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의 종말 - 지폐 없는 사회
케네스 로고프 지음, 최재형.윤영미 옮김 / 다른세상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지갑이 점점 얇아지고 있습니다. 물가는 오르는 데 반해 봉급은 요지부동인 슬픈 현실도 원인 중 하나지만, 점점 지갑에서 현금이 사라지는 것 또한 원인 중 하나입니다. 과거엔 수십 장의 지폐와 동전을 들고 다녔지만, 지금은 비상용으로 들고다니는 30,000원 정도를 제외한다면, 카드 하나로 모든 금융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아직 현금이 필요한 상황이 간간히 등장하기 때문에 카드 하나만으로 살 수는 없지만, 앞으로 몇 년 뒤면 비상용 현금마저도 필요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현금을 점점 사용하지 않는 와중에, 새로운 지폐가 등장했었습니다. 7년 전, 여러 논란 속에서 50,000원권 지폐가 한국사회에 통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화폐의 등장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돌이켜보면, 개인적으로 어떤 변화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ATM기계가 50,000원권 지폐 호환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아무 불편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사 먹을 때도, 쇼핑을 할 때도, 선물을 줄 때도, 50,000원권의 등장이 가져온 변화는 없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시민들은 실생활 속에서 50,000원권 지폐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볼 일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 화폐 발행액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50,000원권 지폐입니다. 화폐 중 50,000원권 지폐는 전체의 77%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발행액 비율과 지폐 양이 일치하진 않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그 많은 50,000원권 지폐가 어디에 있는지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향은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나타납니다. 지폐 1장에 100미국달러(120,192원), 1만엔(102,355원), 500유로(627,884원), 1,000스위스프랑(1,172,780원)의 높은 가치를 지니는 고액권들은 공급의 80%에서 높게는 90%가 넘습니다.

케네스 로고프의 이 책은《화폐의 종말》로 번역되었지만, 원제는 the curse of cash입니다. 현금 중에서 어떠한 현금이 경제에 저주와 같은 존재인지 케네스 로고프가 말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바로 저 고액권들입니다. 케네스 로고프는 많은 양의 고액권 지폐가 정상적인 경제활동보다 불법적인 경제 활동에 사용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돈세탁, 뇌물 공여 및 수수, 마약 거래, 인신매매, 부정부패, 밀수, 사기, 탈세..과거 부정한 거래를 할 때 무거운 사과박스나 007가방을 사용했지만, 지금은 비타500상자처럼 더 가볍고 더 효율적인 거래가 가능합니다. 바로 고액권 덕분입니다.

케네스 로고프는《화폐의 종말》이란 번역처럼 궁극적으론 현금 없는 사회가 지향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금 없는 사회를 위해선 단기적으론 고액권만 폐지하고 소액권 및 동전은 당분간 사용되어야 하며, 저소득층 및 금융취약계층을 위한 다양한 대책(현금카드 발급, 금융인프라 시스템 접근 완화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크게는 현금 없는 사회, 작게는 고액권 폐지 사회가 되면 범죄비용이 증가하기 때문에 전 세계의 국경을 넘나드는 범죄가 줄어들 것이며, 탈세도 현재의 10~15% 수준 감소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케네스 로고프는 탈세 감소만으로도 시뇨리지(Seigniorage)를 상쇄할 것으로 내다봅니다.

현금을 제한하는 것은 범죄와 테러를 종식시키지는 못하겠지만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현금을 감축시키는 것은 미국 같은 나라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며 유일한 조치일 것이다. 불법이민자 고용은 말할 것도 없고 고용주들의 최저임금 위반이나 사회보장 보고 등을 회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 p.297


범죄방지효과보다 더 주목하는 점은 금리정책에 있습니다. 지폐의 폐지는 중앙은행의 제한없는 금리정책에 막대한 영향을 가져올것이라고 말합니다. 케네스 로고프는 지폐가 폐지될 경우 보다 탄력적이고 유동적인 금리정책을 펼칠 수 있으며, 다양한 경기변화에 더 효과적인 대응을 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합니다. 정책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케네스 로고프의 주장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금리문제에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지만, 현금에서 완전 전산화가 되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여러 문제들, 익명성, 사이버 범죄, 정전, 공중 보건의 영역까지 접근하고 있습니다.

