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미쳤다! - LG전자 해외 법인을 10년간 이끈 외국인 CEO의 생생한 증언
에리크 쉬르데주 지음, 권지현 옮김 / 북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자신과 다른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직접 그 다른 무언가가 되어보는 방법은, 효과적이면서 흥미진진합니다. 그렇게 경계를 넘나들며 바라본 관점은 여자가 남자의 삶을 경험한《548일 남장체험》, 반대로 남자가 여자의 삶을 경험한《지구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내국인이 외국인 용역노동자의 삶을 경험한《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보잘 것 없이》, 백인이 흑인차별을 이해하기 위해 흑인이 되어본《블랙 라이크 미》등의 책에서 말해주듯이, 그 자체로 교훈적입니다. 서양 외국인이 한국의 기업 문화를, 조직 문화를 경험하고 서양 외국인의 시선에서 말해주는 이야기들은, 한국인들만으로 구성된 조직에서는 때로는 인지하지 못하며, 때로는 알면서도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저자 에리크 쉬르데주는 능력있는 기업인으로, 한국의 재벌 LG의 프랑스 법인에서 활약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기업들은 해외에서 도약을 시작하려고 준비중인 상태였고, 저자는 그런 미지의 세계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전 직장의 동료들, 특히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의 기업은 편협하고 군대식이며,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며 저자를 만류했지만, 저자는 악명은 높았지만 그만큼 효과적인 한국의 기업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에리크 쉬르데주는 입사하기 위한 면접에서부터 한국식을 경험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에리크 쉬르데주가 준비해간 것들, 자신의 능력을 설명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취업할 때 지원자의 능력보다 학벌이 더 중요한 것처럼, 한국인들은 그가 도시바, 필립스, 소니에서 일했다는 이력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기업들은 정상을 차지하고 있던 일본과 유럽의 대기업들의 시장 점유율을 점차 밀어내면서 급격하게 발전하는 중이었고, 그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자부심이 저자에게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의 영업적 능률과 유럽식 경영 방식이 갖는 장점을 양립시키겠다는 개인적인 욕망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은 부하직원들에게 쉽게 화를 내고, 상대방에게 욕을 하고, 문을 쾅쾅 닫고, 사전이나 의자같은 물건을 직장 동료들에게 던지는 사람들이었지만, 사원 개개인이 성취해야 할 명백한 목적, 효과적인 관리 시스템, 수치화된 목표 달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기계가 되었습니다. 에리크 쉬르데주는 서양에서는 협력업체들을 일방적으로 대할 수 없다고 간부들을 설득했지만, LG 간부들은 협력업체와의 정, 인간관계, 고마움의 표시같은건 전혀 하지 않았고, 약속도 어겼습니다. 한국의 기업 문화는 비인간적이었지만, 엄청나게 효율적이었습니다.

LG의 세계, 한국 기업의 세계는 철저한 서열 문화, 실적 문화였습니다. 가장 위에 존재한 자, 재벌 일가는 신이나 다름없었고, 사장은 아버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상사와 회사는 세계의 전부였고, 그 관계를 구성하는 것은 권위였습니다. 직원들에게 의무는, 개인의 권리를 앞섰습니다. 그것은 서양인에게 과거의 세계이자, 충격적인 세계였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현재만이 존재했습니다. 실적이 그저 그런 사원은 그 이전 사업에서 아무리 좋은 성과를 냈더라도 징계를 받거나 가차 없이 해고당했습니다.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평가 시스템은 가혹했습니다. 목표를 100퍼센트 달성했을 때에는 초록색, 95퍼센트 이상일 때에는 노란색, 그 이하는 붉은색으로 표시되었습니다. 목표의 99퍼센트가지 달성해도 그것은 목표를 달성한 것이 아니었으며, 직원들은 언제나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좋은 실적을 내도 잘못한 것만 중요했으며, 격려와 상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셀프세탁방을 위한 세탁기 신제품을 출시할 때 동네 카페와 연계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카페 안에 작은 세탁 구역을 두고 고객이 오면 인터넷에 연결해서 텔레비전과 오디오, 컴퓨터 기기 등 다른 엘지 데품을 사용해볼 수 있도록 꾸민 곳이었다. 이 새로운 카페를 '워시 바'라고 이름 짓고 열다섯 군데를 시범 운영했다. 안타깝게도 실험은 석 달 만에 끝났다. 독창성도 있었고 고객들도 좋아했지만, 한국의 신임 부회장이 납득할 만한 설명도 해주지 않고 프로젝트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시도가 싫다는 것이고 그것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 p.114


