 알포인트를 봅니다. 무섭다던데...두렵지만 보고픈 마음이 앞서서요^^

panda78 2004-09-02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이상한 흰색 차.. 가 소나타라면서요...? ^^;;

마냐 2004-09-02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으..안그래도...옆지기가 본 아이덴티티를 다시 디비디로 보고난뒤 영화를 보자구....했는데....그나마도 안 땡기게 하시는군요...흐흐.

플라시보 2004-09-03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nd78님. 네 뉴 EF 소나타 라는군요^^ (영화끝나고 집으로 가는길에 앞차가 뉴 EF 소나타 였어요. 흐흐)

마냐님. 흐...자동차 추격씬은 멋지구리해요. 그것만 봐도 뭐 큰 손해는 아닙니다.글고 맷 데이먼 멋있잖아요.^^

털짱 2004-09-09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맷 데이먼이라.. 음... 멋진 분이지요.. 저도 좋아하는 배우예요.^^
 


다 큰 남자가 저런 표정을 짓는다면 그건 뭘 의미하는 걸까? 놀람과 슬픔을 동시에 표현한 톰 행크스의 표정 연기는 마치 고무로된 피부를 가진듯한 짐 캐리의 그것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다. 즉 짐 캐리의 연기는 감탄할 수는 있어도 감정 이입이 되지는 않는 반면 톰 행크스의 연기는 바로 내 일처럼 와 닿는 것이다. 어쩌면 그건 톰 행크스가 가진. 일면 평범한듯 보이는 마스크의 힘인지도 모른다.

터미널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작품이다. 과거에는 확실한 거장이자 흥행의 마술사였던 스티븐 스필버그. 하지만 그도 세월이 지날수록 감각이 떨어지는지 자신의 주 종목인 SF영화를 제외한 드라마에서는 명성에 못 미치는 결과를 내고 있다. AI같은 경우 스필버그가 너무 스토리를 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그의 장기인 SF에서마저 스필버그 특유의 상상력이 스토리에 파뭍혔었다. 다행스럽게도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는 역시 스필버그라는 소리를 들음으로써 다시 제 자리를 찾는듯 했다. 그러나 캐치 미 이프 유 캔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스타 칩을 썼지만 생각만큼 흥행하지는 못했다.  이제는 스필버그의 영화라고 해서 무조건 재미있고 무조건 신나던. 영화계의 보증수표라고 말 하기에는 2% 부족하다.

영화의 내용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동유럽의 작은 나라인 '크라코지아' 에서 미국으로 간 빅터 나보스키(톰 행크스)는 공항에 도착한 첫날 입국이 거부된다. 그의 나라에 내전이 일어나서 일시적으로 유령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권과 신분증등 모든 것의 효력이 사라져서 그는 다시 자기 나라로 돌아갈수도 그렇다고 해서 공항 게이트를 빠져 나갈수도 없다. 할 수 없이 그는 나라의 사태가 진정될때 까지 공항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게 된다. 그 기다림이 하루에서 이틀로이어지더니 무려 9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르게 된다. 이 영화는 빅터 나보스키라는 남자가 뉴욕 JFK공항에 9개월간 살면서 겪게되는 에피소드들을 중심으로 전개가 된다. 국제 미아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 빅터 나보스키. 저 맨 위에 사진은 영어를 잘 못해서 말이 통하지 않는 그가 TV화면을 통해 자기 나라의 내전을 보고 난 이후 충격을 받아 울먹이는 모습이다.


톰 행크스는 스티븐 스필버그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 [로드 투 퍼디션], [캐치미 이프 유 캔] 에 이어 4번째로 출연한다. 다양한 배우들과 작품을 하는편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감독 작품에 시리즈가 아닌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그가 가장 많이 등장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가 가진 평범한 이미지 때문이다. 그는 악역으로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말쑥한 신사로도 보이지 않는다. 어떨때는 약간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무언가 큰 문제를 일으킬 남자로는 보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는 맡은 역활에 따라 어떤 연기를 보여주느냐에 쉽게 극중 인물과 동화가 된다. 예를 들어 브래드 피트나 조지 클루니 같은 잘 생긴 배우들을 보자. 그들은 스크린에 등장 하는 것 만으로도 관객들로 하여금 무언가 특별하고도 대단한 사람 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톰 행크스가 등장하면 사람들은 편안하게 스크린을 응시한다. 그리고 곧 그가 보여주는 연기를 마치 실제로 일어나는 일 처럼 받아들인다. 브래드 피트나 조지 클루니는 아무리 연기를 잘 한다고 해도 실제처럼 보이기는 어렵다. 왜냐면 그러기에는 그들은 너무 특별하게 생겼으니까.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면서 내가 떠 올린 영화는 [캐스트 어웨이]였다. Fedx직원인 톰 행크스가 어느날 비행기 추락으로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남는 얘기인데 어떻게 보면 상당히 치열한 생존 영화일수 있는데도 톰 행크스는 그 분위기를 귀엽게 만들어 버렸다. 특히 거의 마지막 탈출 부분에서 윌슨 (배구공으로 인형을 만들었는데 그 이름이 윌슨이다.) 을 잃어버리고 막 울부짖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불쌍한 동시에 너무나 귀여웠다. 무인도에 떨어져서 살아남아야 하는 최악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톰 행크스는 그 분위기를 아주 묘하게 만들어버렸다. 어떤 것이건 상황을 치열하고 심각하게 만들지 않는것 그게 톰 행크스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이 영화에서도 그는 나라가 사라져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그가 살 수 있는 구역은 오직 JFK공항 내에서만이다. [캐스트 어웨이]에서의 공간적 한정성이 무인도였다면 이 영화에서의 공간적 한정성은 JFK공항이다. 다만 무인도는 인간이라고는 그 하나 뿐이었지만 JFK공항에는 하루에도 수천명의 인파가 넘쳐나는 곳이다.