한국은행은 2020년까지 동전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영역이 카드결제만으로 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언젠가는 현실화될 미래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케네스 로고프의 주장대로라면, 더 시급한 과제는 따로 있습니다. 동전보다 고액권을, 신사임당을 먼저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동전을 없앤다면 제조비용이 절약되는 장점이 있겠지만, 고액권을 없애고 모든 금융 거래를 온라인으로 전산화할 수 있다면 투명성이 높아지고 세수 확보에 유리해지면서 체납자와 조세회피자를 찾아내기 쉬워질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지하경제 양성화를 주장한다면, 케네스 로고프의 주장을 들어볼 만 합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16-12-23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사임당뿐 아니라 화폐 자체를 없애야 하고 없앨 수 있다고 믿습니다. ^^
 
연봉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 경제학자 우석훈이 밝힌 잔혹한 "대한민국 연봉" 이야기
우석훈 지음 / 새로운현재(메가스터디북스)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른 사람과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주제가 있는가 하면, 하기 힘든 주제가 있습니다. 쉽게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주제는 날씨 같은 이야기이며, 하기 힘든 주제는 정치, 종교 같은 주제일 것입니다. 정치, 종교 못지 않게 꺼려하는 주제 중 하나는 바로 연봉 이야기입니다. 연봉이 낮은 사람이건 높은 사람이건 선호하는 주제는 아닙니다. 많은 기업들은 회사의 연봉을 기밀로 하고 있으며, 직장 동료들끼리도 연봉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뉴스에서 들어볼 수 있는 최저임금 이야기나 평균월급 같은 지식이 아니라면, 연봉은 사회적 공론장에서 거론되지 않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기피하는 연봉 이야기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화제라는 것입니다.

최근 미디어에서 음식 이야기가 인기를 얻자 사람들이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변화하고 있습니다. 미디어에서 등장한 다양한 요리기법을 따라해보고, 맛있는 음식점에 가보고, 이야기합니다. 요리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면 장기적으로 한국의 식문화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평이 많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제학자 우석훈은 사람들의 관심사에 연봉이란 화두를 던져야만 우리 사회의 연봉 시스템에 의미있는 변화가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연봉을 결정하는 것은, 단순히 기업의 실적, 노동자들의 생산성만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봉엔 사회적, 정치적 요소가 들어있으며, 합리적인 부분도, 불합리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한국 경제는 지식경제 혹은 문화경제 쪽으로 진화해온 것은 아니다. 돈을 굴리는 금융업 쪽으로 가거나, 변호사가 되거나 아니면 독점 이윤을 누릴 수 있는 대기업에 간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어느 정도 살 수 있지, 머리 많이 쓰고 재능 많이 쓰는 분야로 가서는 평균적 삶이 안 된다는 얘기이다. - p.98


우리나라 노동자 중 가장 많은 봉급을 받는 300인 이상 규모의 전문서비스업, 방송국, 대규모 금융업 업종이며, 평균 급여는 점점 내려가 소규모 복지서비스, 시설관리 및 조경서비스 분야는 가장 적은 급여를 받습니다. 중소기업보단 중견이, 중견보단 대기업이, 비정규직보단 정규직이 더 많은 급여를 받습니다. 우리는 이런 구도를 어떤 의미에선 문제제기 없이 당연한 구도라고 인지하기도 합니다. 공중파 방송국 KBS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사회복지사로서 노인들의 복지를 도와주는 노동자 중 누가 더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가에 대한 결정은 경제적 생산성보단 사회적 인식에 있습니다. 두 노동자의 급여의 차이, 대우의 차이는 사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석훈은 연봉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 철학 혹은 경제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회복지서비스 노동자들이 한국 연봉 순서에서 가장 맨 아래 구간에 위치한다는 것은, 사회가 복지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철학과 정책 기조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전체 노동자의 임금 내에서 저임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어느정도 되어야 하는가 역시 정책 혹은 사회적 영향입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나쁜 대우를 받지만, 모든 나라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프랑스 등 몇몇 나라는 오히려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연봉이 높기도 합니다. 성별이나 출신 지역, 학벌 혹은 계약 형태가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침해하는 나라도, 그렇지 않은 나라도 있습니다.

