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제품에 거의 얼리어답터적 기질을 보이고 있지만.
그쪽 계열의 꽃이라는 첨단 기기의 경우. 사실 나는 전혀 얼리어답터가 아니다.
십 오년 전쯤. 직장생활을 할때 무리하게 노트북 컴퓨터를 당시 최고 사양으로 저지른것을 제외
하면 (아...가격이 지금 PC 3대는 사고도 남을 가격이었다.)
첨단 디지털 제품이 나오는 족족 구입하여 주변사람들에게 신문물을 널리 전파하는 일 따윈 없
었다.
왜 기계에 대해 그러지 않느냐면.
일단 나는 기계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그 다음으로는 그들이 만들어놓은 암호로 된 사용 설명
서를 도저히 해독 할 자신이 없어서이다. (암호학 책을 읽었는데 세상에나 사용 설명서보다 훨씬
쉬웠다. 어쩌면 사용 설명서는 스페셜한 인간 계층에서만 그 의미가 전달되는 특수 암호인지도)
그러나 가끔은 나도 기계를 사고 싶을때가 있다.
단. 내가 사고싶은 이유는 그 기계로 생활의 편리를 추구하겠다는 목적이 아닌
너무나 잘 빠진 예쁜 디자인의 기계를 봤을때만 그렇다.
(나 같은 인간은 세탁기고 냉장고고 오디오고간에 가장 이쁜걸 고른다. 빨래가 잘 되느냐 냉장이
잘 되느냐 혹은 소리가 멋지냐 하는건 2차적인 문제이다.)
얼마전. 지인과 술자리를 했는데 그가 갑자기 커다란 가방에서 '모모양이 보면 예뻐 기절할지도
몰라' 하며 물건을 하나 꺼냈다.
아아...그 물건은 매킨토시 노트북이었다.
처음 본 물건은 아니었다.
영화에서는 뻑하면 주인공이 맥 놋북을 쓰고, 맥 매장을 지나칠때마다 나는 그걸 유심히 보곤
했으니까.
하지만 스크린 내지는 유리 장막 없이 그걸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예쁜이를 본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아...그토록 아름다운 흰색은 처음이었다. 거기다가
표면을 보호하기 위한 투명 아크릴 케이스를 끼워놨는데 어찌나 멋지구리하던지)
떠오른 장면 하나.
캐리 브레드쇼가 쇼윈도 앞을 지나가다가 예쁜 구두를 발견하고는
더없이 사랑스러워서 못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런 말을 한다.
'헬로우 러블리이~'
내 심정이 딱 그랬다. 물론 나는 구두를 보며 그런 느낌을 받은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지미추도 마놀로 블라닉도 버켄스탁 쓰레빠나 끌고 다니는 내게는 딴세상 얘기다.)
순간 캐리의 심정이 100% 이해되었다.
나 역시 해놓고는 오바였군 하며 바로 후회했으나 입밖으로 그 말을 꺼냈으니까.
(헬로 러블리는 아니었고. 아...이 이쁜이를 어쩜좋아 정도였다.)
맥킨토시 노트북은 아름다웠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표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 어떤 찬사를 가져다 붙여도 내가 본 그 노트북에 대한 설명으로는 모자란다.
여태 내가 쓴건 콘크리트 덩어리가 분명한 그것에 검정색을 칠해놓은 것에 불과했으니
흰색의 우아하고도 기품있는 맥을 봤을때 느낌이 어땠겠는가.
정말이지 당장 영혼을 팔아서라도 (영혼을 팔아야 할 지경의 가격은 아니었다. 내가 예전에 샀던
사람도 잡는 노트북에 비하면 -너무 무거워 갖고 다니다 밧데리 빼서 확 버려버림- 조족지혈이
었다.) 당장 손 안에 넣고 싶었다.
하지만 무거운 가방은 질색을 하는지라. 꼭 컴퓨터를 갖고 다녀야 한다면 핸드PC정도를 생각하
고 있었기 때문에 영혼을 팔아야 하는게 아니라 체력을 백만배쯤 길러야 했기에 더더욱 맥은 가
질 수 없는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사실 요즘은 맥을 쓰는곳이 거의 없다. 잡지사처럼 그림 많이 필요한 곳도 편집부 가보면 전부
마이크로 소프트를 쓴다. (물론 스타일에 목숨 거는 편집장이 있는 한 남성잡지 편집부는 전부
매킨토시라서 기자들이 집구석에 가서 원고를 써 온다는 전설도 있다.)
포토샵등 맥에서만 돌아가던 프로그램은 21세기로 넘어오면서 마이크로 소프트와 손잡았다.
(잘은 모르지만 컴퓨터 게임 산업계의 서브파티 -프로그램 개발자- 들의 변심처럼 그런게 아닐
까?)
그래서 이제는 '폼난다' 의 문제가 아니라면 비싼 맥킨토시를 써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
다.
디자인을 하는 여동생마저 (맥킨토시의 열혈 신봉자였다.) G5 를 이후로 맥과 결별하고 마이크
로 소프트로 갈아탔을 정도니. 성능면을 보고 맥을 고를 이유는 적어도 사라진듯 하다.
그렇지만 말이다.
그래도 말이다.
맥킨토시 노트북은 너무 예뻤다.
그 하얀색 노트북이 내게로 온다면
지금보다 백만배쯤은 글을 잘 쓸 수 있을것 같은 이상한 환상마저 들어버릴 정도로.
첫눈에 반하는 이성을 만나면 흔희 주변은 포커스 아웃이 되어버리고 그 사람만 기괴할 정도로
선명해지면서 뒤에 후광마저 드리워진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나는 사람을 만나면서는 단 한번도 그런적이 없었지만
적어도 물건이 그렇다는것은 이번에 알게 되었다.
지인이 맥 놋북을 켰을때. 그 한입 베어문 사과에서 빛이 나오고.
리모콘을 갖고 노트북 화면을 컨트롤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웠다.
별로 쓰잘은 없어 보였지만 (사과에 불이 들어오고 리모콘으로 조정하고가 사실 놋북의 성능과
무슨 상관인가.)
그것은 최고의 아름다움을 위한 약간의 과장.
충분히 용서할 수 있는 정도의 뻐김으로 보였다. (과시욕까진 아니고)
아름다운 그 맥킨토시를 내 손에 넣을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그걸 만지고 쓰다듬었던 기억만큼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캐리에게 헬로 러블리가 지미추, 마놀로 블라닉이라면
내게있어 헬로 러블리는 영원히 맥킨토시 노트북이다.
추신 : 이 카테고리는 사실 사진이 있어야 마땅한데. 그냥 이미지를 퍼오기 싫어서 말았다. 언젠가 그 지인을 다시 만날때. 내 고물 350D를 끌고 나가 댐시 찍어 올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