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 소와 소고기로 본 조선의 역사와 문화
김동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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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은 역사상 가장 풍족한 시대를 살고 있으며, 그에 걸맞게 많은 양의 고기를 먹고 있다. 한국의 연간 1인당 육류 소비량은 OECD평균엔 못 미치지만 51.3㎏로 결코 적지 않은 양을 먹는다. 한국 사람들은 돼지고기(24.4㎏)를 가장 많이 먹고, 그 다음은 닭고기(15.4㎏), 소고기(11.6㎏) 순이었다. 육류 선호도를 고려할 때 가격이란 요소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돼지는 맛있는 고기이고 치킨 또한 국민음식이라 부를만 하지만, 만약 같은 가격이었다면 소고기 선호도는 더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사람들의 소고기 사랑은 하루이틀 전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소고기 사랑은 집착에 가까웠다. 기쁜 일이 있을 때도, 슬픈 일이 있을 때도, 언제나 조선인들의 곁에는 소고기가 있었다. 역사학자 김동진은 조선시대 1인당 소고기 섭취량이 20세기 말 한국인들보다 많았다고 주장한다. 현대사회의 발달된 축산업 기술 덕에 넘치도록 많은 소고기보다도 더 많은 양의 고기를 조선시대 사람들이 즐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조선 정부에게 소 육성은 중요한 국가적 과제였다. 김동진은 조선 초부터 중점적으로 소 보유량을 늘린 결과 세조8년에 조선에서 사육하는 소는 30만~45만 마리였으며, 16세기 중엽에 조선은 60만 마리의 소를 사육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농업사회에서 소는 식량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조선 초에 소를 키우는 마을은 부자 마을이었고, 소를 키우는 집은 부잣집이었다. 부농의 대두는 사회 전반의 발전에 중요한 요소이며, 부농은 소와 같은 가축의 힘이 있어야 가능했다.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소는 주요 자산이기에 조선 정부는 소고기 섭취의 무분별한 남용을 금지해야 할 때도 있었다. 정부의 소고기 금령에 율곡이이 같은 학자는 명을 충실히 지켜 평생 소고기를 먹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런 금지령은 다양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며 사람들은 어떻게든 금지령을 피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공식적인 도살장들이 열렸고, 소고기를 먹다가 귀양을 가는 일이 생겨도 조선사람들은 소고기를 즐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동국세시기》(1849)에 따르면, "서울 풍속에 음력 10월 초하룻날, 화로 안에 숯을 시뻘겋게 피워 석쇠를 올려놓고 소고기를 기름장, 달걀, 파, 마늘, 산초가루로 양념한 후 구우면서 둘러앉아 먹는 것을 '난로회'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조선의 탐식가들》p.73


소고기를 즐기는 사람들의 행동은 사회, 경제, 문화 전 분야에 있어서 변화를 가져왔다. 소고기 음식이라는 조선시대 식문화에 대한 이해 뿐만 아니라 도시의 생성, 정치 시스템, 종교 시스템 등을 이해함에 있어서 소고기는 빠질 수 없는 요소인 것이다. 조선시대에 소를 어느정도 키웠으며, 어느정도 먹었느냐는 그래서 대단히 중요하다. 역사학자 김동진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못 먹고 굶주렸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반해 오히려 현대인 못지 않게 소고기를 즐기는 조선인들의 삶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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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2월 12일 - 베트남 퐁니·퐁넛 학살 그리고 세계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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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개인적 기억 뿐만 아니라 사회구성원 전체의 집단기억을 통해 커다란 역사적 사건들을 받아들임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우리는 기억한다. 경술국치와 삼일운동, 광복절을 기억한다. 군사쿠데타와 5월의 광주, 6월의 운동을 기억한다. 반대로 기억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소수의 기억일 뿐, 집단기억화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1968년 퐁니 퐁넛 마을에서의 하루를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가?

저자 고경태는 1968년 2월 12일의 작은 마을을 통해 1968년의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 그곳엔 한국군이 있었고, 민간인이 있었다.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이 있었고, 미군도 있었다. 린든 존슨 미 대통령도 있었고, 박정희도 있었다. 노인도 있었고 어린아이도 있었다. 그리고 수십개의 시체가 있었다. 대한민국 해병대의 청룡 부대가 그곳에 있었고, 총성이 있었다. 1, 2, 3 소대 중 어느 소대의 누가 했는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우리에겐 배제된 기억이다.

