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이 변하니? 하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응 변하더라 하고 대답할 것이다. 여기 한 남자가 묻는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여자는 아무 대답이 없다. 그리고 이미 사랑은 변해 버렸다. 어쩌면 사랑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자와 여자는 일로 만난다. 남자는 음향기사이고 여자는 라디오 방송국에 PD겸 DJ이다. 남자는 엄마가 없고 아버지와 할머니 고모와 함께 낡은 한옥집에 산다. 여자는 이혼을 했고 혼자 작은 아파트에서 산다. 그들은 어쩌다 라면을 함께 먹고 싶어 진다. 그리고 서로를 좋아하게 되고 함께 잠을 자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연인이 된다. 그러다 어느날 여자가 변한다. 남자는 여자를 잊는게 너무나도 괴롭지만 어쩔 수 없다. 그의 할머니 말처럼 지나간 버스와 여자는 잡지 않는 것이니까. 아니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니까... 고통스럽던 시간이 흐르고 남자의 상처가 아물었을때 여자는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 다시 만날까? 하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그녀가 할머니 주라고 선물한 화분을 돌려준다. 할머니가 이미 죽어서 화분을 받을 수 없듯이 남자의 마음속에 여자에 대한 사랑은 이미 죽었다. 눈감고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아팠는지를 기억 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랑을 다시 시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영화를 개봉했을때 나는 혼자 봤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참 잔인한 얘기를 예쁘게도 화면에 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소리를 따기 위해 다니는 대나무 숲과 바닷가 그리고 눈 내리는 절은 고즈넉하고 아름답지만 함께 하는 그들의 시간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시궁창같은 도시의 삼류들만 모여 있는 곳에서도 사랑이 아름다울 수 있듯이 반대로 그렇게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도 사랑은 이기적이고 잔인하고 슬프고 추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볼 당시 나는 꾀 여러권의 영화잡지를 구독하고 있었으므로 봄날은 간다에 관한 수많은 평을 보았다. 하지만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평론가들의 평을 기억하기에는 내 머리가 지나치게 나쁘거나 아니면 내가 느낀 감정들이 너무 강해서 일 것이다.


 

 

 

 

 

 

 

 

 

 

 

 

군가는 여자가 남자를 버린 이유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라고 하고 누구는 새로운 사랑이 생겨서 라고도 했다. 하지만 내가 볼때는 처음부터 사랑은 없었다. 그냥 남자의 일방적인 짝사랑만 있었을 뿐이다. 여자를 반하게 하기에 그는 너무 감정적이고 약한 남자였다. 적어도 그 여자를 반하게 할 남자는 항상 선그라스를 쓰는 것멋 정도라도 갖추어야 했었는지도 모른다. 여자에게 남자는 그냥 잠시 만난 사람이다. 같이 라면을 먹고 같이 잠을 자고 같이 일을 하고. 그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이기심은 어느날 불쑥 일하는데 찾아가서 그를 흔들어 놓기도 하고 그러다 어느날 한달만 떨어져서 지내보자고 한다. 그러다 남자가 그녀를 찾아가고 술을 마시고 괴로워하고 울자 여자는 헤어지자고 한다. 그녀 집 앞에서 밤새 차에서 잠을 잔 그에게 그녀가 남긴 말은 우리 헤어지자 이다.

가 했던 사랑들은 전부 똑같지 않았다. 그가 나를 더 사랑하거나 내가 그를 더 사랑하거나. 나를 더 사랑한 그들은 나에게 매달렸고 그러면 그럴수록 하찮게 느껴지고 귀찮아 지더니 이내 잔인하게 버리도록 했다. 전화기 너머로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걸레를 빨았고 먼길을 우산도 없이 찾아온 사람에게 문도 열어주지 않고 다시 비를 맞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게 했다. 이미 모든게 끝나서 무의미한 나에게 왜 그러는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일종의 괴롭힘 밖에는 되질 않았다. 그런 기억들을 까맣게 잊고 나는 다시 사랑을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매달리는 쪽이 된다. 나의 어떤 행동과 어떤 말에도 무덤덤한 그를 견딜수가 없었다.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발 옆에만 있어 달라고 구걸하는 나에게 그들은 예전의 나처럼 잔인했다. 숨을 쉬는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그들은 멀쩡하게 회사를 다니고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며 놀았다. 그런 기억이 힘들어지면 남는건 하나다. 마음의 문을 닫는것. 그래서 다시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지 않는 것. 사랑하는 기쁨도 없겠지만 매달리고 잊어야 하는 일련의 구차한 과정도 존재하지 않는 것.

자가 다른 남자와 콘도로 놀러가는 것을 본 남자는 유치하게도 여자의 초록색 차를 긁어 버린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남자는 미쳤을지도 모른다. 마음을 전달할 수 없다면, 나처럼 아프게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차라도 긁어야 하는 것. 사랑은 가끔 이기적이기도 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나를 즈려밟고 고이 가시옵소서 하는건 인간이 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이다.