공항 리모델링 작업장에서 톰 행크스가 원래 직업을 살려 미장이로 일하게 되고, 그때 받은 일당을 모아서 공항 면세점에서 슈트 한 벌을 당당하게 산다. 공사 현장의 임시 미장이로 일하는 톰 행크스의 월급 수준은 직접 언급되지는 않는다. 다만 주인공을 괴롭히면서도 승진을 간절히 바라는 JFK 공항의 국장, 스탠리 투치보다는 시간당 임금이 더 높다는 대사가 한 번 나온다. 짧은 장면이지만 길고 긴 역사의 유래를 설명하는 장면이다. 기술이 있고 기능공으로 대우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교사와 같은 대표적인 사무직과 비교해서 엄청나게 낮은 임금을 받지 않는 것, 그런 게 미국이라는 나라를 사회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 버틸 수 있게 하는 제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pp.152~153


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 조사한 결과는, 임금을 결정함에 있어서 합리적인 부분도, 비합리적인 부분도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연봉 조정에서 기업의 지불 능력이나 물가상승률을 신경쓰기도 하지만, 타 기업의 임금 수준이나 최저임금 인상률을 눈치본다는 것입니다. 기업의 실적이 향상되고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올라가더라도, 그 해에 최저임금이 인상되지 않았거나 동종업계의 임금이 그대로라면, 기업이 연봉을 올려줄 여력이 충분하더라도 노동자의 연봉은 변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IMF는 중산층의 위기를 분석하면서 대기업 임원들이 지위 때문에 생기는 일종의 지대로 너무 많은 연봉을 가지고 가서 연봉 총액이 줄어들게 되고, 이런 것들이 모여 결국 위기가 발생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노동자의 생산성이 높아서가 아니라, 단순히 지위가 높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는 현상은 주주 자본주의가 두드러지며 발생했습니다. 임금격차가 극단으로 벌어지는 대표적인 나라는 미국이지만, 우리나라 역시 격차가 심해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고연봉 업종과 저연봉 업종의 차이는 타 국가와 비교해봐도 큰 편이며, 저임금 노동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구조입니다. 생산과 지대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본다면, 생산성보다는 땅을 소유하는 등 돈이 생기는 지대 쪽이 여전히 매력적인 사회가 바로 한국입니다.

해적의 급여 체계는 매우 공평했다. "선장은 모든 노획물의 1과 1/2몫을 갖고, 사무장, 목수, 갑판장, 포수는 1과 1/4몫을 갖는다. 그 외 모든 사람은 1몫을 갖는다." 이것은 선장이 일반 선원보다 4~5배 많이 벌었던 상선의 급여 체계와는 아주 대조적이다. 해적들은 약간의 누진적인 요인을 유지하지는 했지만 약탈품을 대체로 균등하게 배분하여 상대적으로 공평한 급여 체계를 도입함으로써 물질적인 불평등을 훌륭히 해소했다. -《후크 선장의 보이지 않는 손》p.116


동일한 노동을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정규직 노동자 간에 차별이 발생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용인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찬호가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 차별을 부당하다고 외치지 않고 정규직 노동자가 될 노력을 하지 않았다며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난합니다. 대한민국 청춘들은 그런 약자들을 차별하며, 차별받지 않기 위해 무한 경쟁을 합니다. 모두가 최정상의 대학만을 바라보고, 최고의 학점만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소수의 사람이 많은 연봉을 받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청춘들을 기다리고 있는것은 타인에게 무시당하고 적은 연봉을 받는 직업입니다.