주민-병사 라는 표현은 반드시 두 정체성이 완전히 융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으며, 하이픈으로 연결된 이 정체성은 서로 반대되는 두 각도에서 다르게 보일 것으로 기대되었다. ‘벤 타’ 즉 ‘이편’이나 혁명세력의 이상적 관점에서 보면, 하이픈으로 연결된 사람은 병사였다. ‘벤 타’에서는 이 사람이 ‘벤 키아’, 즉 ‘저편’의 눈에는 단순한 주민으로 비치기를 기대했다. 때로는 ‘저편’은 이런 기대를 저버리고 ‘이편’의 관점을 받아들였으며, 이 관점을 왜곡하고 또한 왜곡을 과장했다. 따라서 마을의 모든 산사람과 물건을 군사적으로 정당한 파괴의 목표로 규정했다 - 《학살 그 이후》45~46


같은 생명체끼리 같은 종끼리 서로를 죽인다는 점에서, 수많은 노력을 들여가며 상대와 자신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전쟁은 비극이다. 비극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랬던가. 비극적인 살육의 현장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풍요로운 미군의 PX가 있었다. 아이티와 쿠바에서 외친 절규는 은행을 웃게 했고, 도미니카의 피는 설탕 제조업자의 돈이 되었다. 한국 청년들의 목숨값은 그들의 고향에 풍요의 기반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쟁의 집단기억은 온전히 어둡고 잔인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집단기억의 형성에 비극의 당사자들은 고립되어 있다. 그들은 개인의 기억과 집단기억 사이에서 더 고통받는 것이다.

병사의 마음속에는 증오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하는 것이다. 전쟁의 이유,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지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단합된 힘으로 모두 함께 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고 사실 그들은 총알받이에 불과하다. 그들은 알고 있다. 개개인은 전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증오는 오히려 후방에 자리잡고 있다. 병사들은 전투가 미친 짓이라는 점을 분명히 본다. 그래서 그들은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알게 된다. -《크리스마스 휴전, 큰 전쟁을 멈춘 작은 평화》


퐁니 퐁넛 마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가?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몸이 찢겨져 우물에 던져진 아이를 기억하는 것이고, 가슴 하나가 잘려져나간 젊은 여성을 기억하는 것이다. 또한 지금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고 있는 파병군인들을 기억하는 것이고, 그들을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태도를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쟁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민족의 용기와 우월성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다른 민족의 열등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는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 전쟁을 기억해야 한다. 기억하지 않는다면, 또 잘못된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비극을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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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구 세력 난동사
이광수.한형식 지음 / 나름북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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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한민국 20대 총선에서 정의당은 지역구 253석 중 2석을 차지했습니다. 만약 20년 뒤, 정의당이 두자리수 의석도 아닌, 제1야당도 아닌, 집권당이 될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군소 정당이 거대 정당을 이기는 것은 대단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인도의 집권당은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부터 존재해온 회의당이었습니다. 인도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부터 시작된 회의당의 지배는 인디라 간디, 라지브 간디 등으로 이어지며 40년이 넘는 시간동안 지속되었으며, '네루 왕조' 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이에 반해 인도의 인도국민당은 1984년에 545석 가운데 2석밖에 얻지 못한 군소정당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도국민당은 그로부터 15년만에 집권당의 자리에 오릅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통치하는 동안 수많은 피해를 입혔지만, 어찌보면 더 큰 피해는 식민통치 이후에 발생했습니다. 영국은 식민통치를 하기 위해 종교갈등을 이용했고, 힌두와 이슬람간에 생긴 불화는 점점 커졌습니다. 폭력은 폭력을 낳았고, 왜 상대를 증오하게 되었는지도 잊은 채 증오를 거듭했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분리되었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엄청난 폭력과 범죄는 힌두와 이슬람 사이에 결코 이어질 수 없는 벽을 만들어놓았습니다. 정치는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는 커녕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부추겼습니다. 타자에 대한 맹목적 적의는 공동체에 대한 맹목적 충성이며, 이를 이용한 것은 회의당이었고, 다른 정당들이었으며, 인도국민당이었습니다.

회의당의 장기 집권을 이끈 인디라 간디는 빅부격차가 심해지는 등 경제위기를 불러왔으며, 헌정을 중단시켰습니다. 야당 정치인을 구속하고 산아제한을 한다는 명분하에 빈민 남성들을 강제로 잡아들여 불임수술을 자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종교적 적대국가인 파키스탄을 활용한다는 전형적인 보수 세력의 전략을 구사하여 지지 기반을 유지했습니다. 자신의 국정 실패에 대한 비판의 물꼬를 돌리기 위해 종교 근본주의 세력을 암암리에 지원했고, 군대를 시크교 성지인 황금사원에 투입해 피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종교인을 적으로 규정하고 학살한 인디라 간디는 결국 시크교도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사람들은 인디라 간디를 추모한다는 명목 하에 수천 명의 시크교도를 학살했습니다.

