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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의 세계사 - 새로 쓴 제3세계 인민의 역사
비자이 프라샤드 지음, 박소현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오늘날 역사를 배움에 있어서 사실로서의 역사를 강조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했다는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왜 반포하였느냐이지 몇년 몇월 몇일에 반포했나가 아닙니다. 몇년에 반포했다는 역사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역사의 의미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이 차이가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차이를 무시하고 한가지의 역사의 의미를 동일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일어났던 단순한 사실이 아닌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다른 사회에 관심을 가지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며, 어떤 역사적 사건의 원인과 경향이 현재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지를 생각합니다. 때문에 역사의 주체를 누구로 할 것인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으며, 이 수많은 의견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배웁니다.
가장 흔한 역사는 승자의 기록으로서의 역사, 혹은 위에서부터의 역사입니다. 과거에 중요했던 것은 왕이나 신관들이었고, 정치는 관료들의 역사였으며, 전쟁은 장군의 역사임과 동시에 승리국가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엔 다른 역사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누군가에겐 패도의 역사가 누군가에겐 저주스러운 학살의 역사이며, 누군가에겐 성공신화가 누군가에겐 반민주적인 독재이기도 합니다. 김시덕이《그들이 본 임진왜란》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같은 사실의 역사를 다르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 비자이 프라샤드가 쓴《갈색의 세계사》역시 다른 이면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는 무슨 역사였는가? 냉전시대였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포함되어있었던 제1세계와 제2세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더 많은, 그리고 그만큼 중요한 역사는 제3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사를 미국과 소련의 대립,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군비경쟁과 같은 냉전의 역사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식민주의의 철폐와 새로운 평등, 군비축소, 공정한 경제질서, 반인종주의 등을 외치는 역사도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의 제3세계에서 일어났던 투쟁의 역사는 농민과 노동자의 저항, 청년들의 혁명적 이상주의, 신흥 계급의 숨 막힐 듯한 열망에 힘입어 열렬히 불타올랐습니다. 제1세계나 제2세계 시민들, 그리고 아마도 지금의 우리들은 제3세계를 실패한 국가, 기근, 빈곤, 절망의 동의어로 바라보지만, 그곳엔 가치있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저자는 제3세계의 변화를 국가적, 세계적 프로젝트의 차원에서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어떤 성과와 한계가 있는지를 말합니다.
제3세계의 사람들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 참호에서 욕지거리를 내뱉었을 병사들만큼이나 식민주의 이후의 대안을 열망했고, 제3세계 정치인들은 이에 화답했습니다. 그들은 반제국주의연맹, 아시아아프리카회의, 비동맹운동회의, 삼대륙회의 등을 통해 기존의 권력체제를 변화시키고자 했고, 새로운 경제질서를 추구했습니다. 그곳엔 독재나 군부가 들어서기도 했고, 석유의 이권이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학살당했으며, 사회주의가 대두되었다가 몰락하기도 했습니다. 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수많은 대안과 의견들이 다양한 경제, 정치 프로젝트로 시행되었고 일부는 성공을, 일부는 실패를 거두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 과거 동아시아의 기적이라 평가되며 아시아의 4용 중 하나였던 우리의 역사 또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홍콩, 대만, 한국은 모두 일당독재나 군부독재 체제에서 시민들의 희생아래 발전이 이루어졌고, 제3세계에 지원되던 서구의 지원금보다 더 많은 지원금이 동아시아에 집중되었습니다. 동아시아의 성공은 제3세계에 있어서 지배층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자 시민들에겐 억압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세계질서를 바꿔보려는 제3세계의 요구는 네 마리 용이라는 실적 앞에 거부당했고, 이들의 성공은 아시아적 가치란 이름하에 포장되어 IMF식 세계화를 선전하는 멋진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재체제 아래에서 다수의 희생과 서구의 자본으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성공은, 70년대에 제3세계를 강타했던 금융위기처럼 90년대의 금융위기를 맞이하며 맨얼굴을 드러내게 됩니다.
요란 테르보른이 말한 것처럼 냉전은 근본적으로 비대등한 분쟁이었지만, 양 진영이 서로 대등한 분쟁인 것처럼 상정하고 경험한 분쟁이었던 만큼, 제2세계라 불리웠던 소련의 몰락은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던 제3세계 프로젝트 또한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그것은 서구가 제3세계 급진운동을 치밀하게 견제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자는 제3세계 내부의 모순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말합니다. 제3세계는 제1세계에게 굴복했고, 지금의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의 프로젝트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패권에 대항할 제도적 기구도, 사상도 없습니다. 남은 것은 IS같은 잔혹한 종교적 근본주의, 혹은 구호밖에 남지 않은 대중운동 뿐입니다. 자본주의의 멸망을 상상하는 것이 세계의 멸망을 상상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과거에 멸시당하고 착취당해온 제3세계 시민들이 만들어낸 제3세계 프로젝트라는 역사를 바라보며, 새로운 세계적 프로젝트라는 역사를 상상해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