우리나라는 경제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현재의 연봉구조를 더 급가속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청년 인턴 증가, 노동 개혁법, 파견 노동 확대 등 저임금 노동을 늘리면서 기업의 인건비 부담을 줄이겠다는 것입니다. 반면 최근 미국, 일본 등의 나라에서 최저임금을 큰 폭으로 올리는 등 임금주도성장 정책으로 돌아섰습니다. 어떤 판단이 옳았는지는 시간이 지나야겠지만, 이런 정책의 차이는 임금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우리사회엔 공사현장 노동자도 필요하고,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도 필요하고, 사회복지 노동자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는 연봉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연봉 개선을 위해 우리 사회의 인식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런 노동자들도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폴트 라인 - 보이지 않는 균열이 어떻게 세계 경제를 위협하는가
라구람 G. 라잔 지음, 김민주.송희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1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 세계를 강타했던 2008년의 금융위기는 지금도 회복이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을 만큼 영향력이 큰 사건이었습니다. 금융위기는 많은 희생자와 이야기를 남겼고, 학자들은 위기의 원인과 새로운 모델을 만들기 위해 분주합니다. 대형 사고가 벌어지기 전에 경고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최악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불러온 일본 도호쿠 대지진만 하더라도 학자들과 도쿄전력은 재앙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008년의 금융위기 역시 소수의 학자들은 그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습니다. 저자 라구람 G. 라잔 교수도 그 중 한 사람으로, 공식석상에서 금융위기가 오기 전에 위기를 경고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쓴《폴트 라인》은 금융위기를 다룬 책 중에서 수작이라 할 만 합니다.

라구람 라잔 교수는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지각의 움직임이 대지진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경제 역시 다른 판형간의 충돌이 일어날 수 있으며 여러 요소가 결합되면 2008년의 금융위기처럼 큰 재해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연의 지진은 특별히 위험한 곳과 안전한 곳이 정해져 있지만, 경제의 지진은 어느 곳에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안전했던 곳이 순식간에 위험해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위험한 곳을 안전한 곳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라잔 교수는 2008년의 금융위기의 분석 뿐만 아니라 다른 대형 사고에 대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2008년의 폴트라인 중 하나는 사회 안전망이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과거엔 사회 안전망이 적더라도 괜찮았습니다. 오히려 부족한 사회 안전망이 직장을 얻기 위한 동기부여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용 없는 회복이 지속되면서 취약한 안전망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뒤늦게 안전망을 만들어보려 해도 전국적 규모의 강력한 노동 조합이 부재했고, 사회적 복지망에 대한 차별적 인식 때문에 만들기 힘들었습니다. 정부는 사회 안전망이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고용이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경기 부양책을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국민의 불안감이 커지면, 그것이 정치인에 대한 압력으로 작용하고, 정부 부양책이 주먹구구식으로 도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권은 이 폴트라인을 해결하기 위해, 또다른 폴트라인을 만들었습니다. 극심해지는 소득 불평등, 임금 소득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임금을 늘리는게 아닌, 가계 대출 확대를 통해 국민의 불안감을 해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신용불량자라도, 봉급이 적은 사람이라도 내집마련을 가능하게 해 주겠다는 선심적 정책을 폈고, 유권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정부가 서민대출에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방하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곳은 역시 금융권이었습니다.

금융권은 이전부터 안좋은 관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회사에 수익을 안겨준 직원에겐 엄청난 보너스를 준 반면, 손실을 낼 경우엔 문책 없이 지나가는 관행 때문에 금융인들은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위험을 감수한 투자는 혁신적인 방법으로 칭송되었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투자가 지속되었습니다. 폭탄 돌리기나 마찬가지인 금융권의 투자 방식은 계속 돈을 벌다 마지막에 엄청난 폭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폭발이 엄청나기 때문에, 정부가 가만 둘 리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008년의 금융위기 역시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천명한 덕분에 일이 잘못되더라도 정부가 도와줄거란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엄청난 양의 부실투자를 합니다. 금융권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엄청난 손실을 본 금융권이 무너지는 것을 정부가 구제금융이란 명분하에 도와줬기 때문입니다.

