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의 종말 - 지폐 없는 사회
케네스 로고프 지음, 최재형.윤영미 옮김 / 다른세상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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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이 점점 얇아지고 있습니다. 물가는 오르는 데 반해 봉급은 요지부동인 슬픈 현실도 원인 중 하나지만, 점점 지갑에서 현금이 사라지는 것 또한 원인 중 하나입니다. 과거엔 수십 장의 지폐와 동전을 들고 다녔지만, 지금은 비상용으로 들고다니는 30,000원 정도를 제외한다면, 카드 하나로 모든 금융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아직 현금이 필요한 상황이 간간히 등장하기 때문에 카드 하나만으로 살 수는 없지만, 앞으로 몇 년 뒤면 비상용 현금마저도 필요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현금을 점점 사용하지 않는 와중에, 새로운 지폐가 등장했었습니다. 7년 전, 여러 논란 속에서 50,000원권 지폐가 한국사회에 통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화폐의 등장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돌이켜보면, 개인적으로 어떤 변화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ATM기계가 50,000원권 지폐 호환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아무 불편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사 먹을 때도, 쇼핑을 할 때도, 선물을 줄 때도, 50,000원권의 등장이 가져온 변화는 없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시민들은 실생활 속에서 50,000원권 지폐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볼 일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 화폐 발행액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50,000원권 지폐입니다. 화폐 중 50,000원권 지폐는 전체의 77%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발행액 비율과 지폐 양이 일치하진 않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그 많은 50,000원권 지폐가 어디에 있는지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향은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나타납니다. 지폐 1장에 100미국달러(120,192원), 1만엔(102,355원), 500유로(627,884원), 1,000스위스프랑(1,172,780원)의 높은 가치를 지니는 고액권들은 공급의 80%에서 높게는 90%가 넘습니다.

케네스 로고프의 이 책은《화폐의 종말》로 번역되었지만, 원제는 the curse of cash입니다. 현금 중에서 어떠한 현금이 경제에 저주와 같은 존재인지 케네스 로고프가 말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바로 저 고액권들입니다. 케네스 로고프는 많은 양의 고액권 지폐가 정상적인 경제활동보다 불법적인 경제 활동에 사용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돈세탁, 뇌물 공여 및 수수, 마약 거래, 인신매매, 부정부패, 밀수, 사기, 탈세..과거 부정한 거래를 할 때 무거운 사과박스나 007가방을 사용했지만, 지금은 비타500상자처럼 더 가볍고 더 효율적인 거래가 가능합니다. 바로 고액권 덕분입니다.

케네스 로고프는《화폐의 종말》이란 번역처럼 궁극적으론 현금 없는 사회가 지향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금 없는 사회를 위해선 단기적으론 고액권만 폐지하고 소액권 및 동전은 당분간 사용되어야 하며, 저소득층 및 금융취약계층을 위한 다양한 대책(현금카드 발급, 금융인프라 시스템 접근 완화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크게는 현금 없는 사회, 작게는 고액권 폐지 사회가 되면 범죄비용이 증가하기 때문에 전 세계의 국경을 넘나드는 범죄가 줄어들 것이며, 탈세도 현재의 10~15% 수준 감소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케네스 로고프는 탈세 감소만으로도 시뇨리지(Seigniorage)를 상쇄할 것으로 내다봅니다.

현금을 제한하는 것은 범죄와 테러를 종식시키지는 못하겠지만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현금을 감축시키는 것은 미국 같은 나라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며 유일한 조치일 것이다. 불법이민자 고용은 말할 것도 없고 고용주들의 최저임금 위반이나 사회보장 보고 등을 회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 p.297


범죄방지효과보다 더 주목하는 점은 금리정책에 있습니다. 지폐의 폐지는 중앙은행의 제한없는 금리정책에 막대한 영향을 가져올것이라고 말합니다. 케네스 로고프는 지폐가 폐지될 경우 보다 탄력적이고 유동적인 금리정책을 펼칠 수 있으며, 다양한 경기변화에 더 효과적인 대응을 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합니다. 정책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케네스 로고프의 주장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금리문제에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지만, 현금에서 완전 전산화가 되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여러 문제들, 익명성, 사이버 범죄, 정전, 공중 보건의 영역까지 접근하고 있습니다.

한국은행은 2020년까지 동전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영역이 카드결제만으로 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언젠가는 현실화될 미래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케네스 로고프의 주장대로라면, 더 시급한 과제는 따로 있습니다. 동전보다 고액권을, 신사임당을 먼저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동전을 없앤다면 제조비용이 절약되는 장점이 있겠지만, 고액권을 없애고 모든 금융 거래를 온라인으로 전산화할 수 있다면 투명성이 높아지고 세수 확보에 유리해지면서 체납자와 조세회피자를 찾아내기 쉬워질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지하경제 양성화를 주장한다면, 케네스 로고프의 주장을 들어볼 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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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12-23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사임당뿐 아니라 화폐 자체를 없애야 하고 없앨 수 있다고 믿습니다. ^^