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큰 남자가 저런 표정을 짓는다면 그건 뭘 의미하는 걸까? 놀람과 슬픔을 동시에 표현한 톰 행크스의 표정 연기는 마치 고무로된 피부를 가진듯한 짐 캐리의 그것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다. 즉 짐 캐리의 연기는 감탄할 수는 있어도 감정 이입이 되지는 않는 반면 톰 행크스의 연기는 바로 내 일처럼 와 닿는 것이다. 어쩌면 그건 톰 행크스가 가진. 일면 평범한듯 보이는 마스크의 힘인지도 모른다.
터미널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작품이다. 과거에는 확실한 거장이자 흥행의 마술사였던 스티븐 스필버그. 하지만 그도 세월이 지날수록 감각이 떨어지는지 자신의 주 종목인 SF영화를 제외한 드라마에서는 명성에 못 미치는 결과를 내고 있다. AI같은 경우 스필버그가 너무 스토리를 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그의 장기인 SF에서마저 스필버그 특유의 상상력이 스토리에 파뭍혔었다. 다행스럽게도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는 역시 스필버그라는 소리를 들음으로써 다시 제 자리를 찾는듯 했다. 그러나 캐치 미 이프 유 캔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스타 칩을 썼지만 생각만큼 흥행하지는 못했다. 이제는 스필버그의 영화라고 해서 무조건 재미있고 무조건 신나던. 영화계의 보증수표라고 말 하기에는 2% 부족하다.
영화의 내용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동유럽의 작은 나라인 '크라코지아' 에서 미국으로 간 빅터 나보스키(톰 행크스)는 공항에 도착한 첫날 입국이 거부된다. 그의 나라에 내전이 일어나서 일시적으로 유령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권과 신분증등 모든 것의 효력이 사라져서 그는 다시 자기 나라로 돌아갈수도 그렇다고 해서 공항 게이트를 빠져 나갈수도 없다. 할 수 없이 그는 나라의 사태가 진정될때 까지 공항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게 된다. 그 기다림이 하루에서 이틀로이어지더니 무려 9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르게 된다. 이 영화는 빅터 나보스키라는 남자가 뉴욕 JFK공항에 9개월간 살면서 겪게되는 에피소드들을 중심으로 전개가 된다. 국제 미아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 빅터 나보스키. 저 맨 위에 사진은 영어를 잘 못해서 말이 통하지 않는 그가 TV화면을 통해 자기 나라의 내전을 보고 난 이후 충격을 받아 울먹이는 모습이다.
톰 행크스는 스티븐 스필버그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 [로드 투 퍼디션], [캐치미 이프 유 캔] 에 이어 4번째로 출연한다. 다양한 배우들과 작품을 하는편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감독 작품에 시리즈가 아닌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그가 가장 많이 등장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가 가진 평범한 이미지 때문이다. 그는 악역으로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말쑥한 신사로도 보이지 않는다. 어떨때는 약간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무언가 큰 문제를 일으킬 남자로는 보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는 맡은 역활에 따라 어떤 연기를 보여주느냐에 쉽게 극중 인물과 동화가 된다. 예를 들어 브래드 피트나 조지 클루니 같은 잘 생긴 배우들을 보자. 그들은 스크린에 등장 하는 것 만으로도 관객들로 하여금 무언가 특별하고도 대단한 사람 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톰 행크스가 등장하면 사람들은 편안하게 스크린을 응시한다. 그리고 곧 그가 보여주는 연기를 마치 실제로 일어나는 일 처럼 받아들인다. 브래드 피트나 조지 클루니는 아무리 연기를 잘 한다고 해도 실제처럼 보이기는 어렵다. 왜냐면 그러기에는 그들은 너무 특별하게 생겼으니까.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면서 내가 떠 올린 영화는 [캐스트 어웨이]였다. Fedx직원인 톰 행크스가 어느날 비행기 추락으로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남는 얘기인데 어떻게 보면 상당히 치열한 생존 영화일수 있는데도 톰 행크스는 그 분위기를 귀엽게 만들어 버렸다. 특히 거의 마지막 탈출 부분에서 윌슨 (배구공으로 인형을 만들었는데 그 이름이 윌슨이다.) 을 잃어버리고 막 울부짖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불쌍한 동시에 너무나 귀여웠다. 무인도에 떨어져서 살아남아야 하는 최악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톰 행크스는 그 분위기를 아주 묘하게 만들어버렸다. 어떤 것이건 상황을 치열하고 심각하게 만들지 않는것 그게 톰 행크스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이 영화에서도 그는 나라가 사라져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그가 살 수 있는 구역은 오직 JFK공항 내에서만이다. [캐스트 어웨이]에서의 공간적 한정성이 무인도였다면 이 영화에서의 공간적 한정성은 JFK공항이다. 다만 무인도는 인간이라고는 그 하나 뿐이었지만 JFK공항에는 하루에도 수천명의 인파가 넘쳐나는 곳이다.