가장 파격적인 보수를 제시한 금융 기관의 경우 주식 수익률이 가장 낮았고, 반대로 그 변동 폭은 가장 컸다. 또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업에 가장 많이 관여했으며, 레버리지가 가장 높았다는 사실도 함께 밝혀졌다. 결국 파격적인 보수 체계가 공격적인 리스크를 감수하도록 만들었고, 그것이 비극적인 결과를 유발했다는 것이다. - p.292


2008년의 금융위기가 미국의 부동산 폭락에서 그치지 않고 전세계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그 폴트라인이 전세계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자금을 원할 때, 일본과 독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경제위기 이후 수출 지향적 성장과 관리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거대한 유보금 역시 투자처를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이들 수출 지향적 국가는, 내수를 포기하고 자국민을 극도로 압박하면서 대기업엔 엄청난 자금을 쌓는 방식으로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받아들여줄 시장은 미국 외엔 찾기 힘들며, 이런 불균형 상태 역시 폴트라인이 될 수 있다고 라잔 교수는 경고합니다.

라잔 교수는 이런 균열을 막는 방식을 통해 위기를 예방하자고 말합니다.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고, 소득 불평등을 해소함으로서 임의적인 국가 부양책이 가져오는 부작용을 막아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과도한 봉급과 인센티브를 받는 금융권 역시 무모한 도전을 하기 힘들도록 내부 문화의 개선이 필요합니다. 손해가 생기면 정부가 해결해주리라 믿는 대기업들에게도 실패하면 그 책임을 스스로 지게 해야된다고 말합니다. 대기업이 무너지면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겠지만, 대기업을 정부가 무작정 수호해 무분별한 행동을 하게 하는것이 장기적으로 더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균열들을 방치한다면, 언제든 다시 거대한 금융위기가 올 수 있다는 것을 라잔교수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짝찾기 경제학 - 가장 이상적인 짝을 찾는 경제학적 해법
폴 오이어 지음, 홍지수 옮김 / 청림출판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다른 어떤 조건도 고려하지 않는 채, 상대방의 존재 자체만으로 사랑하는 맹목적인 두 사람의 이야기를 우리는 좋아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사랑 이야기에서 돈이 개입되는 것을 별로 탐탁치 않아합니다. 비틀즈는 노래를 통해 '사랑을 내게 사줄 순 없어'라고 외칩니다.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염원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현실에 그런 사랑이 별로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많은 행동은 경제학적인 동기로 이루어지며, 사랑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사랑의 경제학적인 동기는 합리적 선택 같은 심리적인 것부터, 돈의 절대적 차이라는 물질적인 것까지 다양합니다.

스탠퍼드의 경제학자인 저자 폴 오이어는 이혼한 이후 새로운 파트너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는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에서 짝을 찾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연애 과정이 철저하게 경제학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자는 사람들의 연애 과정을 통해 경제학 이론을 설명하고, 동시에 경제학 이론을 통해 사람들의 연애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탐색 이론, 신호 효과, 역선택, 빈말, 통계적 차별, 시장의 크기, 네트워크 외부효과 등 사람들이 무언가를 선호하는 과정은, 그것이 mp3 플레이어던, 쉐보레 임팔라던, 평생을 같이 할 파트너를 찾는 것이던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물건과 사람을 비슷한 방법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은, 그만큼 사람들의 특징이 물건화, 수치화되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 결혼정보회사의 등급표처럼, 서울대 법대 출신의 판사는 1등급 남편감이 되고, 행정고시를 합격했다면 4등급 남편감이 되는것이며, 일반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다면 15등급 남자가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동반자를 고를 때에는 내 동반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상대들 중 최고의 상대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나를 선택해주는 상대들 중 최고의 상대를 고르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온라인으로 데이트 상대를 찾는 과정은 집을 구하는 과정보다는 일자리를 찾는 과정과 훨씬 더 비슷하다. - p.32


사람들은 자동차나 집처럼 비싼 물건 뿐만 아니라 신발, 가방 같은 물건을 구입할 때도 수많은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더 탐색할 지, 구매할 지 결정합니다. 이런 의사결정 과정을 경제학에선 탐색 이론을 통해 바라봅니다. 지금 구매를 한다는 것은, 훗날 더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할 기회를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현재로서 최선인 선택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계속 탐색할지가 적용되는 분야는 물건들 뿐만 아니라 애인을 찾는 과정도 포함됩니다. 많이 탐색하는 것은 자신의 이상형을 만날 확률이 올라간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비싼 비용을 감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비용은 솔로 상태의 외로움, 나이를 점점 먹어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탐색 비용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탐색 기간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저자는 어느정도 탐색기간이 지난 뒤에는 새로운 사랑을 찾는 것보다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권고합니다.