아드와니를 비롯한 인도국민당 정치인이 잇달아 행동 참가를 선언했고, 이어 전국에서 수십만 명의 행동 대원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군과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슬림의 성소가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이 과정에서 232명이 살해되었고, 그 후로도 유혈 사태가 전국적으로 계속되어 500명 이상이 사망했다. 그러면서 더 큰 비극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분노에 찬 무슬림이 연쇄적으로 복수를 감행한 것이었다. 그들은 연쇄 테러를 일으켰고, 그러면 다시 힌두 세력이 집단 학살이라는 또 다른 복수를 자행했다. - p.125


회의당이 종교적 갈등을 뒤에서 활용한 반면, 인도국민당은 전면적으로 종교 공동체주의를 부추기며 세를 키웠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될 때 힌두교도들을 지원하며 전국적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힌두교를 믿는 사람만이 인도 민족이라는 극우 민족주의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집회를 통해 대규모 폭력을 선동했고, 그 결과는 수많은 사람들의 폭력, 성폭행, 그리고 죽음이었습니다. 인도국민당은 이슬람 사원을 파괴하고 천여명의 사람이 죽은 아요디야 사건을 통해 2석의 정당에서 제1당이 되었고, 천여명의 무슬림을 학살한 구자라뜨 사건 이후 총리를 배출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진 무슬림에 대한 적의를 자극한 덕분에 인도국민당은 집권당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부터인가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종북 이데올로기처럼, 인도의 힌두 근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내부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절대 권력이며, 절대로 부패했습니다. 종교의 이름을 빌린 폭력은 그 기반에 카스트 제도라는 계급문제와 경제문제가 있습니다. 하층 카스트들은 카스트 제도로 인한 불평등과 불합리를 무슬림을 향해 발산합니다. 정치는 그 행위가 상대가 무슬림이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종용합니다. 저자들은 지배 계급이 만들어놓은 비참한 현실에 대한 불만을 가난한 피지배 민중끼리의 증오와 폭력으로 분출하도록 부추기는 정치가 계급 사회에서 항상 있어왔다고 말합니다. 정치권은 자본가와 중산층에게는 실질적인 경제적 이익을 주고, 가난한 시민들에겐 분노를 폭발시킬 수 있는 적을 제공함으로서 지지를 유지합니다. 식민지 경험, 분단과 전쟁, 과도한 민족주의, 그것을 활용하는 정치권 등 인도의 모습은 비단 인도의 모습만은 아닐 것이라고 저자들은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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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의 세계사 - 새로 쓴 제3세계 인민의 역사
비자이 프라샤드 지음, 박소현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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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역사를 배움에 있어서 사실로서의 역사를 강조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했다는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왜 반포하였느냐이지 몇년 몇월 몇일에 반포했나가 아닙니다. 몇년에 반포했다는 역사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역사의 의미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이 차이가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차이를 무시하고 한가지의 역사의 의미를 동일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일어났던 단순한 사실이 아닌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다른 사회에 관심을 가지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며, 어떤 역사적 사건의 원인과 경향이 현재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지를 생각합니다. 때문에 역사의 주체를 누구로 할 것인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으며, 이 수많은 의견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배웁니다.

가장 흔한 역사는 승자의 기록으로서의 역사, 혹은 위에서부터의 역사입니다. 과거에 중요했던 것은 왕이나 신관들이었고, 정치는 관료들의 역사였으며, 전쟁은 장군의 역사임과 동시에 승리국가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엔 다른 역사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누군가에겐 패도의 역사가 누군가에겐 저주스러운 학살의 역사이며, 누군가에겐 성공신화가 누군가에겐 반민주적인 독재이기도 합니다. 김시덕이《그들이 본 임진왜란》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같은 사실의 역사를 다르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 비자이 프라샤드가 쓴《갈색의 세계사》역시 다른 이면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는 무슨 역사였는가? 냉전시대였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포함되어있었던 제1세계와 제2세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더 많은, 그리고 그만큼 중요한 역사는 제3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사를 미국과 소련의 대립,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군비경쟁과 같은 냉전의 역사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식민주의의 철폐와 새로운 평등, 군비축소, 공정한 경제질서, 반인종주의 등을 외치는 역사도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의 제3세계에서 일어났던 투쟁의 역사는 농민과 노동자의 저항, 청년들의 혁명적 이상주의, 신흥 계급의 숨 막힐 듯한 열망에 힘입어 열렬히 불타올랐습니다. 제1세계나 제2세계 시민들, 그리고 아마도 지금의 우리들은 제3세계를 실패한 국가, 기근, 빈곤, 절망의 동의어로 바라보지만, 그곳엔 가치있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저자는 제3세계의 변화를 국가적, 세계적 프로젝트의 차원에서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어떤 성과와 한계가 있는지를 말합니다.