빅터 나보스키는 공항에서 체류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인간이다. 마치 언젠가는 공공장소인 공항에 갖혀 살 것을 예감이라도 했다는듯 그는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는 거기서 직업까지 가지게 된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울고 불고 절망스러워 하면서 약이라도 털어 넣었겠지만 빅터 나보스키는 포스터에 등장하는 저 제일 위에 사진에서만 저런 표정을 지을 뿐. 그 다음부터는 내내 웃으며 산다. 공항 사람들과도 금방 친해지고 생존하는 법도 빨리 터득한다. 심지어는 1등석 여승무원인 미모의 캐서린 제타 존스와 로멘스까지 마련되어 있다.  비록 정상적인 입국을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JFK공항에서의 삶은 그렇게 나쁘지 않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빅터 나보스키가 JFK공항에 9개월동안 살게된 이야기를 아주 성공적으로 마쳤느냐하면 그건 또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늙어버린 스필버그는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AI에서처럼 어느 순간 딱 영화가 끝이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멋지겠다 싶은 부분에서 계속 얘기를 더해간다. 끝날 만 하면 '그런데 말이지' 하면서 이어가는 것이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로 언제 컷을 외쳐야 하는지 잊어버린 마냥 영화는 지지부진하게 계속 이어진다. 더구나 그 이어짐을 위해 등장하는 피넛 캔 속의 비밀이랄지 빅터 나보스키가 뉴욕에 가야만 하는 이유는 너무나 작위적이여서 어색하기만 하다. 거기다 판에 박힌 캐릭터들의 등장과 굳이 영화에서 악당이 하나쯤은 있어야 맛 이라는듯 등장하는 어설픈 악의 세력들은 더더욱 진부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상당히 귀엽다. 왜냐면 톰 행크스이기 때문이다. 영어를 모르는 톰 행크스를 마치 다 자란 아기처럼 그려놔서 영어를 못하면 행동까지 아이같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톰 행크스는 맡은 배역을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그가 아니면 누가 저런 표정을 짓고 저런 웃음을 날릴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JFK공항은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셋트에서 촬영이 되었다고 한다. 9.11테러 때문에 공항 촬영이 무산되자 그들은 아예 공항을 만들어 버렸다. 그 거대하고 정교한 셋트를 보면서 역시 스필버그의 스펙터클은 비단 공룡이 뛰어다니는 거대한 공원에서만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어떻게 보면 한정적인 공간인 JFK에서 이뤄지는 얘기인데도 우리는 조금도 답답함을 느끼지 못한다. 만약 카메라가 좀 폐쇄적인 화면을 담았더라면 우리는 빅터 나보스키의 귀여움을 느끼기 보다는 보다는 공항이라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빅터 나보스키의 딱한 처지에 대해 더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어떤 드넓은 공간에서 촬영한것 못지 않게 JFK공항 셋트에서의 촬영한 화면은 시원시원하다. 수많은 인파가 오가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빅터 나보스키는 오히려 상상을 초월하는 대 저택에 살고있는 철부지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다.

끝으로 영화를 보다가 보면 거의 기절하게 귀여운 장면이 나온다. 톰 행크스는 아니고 등장 인물중 한명이 너무나 귀엽고 엉뚱한 짓을 한다. 바로 그런것. 그런 스필버그식 유머 때문에 나는 앞으로도 스필버그 영화를 절대 포기할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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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rsta 2004-08-31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톰행크스 저 표정..아아 정말 끝내줍니다.
사진을 정말 필요한 곳에 샥샥 넣으셨네요. 플라시보표 리뷰, 오늘도 역시나 굿 입니다. ^^

플라시보 2004-08-31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톰 행크스 정말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듬직한 남자도 좋지만 가끔은 저렇게 뭔가를 도와주고픈 남자가 땡길때도 있습니다. 흐흐^^

sooninara 2004-08-31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구 보고 싶어집니다..터미널 찜....

플라시보 2004-08-31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ooninara님. 심각하게 파고들지 않으면 충분하게 유쾌한 영화입니다. 할랑한 마음으로 재밌게 즐기시길^^

마냐 2004-08-31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각하게 파고들지 말아야겠네요. 다들, 그 남자가 미국에 가야만 했던 이유에서 확 깬다고 하던데...ㅋㅋ

플라시보 2004-08-31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저도 좀 확 깼습니다.^^ 고작 저것 때문에 이 고생을 하다니 하면서 말이죠. 근데 제 친구는 이해가 간다고도 하고...암튼 뭐 그렇습니다.

털짱 2004-08-31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 저 영화의 주인공은 몹시 외롭고 고단하게 드골공항에서 살았다더군요. 다행히 스필버그가 판권료로 지불한 거액으로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만...

마태우스 2004-08-31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영화감상문은 언제 읽어도 멋지십니다

2004-08-31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라시보 2004-09-0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흐흐. 칭찬 감사합니다.^^

RainSmile 2004-09-02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진짜 웃긴, 할부지!! ㅋㅋ 돌리던 접시 두고 가버리는 뒷모양이 어찌나 웃기던지.ㅋㅋㅋ 조금 깨는 부분도 있긴 했지만, 대략 즐거웠다는 흐흐.

플라시보 2004-09-02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재밌었죠. 그런데 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서재 주인보기로 고쳐주심 안될까요? 부탁드립니다.

비누발바닥 2004-09-26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갠적으로 보고싶었는데......
시간이 나질 않아서 못보고있었는데 님의 글을 읽고 많은 도움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