영화『다크나이트』에서 조커가 돈을 태우며 "중요한 것은 메시지"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조커의 말처럼, 연애에 있어선 자신의 신호가 얼마나 진심인지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경제학에선 신호 효과로 연구하는데, 가장 간단한 것은 상대가 마음에 든다면 돈을 마구 쓰면 됩니다. 비싼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그만큼 상대에게 마음이 있다는 신호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강한 신호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반응이 없다면, 빠르게 포기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만약 자신이 파트너를 고르는 기준이 까다롭다면, 경제학에선 두터운 시장에 갈 것을 권유합니다. 자신이 소수성애자이거나, 채식주의자거나, 엄청난 부자를 만나서 신데렐라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면, 시골보단 도시가 좋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규모가 작은 시장이 불리한 것만은 아닙니다. 시골에 있다면 유일한 후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남성들이 외모로 입는 피해는 여성들이 외모로 입는 피해보다 더 컸고, 남성들이 외모로 보는 득은 여성들이 외모로 얻는 득보다 더 적었다. 즉 남성보다 여성이 외모로 득을 더 보았고 피해는 덜 보았다. - p.236


신데렐라 스토리를 가진 드라마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연애를, 그리고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하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개천에서 용 나오지 않는 사회인게 사실입니다. 재산이 상속되면서 금수저는 다시 부자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교육 역시 부의 대물림 현상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연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경제학에서 동류교배라 부르는, 끼리끼리 결혼하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재력을 가진 사람들끼리 결혼할 뿐만 아니라, 비슷한 외모를 가진 사람들끼리 결혼합니다. 원빈과 이나영, 평범한 남자A와 평범한 여자B 이렇게 4명이 있다면, 원빈과 맺어질 확률이 높은건 이나영입니다. 외모에 대한 선호와 현실의 간극은 꽤 넓습니다. 연애를 할때 남성들은 여성들의 외모를 가장 중시하고, 여성들은 남성들의 외모와 재력을 가장 중시합니다. 미녀는 평균 외모의 여성보다 약 4배, 못생긴 여자보다 25배나 많은 구애를 받습니다. 즉 사람들의 선호는 쏠려 있지만, 미녀에게 선택되는 건 미남입니다. 이런 사실은 연애에 있어서 중요한 점을 말해줍니다. 만약 자신이 미남이나 미녀가 아닌데 파트너로 미남이나 미녀를 꿈꾼다면, 꿈 깨라는 말입니다.