제3세계의 사람들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 참호에서 욕지거리를 내뱉었을 병사들만큼이나 식민주의 이후의 대안을 열망했고, 제3세계 정치인들은 이에 화답했습니다. 그들은 반제국주의연맹, 아시아아프리카회의, 비동맹운동회의, 삼대륙회의 등을 통해 기존의 권력체제를 변화시키고자 했고, 새로운 경제질서를 추구했습니다. 그곳엔 독재나 군부가 들어서기도 했고, 석유의 이권이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학살당했으며, 사회주의가 대두되었다가 몰락하기도 했습니다. 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수많은 대안과 의견들이 다양한 경제, 정치 프로젝트로 시행되었고 일부는 성공을, 일부는 실패를 거두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 과거 동아시아의 기적이라 평가되며 아시아의 4용 중 하나였던 우리의 역사 또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홍콩, 대만, 한국은 모두 일당독재나 군부독재 체제에서 시민들의 희생아래 발전이 이루어졌고, 제3세계에 지원되던 서구의 지원금보다 더 많은 지원금이 동아시아에 집중되었습니다. 동아시아의 성공은 제3세계에 있어서 지배층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자 시민들에겐 억압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세계질서를 바꿔보려는 제3세계의 요구는 네 마리 용이라는 실적 앞에 거부당했고, 이들의 성공은 아시아적 가치란 이름하에 포장되어 IMF식 세계화를 선전하는 멋진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재체제 아래에서 다수의 희생과 서구의 자본으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성공은, 70년대에 제3세계를 강타했던 금융위기처럼 90년대의 금융위기를 맞이하며 맨얼굴을 드러내게 됩니다.

요란 테르보른이 말한 것처럼 냉전은 근본적으로 비대등한 분쟁이었지만, 양 진영이 서로 대등한 분쟁인 것처럼 상정하고 경험한 분쟁이었던 만큼, 제2세계라 불리웠던 소련의 몰락은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던 제3세계 프로젝트 또한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그것은 서구가 제3세계 급진운동을 치밀하게 견제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자는 제3세계 내부의 모순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말합니다. 제3세계는 제1세계에게 굴복했고, 지금의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의 프로젝트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패권에 대항할 제도적 기구도, 사상도 없습니다. 남은 것은 IS같은 잔혹한 종교적 근본주의, 혹은 구호밖에 남지 않은 대중운동 뿐입니다. 자본주의의 멸망을 상상하는 것이 세계의 멸망을 상상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과거에 멸시당하고 착취당해온 제3세계 시민들이 만들어낸 제3세계 프로젝트라는 역사를 바라보며, 새로운 세계적 프로젝트라는 역사를 상상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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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의 수난사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유명한 위인들
베스 러브조이 지음, 장호연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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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유피 인사유명.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죽어서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랑이처럼 죽어서 가죽을 남길 뿐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사람의 시체는 무엇 하나 버릴 것 없는 고급 재료들이기에, 호랑이처럼 죽어서 가죽밖에 남기지 못했다고 해서 아쉬워할 것은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시체도 욕망의 대상이 됩니다. 보통 사람의 팔뚝이나 무릎은 부위별로 잘려 의대생들의 실습재료로 사용될 수 있고, 장기는 다른 사람의 장기를 대체할 수 있습니다. 뼈는 곱게 간뒤 반죽해 치근수술에 사용되고, 피부는 성형수술을 통해 다른 미녀의 얼굴에 들어갑니다. 보통 사람들의 몸도 유용하지만, 유명한 사람들의 몸은 더 유용합니다. 그들의 몸은 때론 세계적 관심을 받는 과학연구의 대상이 되고, 때로는 숭배의 대상이 됩니다.