빅터 나보스키는 공항에서 체류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인간이다. 마치 언젠가는 공공장소인 공항에 갖혀 살 것을 예감이라도 했다는듯 그는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는 거기서 직업까지 가지게 된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울고 불고 절망스러워 하면서 약이라도 털어 넣었겠지만 빅터 나보스키는 포스터에 등장하는 저 제일 위에 사진에서만 저런 표정을 지을 뿐. 그 다음부터는 내내 웃으며 산다. 공항 사람들과도 금방 친해지고 생존하는 법도 빨리 터득한다. 심지어는 1등석 여승무원인 미모의 캐서린 제타 존스와 로멘스까지 마련되어 있다. 비록 정상적인 입국을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JFK공항에서의 삶은 그렇게 나쁘지 않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빅터 나보스키가 JFK공항에 9개월동안 살게된 이야기를 아주 성공적으로 마쳤느냐하면 그건 또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늙어버린 스필버그는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AI에서처럼 어느 순간 딱 영화가 끝이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멋지겠다 싶은 부분에서 계속 얘기를 더해간다. 끝날 만 하면 '그런데 말이지' 하면서 이어가는 것이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로 언제 컷을 외쳐야 하는지 잊어버린 마냥 영화는 지지부진하게 계속 이어진다. 더구나 그 이어짐을 위해 등장하는 피넛 캔 속의 비밀이랄지 빅터 나보스키가 뉴욕에 가야만 하는 이유는 너무나 작위적이여서 어색하기만 하다. 거기다 판에 박힌 캐릭터들의 등장과 굳이 영화에서 악당이 하나쯤은 있어야 맛 이라는듯 등장하는 어설픈 악의 세력들은 더더욱 진부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상당히 귀엽다. 왜냐면 톰 행크스이기 때문이다. 영어를 모르는 톰 행크스를 마치 다 자란 아기처럼 그려놔서 영어를 못하면 행동까지 아이같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톰 행크스는 맡은 배역을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그가 아니면 누가 저런 표정을 짓고 저런 웃음을 날릴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JFK공항은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셋트에서 촬영이 되었다고 한다. 9.11테러 때문에 공항 촬영이 무산되자 그들은 아예 공항을 만들어 버렸다. 그 거대하고 정교한 셋트를 보면서 역시 스필버그의 스펙터클은 비단 공룡이 뛰어다니는 거대한 공원에서만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어떻게 보면 한정적인 공간인 JFK에서 이뤄지는 얘기인데도 우리는 조금도 답답함을 느끼지 못한다. 만약 카메라가 좀 폐쇄적인 화면을 담았더라면 우리는 빅터 나보스키의 귀여움을 느끼기 보다는 보다는 공항이라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빅터 나보스키의 딱한 처지에 대해 더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어떤 드넓은 공간에서 촬영한것 못지 않게 JFK공항 셋트에서의 촬영한 화면은 시원시원하다. 수많은 인파가 오가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빅터 나보스키는 오히려 상상을 초월하는 대 저택에 살고있는 철부지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다.
끝으로 영화를 보다가 보면 거의 기절하게 귀여운 장면이 나온다. 톰 행크스는 아니고 등장 인물중 한명이 너무나 귀엽고 엉뚱한 짓을 한다. 바로 그런것. 그런 스필버그식 유머 때문에 나는 앞으로도 스필버그 영화를 절대 포기할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