랑이 똑같지 않으니 어느 한쪽은 기울게 되어 있다. 결국은 더 많이 좋아한 사람이 더 많이 상처를 받는다는 공식은 불행하게도 사실이다. 하지만 저걸 머리로 안다고 해서 마음까지 따라가지는 않는다. 뻔하게 보이면서도 어쩔 수 없으니까 사랑을 하고 매달리는 것이겠지.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는 다시 남자를 찾는다. 그리고 이미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주라고 화분을 선물한다. 남자는 내내 말없이 그냥 웃기만 한다. 서로 돌아서서 가려는데 여자는 다시 뛰어간다. '우리 다시 만날까?' 남자는 대답대신 화분을 준다. 아직 그녀에 대한 사랑의 기억을 완전히 잊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자기 상처에 소금을 뿌려가며 조금씩 단련 시켰다. 그래서 이제는 아물었고 흉터는 남았지만 아프지는 않다. 그는 여자를 다시 만나지 않는다. 그냥 그냥 만났던 여자가 아니므로 아문 상처를 가진채 다시 그 여자를 스쳐가는 사람으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조금이라도 자신이 치열하게 사랑했던 지난날에 대한 예의로 그냥 두었을지도 모른다. 많이 사랑하던 사람이 친구로 지내자고 했을때 내가 거절한 것 처럼 말이다. 친구로라도 옆에 두고 싶은 욕심이 그 남자처럼 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을만큼 가슴을 쾅쾅 때렸지만 나는 결국은 거절했다. 그건 의미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만나는 것은 또 다른 고통만 안겨 줄 뿐이니까 말이다. 

목이 왜 봄날은 간다 인가 한번 생각 해 보았다. 봄날은 정말 짧다. 여름처럼 강렬하지도 겨울처럼 혹독하지도 않다. 하지만 아주 짧은 그 순간동안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어 버린다. 흑백에서 다시 컬러로 세상이 바뀌고 옷이 얇아지고 햇볕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사랑도 비슷한게 아닐까 싶다. 잠깐 세상은 컬러로 바뀌고 내가 나 스스로에게 씌웠던 두터운 가면도 벗게 하고 그로인해 마음이 따뜻해 지지만 결국은 가는 것이다. 봄날은 여름을 향해 가듯이 사랑도 이별을 향해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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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너머 2004-01-11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이 변하니?'라는 질문에 나는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아니,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변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사람,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사랑이라는 건 감정의 한 표현입니다. 동일한 감정이라도 그걸 스스로 사랑이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고, 그 감정을 그냥 지나가는 감정으로 규정하면 그냥 그렇게 흘러가버리는 거죠. 그리고 그 규정(표현)이 감정의 내용에 영향을 미칩니다. 같은 호감도 사랑이라 불리면서 정말 '사랑'이라는게 되는거고, 반대의 경우는 한없이 가벼워지는 거죠. 이영애와 유지태의 차이는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많은 연애의 아픔은 이 간격에서 비롯되는거죠. 더 많이 좋아하냐, 적게 좋아하냐는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양'의 문제는 상황과 조건,시간과 추억이 쌓여가면서 계속 바뀝니다. 처음엔 남자가 더 좋아했다가, 후엔 여자가 더 좋아하는 경우도 많고, 반대의 경우도 종종 있죠. 하지만 이 차이는 '질'의 문제입니다. 결국 문제는 '나'와 '그녀'에게 달린게 아닌가 합니다. 감정의 양이 중요한게 아니라 '사랑'에 대한 코드를 어떻게 서로 '통'하는가 이죠. 이영애 역시 자신에게 충실한 여자였지만, 유지태와는 그 코드가 맞지 않은게 아닌가 합니다. 결국 마지막에 이영애의 손을 (흔히 보통의 남자들이 미련을 못버리고 그렇듯이) 유지태가 잡았더라도 오히려 더 큰 상처만 받고 끝나게 될 것이 뻔한거죠. 써놓고보니 어쭙잖은 개똥철학이네요...--; 어쨌든 '봄날은 간다'...너무 재미있게 본 영화였습니다. 그때 함께 봤던 사람은 지금 어딨는지 모르겠지만...덕분에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네요. DVD로라도 다시 빌려봐야겠습니다. ^^

mannerist 2004-01-12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봤던 영화평 중 가장 설득력있던건 노희경 작가의 '그들이 헤어졌다... 다행이다.'였어요. 사랑이 변한다는걸,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는 걸 아는 은수는 상우의 순수가 힘겨웠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었죠.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한다는거,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질 수 밖에 없다는데 동감입니다. 그 기울어짐 때문에 누구나 한 번쯤 쓴 맛을 볼 수 밖에 없다는 것도.

두 가지 길이 있지 않을까요. (사랑으로 인해) 어느 순간은 지극한 행복을, 만족을 누리지만 반대로 지독한 절망에 고통에 빠지기 쉬운 기복 심한 삶, 아예 적당히 마음을 닫아 감당못할 행복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좌절적인 암담함도 누리지 않는 삶. 평균이야 둘이 똑같겠지만 어느게 더 나을까요. 작년 꽤나 심하게 고민했던 물음인데. 당분간 제 답은 "후자"입니다. 뭐 다시 눈에 뭐가 씌이면 전자로 돌아갈 확률이 적지 않지만요. 글 잘 보았습니다.^_^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