6년 전에 연예인 故 최진실씨의 유골함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범인이 뭐라 말했건 간에, 확실한 것은 故 최진실씨는 죽어서도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에 대한 욕망의 역사는 길고도 많습니다. 성 니콜라우스, 아인슈타인, 베토벤, 링컨, 체 게바라, 오사마 빈라덴, 토머스 페인.. 수많은 유명인들의 시체는 살아있는 자들의 욕구에 의해 갈리고 파괴되고 장식되었습니다. 저자 베스 러브조이는《무덤의 수난사》에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했던 유명인들의 역사를 소개합니다. 성유물 문화, 사이비 과학이었던 골상학의 영향인지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서양인들이지만, 동양에도 그런 문화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부처의 사리를 모셔둔 불교의 절이 존재하고, 많은 신도들이 그곳을 찾고 있습니다.

유명인의 신체를 소유하고싶다는 욕망은, 때로는 개인적이고 때로는 정치적이며, 때로는 경제적입니다. 로젠바움은 절친한 친구였던 음악가 하이든의 두개골을 원했고, 항구도시 미라와 바리는 도시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성 니콜라우스의 유물을 원합니다. 레닌과 김일성의 몸은 정치체제를 위해 반영구적 시체가 되었습니다. 시체를 욕망하는 부위도 유명인에 따라서 다릅니다. 세계적인 천재 아인슈타인의 신체에서 욕망의 대상이 된 것은 뇌였고, 베토벤의 신체에서 욕망의 대상은 귓속뼈였습니다. 죽은 자의 신체에 대한 모든 행동에서 공통점은, 죽은 자는 조용하지만 그것을 두고 살아있는 자들끼리 다툰다는 점입니다. 그 신체가 누구의 것인지부터, 어디에 안치되야 하는지의 문제는 논쟁적입니다.

1878년, 존 스콧 해리슨 의원이 오하이오에서 갑자기 죽었다. 그는 아주 부자였고 미국 전 대통령의 아들이었다. 외과의들은 앞 다투어 그의 뇌를 연구하고 싶어했다. 그들은 그의 심장과 심실은 물론이고 뼈와 혈관까지도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특별히 시멘트 관을 주문했고 일주일 동안 한시간도 빼놓지 않고 경비를 세워 시신을 지키게 했다. 일주일 뒤 해리슨의 가족들과 친구들은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오하이오 강가에 있는 그의 무덤에 모였다. 참석자 가운데 한 명이 옆에 있는 어린아이의 무덤에서 도굴의 흔적을 발견했다. 어린아이의 시체까지 훔쳐가는 만행에 사람들은 분노했고 해리슨의 아들과 일행은 경찰의 수색영장과 함께 오하이오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학교에서 어린아이의 시체를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몸집이 큰 시체를 하나 찾아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해리슨이었다. -《시체를 부위별로 팝니다》pp.138~139


현대가 시작되면서 무덤의 수난사는 많이 사라졌습니다. 사람의 두개골 모양으로 여러 특징들을 설명한다는 사이비 과학인 골상학이 사라지고, 개인이 집에 두개골과 같은 사람의 뼈를 장식하는 문화가 대접받지 못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유물을 소유하겠다는 욕망을 포기했습니다. 물론 故 최진실씨나 엘비스 프레슬리 등 현대의 스타들에 대한 욕망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역할은 박물관과 기념관이 대신했습니다. 시체 수요에 대한 매물도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대체되었습니다. 시신 연구를 위해 무덤을 파헤치던 과거와 달리, 장례식 비용만 대주면 몸을 마음대로 써도 좋다는 빈곤층은 세계 곳곳에 널려있습니다. 오기 페르나의 말처럼, 심장부터 피, 온갖 장기와 사람가죽을 구하는 일은 더 쉬워졌습니다. 자본주의의 힘은 새로운 농장을 만들었습니다. 소나 닭이 아닌, 사람을 경작하는 농장이라는 점만 다를 뿐입니다.

자신이 일하는 직장의 책상 위에 가장 친했던 친구의 두개골을 장식하고 싶다는 욕망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묘지에 대한 욕망은 여전합니다. 하상복은《죽은 자의 정치학》에서 시체의 새로운 욕망, 국립묘지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 바 있습니다. 죽은 자는 정치적 기호가 되어 살아있는 자들의 양식이 됩니다. 국립묘지는 어떤 의미를 가진 공간인가? 국민들에게 애국심과 조국을 위한 충성과 희생의 당위를 웅변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국립묘지에 누가 들어갈 수 있는가? 독재자와 소방수 중에 누구의 묘지가 더 커야 하는가? 시체가 무언가를 상징하는 한, 다양한 범위에서 시체를 둘러싼 이야기들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유명한 사람들의 시체를 향한 욕망은, 그 시체가 영원히 떠돌며 우리 곁에 있는, 어찌보면 불멸과 같은 이미지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우리들, 산 자들의 욕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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