비슷한 외모끼리 사귀는 경향이 있지만, 또 하나의 강력한 변수는 그런 구도를 깰 수 있습니다. 바로 돈입니다. 문제는 남성은 여성의 돈을 높게 평가하지 않기 때문에, 못생긴 여자는 잘생긴 남자를 얻을 확률이 희박하다는 점입니다. 반대로 못생긴 남자는, 잘생긴 여자와 결혼할 수 있습니다. 조사 결과 한국 여성은 외모가 뛰어난 남성과 외모는 평균이되 연봉이 5,200만원 더 많은 남성을 동등하게 평가했습니다. 즉 한국에서는 연봉 2,000만원의 미남과 연봉 7,200만원의 평범한 남성은 연애시장에서 비슷한 경쟁력을 보입니다. 이런 차이점은 문화적 차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곤 합니다. 예를들어 서양의 여성들은 상대방 남성의 직업 선호도에서 변호사, 의사, 군인, 소방관을 최우선으로 선호했는데, 한국이었다면 군인과 소방관은 중간도 가지 못할 직업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연애의 경제학은 비슷한 반응을 보입니다. 저자는 경제학 이론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짝을 찾을 방법들을 유쾌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인은 미쳤다! - LG전자 해외 법인을 10년간 이끈 외국인 CEO의 생생한 증언
에리크 쉬르데주 지음, 권지현 옮김 / 북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자신과 다른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직접 그 다른 무언가가 되어보는 방법은, 효과적이면서 흥미진진합니다. 그렇게 경계를 넘나들며 바라본 관점은 여자가 남자의 삶을 경험한《548일 남장체험》, 반대로 남자가 여자의 삶을 경험한《지구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내국인이 외국인 용역노동자의 삶을 경험한《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보잘 것 없이》, 백인이 흑인차별을 이해하기 위해 흑인이 되어본《블랙 라이크 미》등의 책에서 말해주듯이, 그 자체로 교훈적입니다. 서양 외국인이 한국의 기업 문화를, 조직 문화를 경험하고 서양 외국인의 시선에서 말해주는 이야기들은, 한국인들만으로 구성된 조직에서는 때로는 인지하지 못하며, 때로는 알면서도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저자 에리크 쉬르데주는 능력있는 기업인으로, 한국의 재벌 LG의 프랑스 법인에서 활약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기업들은 해외에서 도약을 시작하려고 준비중인 상태였고, 저자는 그런 미지의 세계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전 직장의 동료들, 특히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의 기업은 편협하고 군대식이며,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며 저자를 만류했지만, 저자는 악명은 높았지만 그만큼 효과적인 한국의 기업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에리크 쉬르데주는 입사하기 위한 면접에서부터 한국식을 경험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에리크 쉬르데주가 준비해간 것들, 자신의 능력을 설명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취업할 때 지원자의 능력보다 학벌이 더 중요한 것처럼, 한국인들은 그가 도시바, 필립스, 소니에서 일했다는 이력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기업들은 정상을 차지하고 있던 일본과 유럽의 대기업들의 시장 점유율을 점차 밀어내면서 급격하게 발전하는 중이었고, 그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자부심이 저자에게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의 영업적 능률과 유럽식 경영 방식이 갖는 장점을 양립시키겠다는 개인적인 욕망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은 부하직원들에게 쉽게 화를 내고, 상대방에게 욕을 하고, 문을 쾅쾅 닫고, 사전이나 의자같은 물건을 직장 동료들에게 던지는 사람들이었지만, 사원 개개인이 성취해야 할 명백한 목적, 효과적인 관리 시스템, 수치화된 목표 달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기계가 되었습니다. 에리크 쉬르데주는 서양에서는 협력업체들을 일방적으로 대할 수 없다고 간부들을 설득했지만, LG 간부들은 협력업체와의 정, 인간관계, 고마움의 표시같은건 전혀 하지 않았고, 약속도 어겼습니다. 한국의 기업 문화는 비인간적이었지만, 엄청나게 효율적이었습니다.

LG의 세계, 한국 기업의 세계는 철저한 서열 문화, 실적 문화였습니다. 가장 위에 존재한 자, 재벌 일가는 신이나 다름없었고, 사장은 아버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상사와 회사는 세계의 전부였고, 그 관계를 구성하는 것은 권위였습니다. 직원들에게 의무는, 개인의 권리를 앞섰습니다. 그것은 서양인에게 과거의 세계이자, 충격적인 세계였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현재만이 존재했습니다. 실적이 그저 그런 사원은 그 이전 사업에서 아무리 좋은 성과를 냈더라도 징계를 받거나 가차 없이 해고당했습니다.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평가 시스템은 가혹했습니다. 목표를 100퍼센트 달성했을 때에는 초록색, 95퍼센트 이상일 때에는 노란색, 그 이하는 붉은색으로 표시되었습니다. 목표의 99퍼센트가지 달성해도 그것은 목표를 달성한 것이 아니었으며, 직원들은 언제나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좋은 실적을 내도 잘못한 것만 중요했으며, 격려와 상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셀프세탁방을 위한 세탁기 신제품을 출시할 때 동네 카페와 연계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카페 안에 작은 세탁 구역을 두고 고객이 오면 인터넷에 연결해서 텔레비전과 오디오, 컴퓨터 기기 등 다른 엘지 데품을 사용해볼 수 있도록 꾸민 곳이었다. 이 새로운 카페를 '워시 바'라고 이름 짓고 열다섯 군데를 시범 운영했다. 안타깝게도 실험은 석 달 만에 끝났다. 독창성도 있었고 고객들도 좋아했지만, 한국의 신임 부회장이 납득할 만한 설명도 해주지 않고 프로젝트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시도가 싫다는 것이고 그것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 p.114