한국의 재벌 LG의 이런 기업문화는 매출과 실적이 성장중일 때는 비인간적이었지만 효율적인 것이 될 수 있었지만, 매출과 실적이 부진할 때는 그냥 비인간적인 문화였습니다. 하루 10시간 이상 근무, 회사에 대한 맹목적인 헌신, 경직된 명령 체계, 불안정한 고용은 기업이 시장지분을 넓히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그것은 직원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LG 프랑스 법인의 서양인 동료들은 입사한지 2년을 버티지 못했습니다. 저자는 놀랍게도 9년이나 LG에서 버텼습니다. LG에서 최초로 외국인으로서 임원진이 되기도 했습니다. 임원이 된 그가 한국에 연수를 와서 본 것은 연간 매출액이 600억 달러가 넘는 다국적 기업의 최고 책임자들의 모임이라기엔 너무나 한국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1월의 추운 날씨에 야외에서 LG의 구호를 외치며 술을 마시고, 또 술을 마셨습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모든 사람을 괴롭게만 한 술자리였지만, 그 모습이야말로 LG에 입사한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임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LG의 성장이 주춤하면서 재벌의 경영 원칙은 기업에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천룡인이나 다름없는 절대권력을 가진 재벌 일가에서 말단 직원까지 철저하게 서열화된 제도는 잘 나갈땐 일사천리의 파워를 보여줬지만,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현장 수행자와 정책 결정자의 괴리가 나타났습니다. 개방적이고 세계화의 흐름을 따라가던 LG는, LG그룹 창립자의 손자인 신임 부회장 구모씨가 등장하면서 다시 폐쇄적이고 한국적인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실적만이 중요한 기업문화에서 실적이 나오지 않을 때, 기업의 문화는 부패합니다. 직원들의 고객은 소비자가 아니라 상사가 됩니다. 업무 상당수는 상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일, 보여주기 위한 일로 변질됩니다. 그런 문화에서 생산성은 점점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상사에게 해고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야근과 주말근무를 밥먹듯이 하기 때문에 근무시간은 늘어나지만, 실제 생산적인 일을 하는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비자의 의견이 최우선이 아니라 그룹 회장님의 취향이 최우선이 된다면, 제품 경쟁력 또한 긍정적일 수 없습니다.

"독재적 방식은 일시적으로는 효율적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많은 부작용을 낳으며, 민주주의는 단기적으로는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 경제학자 피터 린더트


LG의 기업문화, 한국의 재벌 문화는 부하가 상사에게 직언하기 힘든 독재적 방식으로 효율성을 구축했지만, 장기적으로 그 폐해가 나타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자가 LG에서 경험한 한국의 문화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은 아닙니다. 한국인들은 오로지 갑과 을이라는 인간관계만 존재하며, 정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지적도, 요새 문제되고 있는 사회이슈입니다. 사회의 정점에서 군림하는 절대권력 재벌일가들은, 액턴 경의 경구처럼 절대로 부패하고 있습니다. 야근 등 상사에게 보여주기식의 문화는, 옆집 학부모에게 질 수 없다는 사교육 열풍, 수능 만점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학과에 갈 수 없다는 아이러니함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서양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한국 기업, 조직 문화의 문제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즉 문제는 우리들 자신이 침묵한다는데 있습니다. 침묵하며 부조리를 계속 견딜 것인지, 죽창을 들던 시위를 하던 정치권을 압박하던 변화의 시대를 만들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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