한국의 재벌 LG의 이런 기업문화는 매출과 실적이 성장중일 때는 비인간적이었지만 효율적인 것이 될 수 있었지만, 매출과 실적이 부진할 때는 그냥 비인간적인 문화였습니다. 하루 10시간 이상 근무, 회사에 대한 맹목적인 헌신, 경직된 명령 체계, 불안정한 고용은 기업이 시장지분을 넓히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그것은 직원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LG 프랑스 법인의 서양인 동료들은 입사한지 2년을 버티지 못했습니다. 저자는 놀랍게도 9년이나 LG에서 버텼습니다. LG에서 최초로 외국인으로서 임원진이 되기도 했습니다. 임원이 된 그가 한국에 연수를 와서 본 것은 연간 매출액이 600억 달러가 넘는 다국적 기업의 최고 책임자들의 모임이라기엔 너무나 한국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1월의 추운 날씨에 야외에서 LG의 구호를 외치며 술을 마시고, 또 술을 마셨습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모든 사람을 괴롭게만 한 술자리였지만, 그 모습이야말로 LG에 입사한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임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LG의 성장이 주춤하면서 재벌의 경영 원칙은 기업에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천룡인이나 다름없는 절대권력을 가진 재벌 일가에서 말단 직원까지 철저하게 서열화된 제도는 잘 나갈땐 일사천리의 파워를 보여줬지만,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현장 수행자와 정책 결정자의 괴리가 나타났습니다. 개방적이고 세계화의 흐름을 따라가던 LG는, LG그룹 창립자의 손자인 신임 부회장 구모씨가 등장하면서 다시 폐쇄적이고 한국적인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실적만이 중요한 기업문화에서 실적이 나오지 않을 때, 기업의 문화는 부패합니다. 직원들의 고객은 소비자가 아니라 상사가 됩니다. 업무 상당수는 상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일, 보여주기 위한 일로 변질됩니다. 그런 문화에서 생산성은 점점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상사에게 해고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야근과 주말근무를 밥먹듯이 하기 때문에 근무시간은 늘어나지만, 실제 생산적인 일을 하는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비자의 의견이 최우선이 아니라 그룹 회장님의 취향이 최우선이 된다면, 제품 경쟁력 또한 긍정적일 수 없습니다.

"독재적 방식은 일시적으로는 효율적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많은 부작용을 낳으며, 민주주의는 단기적으로는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 경제학자 피터 린더트


LG의 기업문화, 한국의 재벌 문화는 부하가 상사에게 직언하기 힘든 독재적 방식으로 효율성을 구축했지만, 장기적으로 그 폐해가 나타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자가 LG에서 경험한 한국의 문화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은 아닙니다. 한국인들은 오로지 갑과 을이라는 인간관계만 존재하며, 정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지적도, 요새 문제되고 있는 사회이슈입니다. 사회의 정점에서 군림하는 절대권력 재벌일가들은, 액턴 경의 경구처럼 절대로 부패하고 있습니다. 야근 등 상사에게 보여주기식의 문화는, 옆집 학부모에게 질 수 없다는 사교육 열풍, 수능 만점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학과에 갈 수 없다는 아이러니함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서양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한국 기업, 조직 문화의 문제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즉 문제는 우리들 자신이 침묵한다는데 있습니다. 침묵하며 부조리를 계속 견딜 것인지, 죽창을 들던 시위를 하던 정치권을 압박하던 변화의 시대를 만들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